161화
남부 암흑가의 지배자, 투랑에게 도전장을 내민 정체불명의 사내가 등장했다.
그 소식은 일파만파 퍼졌다.
관리국의 비밀 요원, 집행자들은 다급히 본부에 보고했다. 남부 관리국의 주요 인사들이 소집됐다.
“한 달도 안 된 투견이 챔피언을 꺾었다고?”
“거기다 투랑한테 바로 도전하다니. 노골적이군.”
“98레벨이라며. 정말 그 레벨로 그런 게 가능한가?”
“어디 출신인지도 확실치 않아.”
“최근 동부와 북부의 지배자도 당했다지.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네.”
“…설마 동일범일까?”
뭐 하나 확실한 건 없지만 이것만은 단언할 수 있었다.
투랑이 죽으면 남부 암흑가는 한동안 혼란기에 접어들 것이다.
100레벨조차 아닌 놈이 왕으로 군림하면 아랫놈들이 얌전히 따르겠는가?
그럴 리가. 100레벨이 넘는 레드 플레이어들은 남부 암흑가만 해도 제법 있다.
남부 지부장이 손깍지를 끼며 말했다.
“선택해야겠지. 기존 체계를 유지할지 아니면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일지.”
관리국과 암흑가는 서로 반목하는 세력.
새로운 지배자의 등장으로 암흑가가 분열되면 관리국 입장에선 분명 득이었다.
하지만 너무 일차원적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암흑가의 힘이 약해지면 우리의 영향력도 약해져.”
관리국은 시민들을 지킨단 명목으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즉, 레드 플레이어든 몬스터든 사람들을 위협하는 요소가 있을 때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암흑가가 무너져 평화로워지면 관리국의 힘이 축소되는 건 물론이고, 시민들의 이목이 그들에게 쏠릴지 모른다.
오랫동안 고인 샘물은 부패하기 마련.
관리국 고위층은 개혁이 가져올 변화가 무서웠다.
이러다 자신의 밥그릇까지 확 줄어들지도 모르니까.
“그럼 놈을 제거할 건가?”
“레벨은 낮아도 도살자를 죽인 놈일세. 조용히 처리하긴 힘들겠지.”
“아직 누가 이길지도 확실치 않아.”
“투랑이 이긴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자칫 놈이 이기거나 공멸이라도 했다간 최악의 사태로 번지겠지.”
어떤 간부의 말에 모두 식은땀을 흘렸다.
결투에서 승리하더라도 불구가 되면 사실상 죽은 거나 다름없다.
지부장은 간부들에게 좋은 의견을 내보라 말했지만 다들 눈치만 살폈다.
삐리리-!
그때, 눈치 없게 지부장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중요한 회담 중이니 나중에 연락하겠단 답신을 보내려 했다.
그러다 눈을 크게 뜨며 급히 전화를 받았다.
“대, 대주교님!”
[소식 들었네. 정체 모를 놈이 지하 투기장을 마구 헤집고 있다지?]
“예? 그, 그렇습니다!”
[남부 관리국은 나서지 말게. 그곳으로 기사께서 직접 갈 예정이라네.]
“…예?”
기사? 내가 아는 그 기사가 온다고?
남부 지부장은 너무 놀라 붕어처럼 입만 뻐끔댔다.
B구역의 포식자가 왜 C구역까지 왔단 말인가.
[녀석의 정체를 확인해 보고 싶다더군.]
“아… 그, 그렇군요.”
기사가 놈의 정체를 직접 확인하려 한다? 뭔가 심상치 않았다.
남부 지부장은 허릴 굽신대며 통화를 끊었다.
“지부장님, 무슨 일입니까?”
“대주교님께서 우린 이번 일에 손 떼라는군.”
“예? 그게 무슨…….”
아무리 태양교라도 남부의 균형과 평화가 걸린 일이다. 그런데 나서지 말라니.
월권행위에도 정도가 있지!
간부들은 성난 원숭이 무리처럼 끽끽대며 항의했다.
그러자 지부장이 뒷사정을 덧붙여 설명했다.
“5대 가문의 기사들이 내려왔다더군. 이번 사태의 주범이 누군지 확인하겠다고…….”
“아, 그럼 무조건 따라야죠.”
기사가 개입한단 말에 원숭이들이 조용해졌다.
남부 지부장은 곰곰이 생각하다 운을 뗐다.
“얼추 알겠어.”
“예?”
“투랑한테 도전한 놈의 정체를.”
* * *
“…5대 가문이요?”
“그래. 녀석은 5대 가문 중 어느 한 곳의 직계인 게 틀림없어.”
투랑의 말에 강유라의 꼬리가 바짝 섰다.
B구역의 실세인 5대 가문. 정도현이 그곳의 직계였다니.
레벨이 낮은데도 그만큼 강했던 게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귀족 출신이 어째서 C구역에?”
“사자가 제 새끼를 절벽 밑으로 떨구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닐까?”
“저, 투랑 님. 그건 인간이 지어낸 낭설입니다. 그러면 새끼가 죽어요.”
“어? 진짜?”
“어떤 짐승도 그런 짓은 안 합니다.”
투랑의 눈이 동그래졌다. 산타는 없다는 걸 처음 들은 아이처럼.
그 모습이 퍽 귀여워서 강유라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투랑은 머쓱한지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아무튼, 놈이 검강을 꺼낸 걸 보곤 확신했어.”
“…검강이 뭡니까?”
“녀석의 검기가 환하게 빛나던 거.”
“아, 그게 검강입니까?”
“그래. 기사들의 상징이지.”
C구역 사람들은 검강이 뭔지 잘 모른다. 그러나 투랑은 알고 있었다.
그는 예전에 견습 기사가 될 생각 없냐는 제안도 받았으니까.
투랑은 개인적인 사정을 설명하고 정중히 거절했었다.
“왜 거절하셨습니까? 좋은 기회인데…….”
견습 기사는 가주가 아니라 가문의 기사 눈에 띄어서 스카우트된 자들.
그 안에서 성취를 보이면 가문의 비전 심법을 하사받고 정식으로 기사가 될 수 있었다.
설령 기사가 되진 못하더라도 이런 암흑가에 몸담는 것보단 훨씬 명예롭고 편히 살 터.
그녀는 그의 선택이 이해가 안 됐다.
“비밀이야.”
투랑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충 얼버무렸다.
강유라는 궁금했지만, 그가 곤란해질까 봐 더 캐묻진 않았다. 투랑은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이거 자칫하면 질 수도 있겠는데?”
“…약한 소리 마십시오.”
그녀가 칼같이 말을 끊었다.
왕위 쟁탈전에서 패하는 건 곧 죽는단 뜻이니까.
‘투랑 님만 살릴 수 있다면…….’
그녀는 목숨을 내버릴 각오까지 마쳤다. 그가 살아 줬으면 했으니까.
신성한 결투에 끼어드는 한이 있어도 투랑이 이기게 할 거다.
“이제 나가 봐.”
“네.”
강유라가 경례하곤 밖으로 나갔다. 방에 혼자 남은 투랑.
그는 벽에 걸린 낡은 검을 바라봤다.
결투 도중 억울하게 죽은 스승님의 유품이었다.
“스승님, 이번 승부에서 제가 이기든 지든 곧 만나겠네요.”
투랑은 눈을 감고 자신의 몸을 살폈다.
딱 한 번은 더 쓸 수 있겠지.
‘이번이 마지막이야.’
투랑은 가슴을 부여잡았다.
호적수에게 모든 것을 쏟아붓고, 원없이 싸우다 승리하고서 죽는 것.
그게 그가 원하는 최후였다.
그에게 정도현의 등장은 마치 운명처럼 느껴졌다.
“반드시 이긴다.”
* * *
이틀 뒤, 결전 당일.
몇 년 만에 투랑이 경기에 나오자 인파는 평소의 몇 배로 북적였다.
관객석 자리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툭.
경기장으로 향하던 인파 속에서 어떤 사내는 누군가와 어깨가 부딪혔다.
한쪽은 머릴 빡빡 민 거구의 사내.
다른 한 명은 펑퍼짐한 로브 차림이라 작은 체격 외에는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대머리 사내는 그대로 지나가던 상대의 팔을 붙잡곤 버럭 호통쳤다.
“어이! 눈깔 어디다 달고 다니냐! 그리고 부딪혔으면 사과는 하고 가야 할 거 아냐!”
“앞을 똑바로 안 본 건 네놈이잖아.”
“뭐? 이 새끼가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대머리 사내의 눈에서 불똥이 팍 튀었다.
그는 남부 암흑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조직의 행동대장이었다.
“목소리로 봐선 어린 계집애 같은데. 진짜 뒈지고 싶냐?”
대머리 남자는 곱게 보내 줄 생각이 없는지 아예 멱살을 잡았다.
상대는 귀찮단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멍청하게 왜 명을 재촉하지.”
“너, 내가 누군지도 모르냐?”
“몰라. 앞으로도 알 일 없고.”
파바박-!
순식간이었다. 로브 차림의 여인이 손가락으로 남자의 몸 곳곳을 찔렀다.
그러자 남자가 돌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여자는 그를 놔둔 채 옆으로 지나가며 말했다.
“남은 5분 동안 인생이나 돌이켜 보면서 반성해.”
“…….”
남자는 내 몸에 무슨 짓을 했냐고 따지려 했지만, 이상하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골목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자, 경기장으로 향하던 행인들이 그를 피했다.
대머리 남자는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지만, 식은땀만 삐질 흘릴 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몸이 안 움직여!’
남자는 끙끙대며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마비됐던 감각이 차츰 돌아오더니 남자의 몸이 조금씩 움직였다.
“허억, 헉… 그 씨발년…….”
자유를 되찾은 그가 복수심에 찬 눈으로 콜로세움 형태의 건물을 쳐다봤다.
그 여자도 경기를 보러 왔는지 저쪽으로 향했었다.
‘설마 고레벨 플레이어인가?’
90레벨이 넘는 자신을 한 손가락으로 제압했다. 기묘한 스킬을 지닌 년이다.
애들을 싹 불러 모아서 처리해야겠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며 휴대폰을 꺼냈을 때.
톡, 토독.
휴대폰 액정에 핏방울이 비처럼 떨어졌다.
“…어?”
남자는 자신의 인중을 닦았다. 뜨끈한 핏물이 잔뜩 묻어 나왔다.
주르륵!
코피가 전부는 아니었다.
눈, 코, 입 그리고 귓구멍까지 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
마치 누군가가 온몸의 혈액을 쥐어짜듯이.
“썅! 이게 뭐야?!”
더 무서운 건 핏물이 아주 시커멨다.
혈액이 아니라 검은 물감으로 착각할 만큼.
“쿨럭, 켁, 케흑……!?”
남자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기침했다.
각혈이 멈추지 않고 숨 쉬는 것도 힘들었다. 폐에 핏물이 고였는지 끔찍하게 괴로웠다.
“사, 살려 줘…….”
남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뻗으며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행인들은 그를 보더니 기겁하며 부리나케 도망쳤다.
“젠장, 좀 도와 달라고…….”
남자는 그렇게 중얼대다 자신의 팔뚝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피부 곳곳에 흉한 물집이 잡히고 고름이 흘러내렸다.
문둥병 환자처럼 살이 썩어 문드러진 것이다. 사람들이 도망칠 만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내 몸이 죽어 간다. 그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황했다.
그러다 문득 떠올렸다. 그 여자가 떠나기 전에 했던 말이.
분명 그랬다. 5분 남았다고.
“설마…….”
그 여자가 내 몸에 무슨 수작을 부린 건가?
남자는 땅바닥을 꽉 움켜쥐고선 부들댔다.
분노가 가라앉자 이번엔 후회가 몰려왔다.
난 왜 하필 그 여자한테, 고레벨 플레이어한테 시비를 걸었을까.
그냥 지나쳤으면 살았을 텐데.
“씨발…….”
후회는 항상 늦게 하는 법.
푸화악-!
남자는 피를 한바탕 토하곤 그대로 쓰러져 죽었다.
* * *
남자를 독살한 여자는 자신의 좌석을 찾아가 앉았다. 사람이 너무 북적대서 짜증이 일었다.
‘쳇. 하필 내가 걸려서…….’
남부 투기장을 떠들썩하게 만든 의문의 사내. 그래 봤자 98레벨밖에 안 된다.
그러니 언노운이 아닐 확률이 높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정체를 확인해 보잔 의견이 기사들 사이에서 나왔다.
그래서 누가 갈 건지 제비뽑기로 정했고 그녀가 당첨됐다.
운도 지지리도 없지.
그녀가 그렇게 구시렁거리며 선수가 나오길 기다릴 때.
“…응?”
수많은 인파로 혼탁한 기운이 넘실대는데, 그중 깔끔히 정제된 기운 하나가 섞여 있었다.
그녀와 그리 멀지 않은 좌석에 앉아 있다.
조금만 더 멀었으면 그녀도 눈치 못 채고 그냥 넘어갔으리라.
‘뭐야, 꼴에 심법을 익혔네?’
평범한 수련으론 마력이 저리 정갈할 수가 없었다.
누군진 몰라도 심법을 제대로 익힌 놈이다.
C구역에서 저런 자를 만나다니.
그녀는 흥미가 생겨서 그를 훔쳐봤다.
“……?”
검은 가면으로 정체를 감춘 사내.
그런데 옆모습이 묘하게 익숙했다.
어디서 본 것 같았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기억을 되새겨 봤다.
“으음…….”
누구였더라? 알 듯 말 듯 생각이 안 났다. 그녀는 끙끙대다 관객들의 환호성에 눈을 떴다.
도전자, 정도현이 경기장에 올라왔다.
“오?”
그녀는 정도현을 보곤 감탄했다.
마력이 말도 안 되게 맑았다.
‘마력 순도만 놓고 보면 기사급이야.’
앞선 남자보다 훨씬 대단한 수준이었다.
그녀는 독사처럼 입술을 핥았다.
저 정도의 강자였다니. 싸워 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다.
‘얼굴도 역용술 같은 스킬이나 아이템으로 바꿨네. 대체 누구지?’
그녀는 끓어오르는 호승심을 못 참고 관중석에서 일어섰다.
그러더니 경기장으로 풀쩍 뛰어내렸다.
관람석 주변에 결계가 펼쳐져 있지만, 그녀는 손바닥을 뻗어 보랏빛 독기를 쏘아 냈다.
치이익-!
결계가 녹으며 사람이 드나들 만한 크기의 구멍이 뚫렸다.
그녀는 그 틈새가 아물기 전에 쏙 들어가 경기장에 사뿐히 착지했다.
제삼자의 등장에 관중석은 술렁였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도현 앞에 섰다. 그러곤 푹 뒤집어쓴 후드를 뒤로 넘겼다. 검은 토끼 가면을 쓴 여인이었다.
덤으로 그녀의 레벨도 공개됐다.
[???] [LV.124]
“안녕? 너 대체 누구야?”
그녀가 발랄한 목소리로 정도현에게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