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지하 투기장 현 챔피언, 도살자.
보름 만에 판도를 뒤엎은 초신성, 정도현.
둘의 대결 일정이 잡혔다.
그 소식에 관중은 둘로 나뉘었다.
“아무리 초신성이 잘 싸워도 벌써 챔피언한테 도전하는 건 좀…….”
“그래. 도살자 걔 112레벨이잖아.”
“100레벨 넘는 투견들 초신성이 다 두들겨 패던데 뭘.”
“야, 100레벨대랑 110레벨이랑 같냐?”
경기를 보는 관객들 대다수가 일반인이었다.
그래서 절대 못 이긴다와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의견으로 갑론을박 싸워 댔다.
베팅 비율은 도살자 쪽이 훨씬 우세.
그래도 정도현한테 건 사람들도 무려 3할이나 됐다.
그들은 단순히 역배를 노리거나, 첫날처럼 재미로 건 게 아니었다.
지금껏 정도현은 압도적으로 이겨 왔고,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으니까.
이번에도 분명 이변을 보여 줄 거라 믿었다.
“투랑도 왔다!”
“뭐? 어디, 어디?”
투랑과 전대 챔피언 강유라가 모습을 드러내자 관객들이 웅성댔다.
투기장의 주인이 몸소 경기를 관람하러 오다니.
덕분에 경기장의 분위기도 후끈 달아올랐다.
“이야, 많이도 왔네?”
투랑도 뜨거운 분위기에 흠뻑 취했다.
구경꾼이 이렇게 많이 모인 건 간만이었다.
“나랑 전대 관리자가 붙을 때 이만큼 모였었는데.”
“…그렇습니다.”
얼굴에 웃음꽃이 핀 투랑과 달리, 강유라의 표정은 어둑어둑했다.
저놈이 기어코 챔피언 앞에 섰다. 도살자마저 꺾으면 그다음은 투랑 차례였다.
그녀는 평소 도살자를 마음에 안 들어 했지만, 이번만큼은 그를 응원했다.
“이봐, 투랑!”
도살자는 경기장에 올라오자마자 쩌렁쩌렁 외쳤다. 시끌벅적하던 관중석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강유라는 귀를 쫑긋 세웠다.
저 녀석, 또 뭔 소릴 하려는 거지?
“이 녀석과 생사결을 치르고 싶다!”
도살자의 요구에 투랑은 물론이고 관중석의 모두가 흠칫했다.
생사결은 승자가 패자의 목숨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즉, 지면 죽는다. 관객들이 술렁였다.
“아직 한 달도 안 된 신인한테 생사결이라니…….”
“아니, 너무 가혹한 거 아냐?”
정도현을 응원하던 팬들이 이건 좀 아니지 않냐며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투랑도 도살자가 저렇게 나올 줄은 예상 못 했는지 잠시 침묵했다.
옆에 앉아 있던 강유라는 빠르게 머릴 굴렸다.
‘도살자가 저 녀석을 죽여 준다면…….’
그럼 투랑을 노릴 사람도 영영 없어진다. 강유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투랑 님, 아무리 그래도 신참이 생사결을 치르는 건 모양새가 안 좋습니다. 투기장 이미지에 악영향을…….”
“유라야.”
“네.”
“그, 꼬리 흔들리고 있는데.”
“아앗…….”
입으로는 싫다고 말했지만 몸은 솔직했다.
아까부터 꼬릴 마구 흔들며 저도 모르게 투랑의 몸을 툭툭 건드렸다.
누가 봐도 이 상황을 반기고 있다.
본심을 들켜 버린 강유라는 얼굴이 뻘게져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투랑이 한숨을 쉬었다.
“걱정되냐? 저 녀석이랑 붙으면 내가 질까 봐?”
“절대 아닙니다!”
강유라가 급히 고갤 저으며 부정했다.
하지만 머리 위에 달린 늑대 귀는 주인의 심경을 대변하듯 축 처졌다.
그 모습은 고고한 늑대가 아니라 주인한테 혼쭐이 난 강아지 같았다.
투랑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그녀를 째려봤다.
강유라는 송구스럽단 듯이 고갤 푹 숙였다. 그가 고갤 돌려 도살자를 쳐다봤다.
“생사결은 상대방이 받아들여야만 된다. 그건 알고 있겠지?”
“당연히 알고 있다!”
도살자는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정도현이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 여기는 모양.
하지만 상식적으로 신입 투견이 생사결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투랑은 정도현을 바라봤다.
“어쩔 거냐, 애송이?”
“생사결이면 저 녀석 죽여도 되는 거지?”
“그래.”
“하겠다.”
정도현은 이게 웬 떡인가 싶어 냉큼 수락했다.
투랑보단 약해도 112레벨이니 경험치를 쏠쏠하게 줄 거다.
그렇게 생사결이 성립되자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고 도살자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크하핫! 역시 받아들일 줄 알았다. 너와 난 동류니까.”
“기분 나쁘게 엮지 마라.”
정도현이 불쾌해서 항의했지만, 도살자에겐 씨알도 안 먹혔다.
그는 마치 어릴 때 헤어졌던 형제와 상봉한 것처럼 들떠 보였다.
정도현이 생사결을 받아들였으니, 이제 그 누구도 이 결투를 막을 수 없었다.
둘 중 한 명만 살아남는다. 투랑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정도현을 관찰했다.
‘목숨이 달렸는데도 망설임이 전혀 없었어.’
도살자를 이길 자신이 있단 뜻.
그는 궁금해졌다. 정도현의 전력은 어느 정도 수준일지.
인성과 가치관에는 문제가 있지만 도살자는 그가 인정한 전사.
분명 정도현의 진심을 이끌어 낼 수 있겠지.
“저 녀석이 이기면 몇 년 만에 도전자가 탄생하는 거네?”
“…….”
그 말에 강유라는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도살자가 질 리 없어.’
강유라는 도살자와 직접 싸워 봤기에 안다.
놈은 수인족으로 개조된 자신보다 훨씬 끈질기고 집요했다. 그야말로 인간의 탈을 쓴 괴물.
그런데 왜일까.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럼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심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람들의 거친 환호가 경기장에 메아리쳤다.
도살자가 창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정도현도 여유롭게 검을 뽑았다.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도살자가 말했다.
“난 이해한다. 강한 상대와 목숨 걸고 싸우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거지?”
“…….”
“나도 그랬다. 사선을 넘나들며 살아남았을 때의 그 짜릿함! 도저히 끊을 수가 없지.”
챔피언이 되고서 몇 년째.
그의 가슴을 뛰게 해 준 강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강유라가 유일했다. 그년을 꺾은 뒤론 하루하루가 지루했지.”
떠날 수도 없었다. 그는 이미 결투에 중독됐으니까.
“그러다 얼마 전에 네 소문을 들었다. 대단했지. 너보다 레벨 높은 상대도 농락하더군.”
도살자는 그의 경기를 보곤 확신했다.
저놈은 전대 챔피언이었던 강유라보다 강하다고.
레벨이 낮은데 어떻게 그런 힘을 가졌느니, 정체가 뭐니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도살자는 모처럼 발견한 사냥감에 극도로 흥분했다.
“누가 살아남든 후회 없는 대결을 해 보자고!”
“유언은 그게 다냐?”
“크하하핫!”
도살자가 광소했다. 그것만으로도 공기가 울리며 작은 충격파가 퍼졌다.
불어오는 바람. 정도현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깃발처럼 펄럭였다.
“방심했니 뭐니 김빠지는 변명은 하지 마라! 난 처음부터 전력으로 갈 거니까!”
도살자는 그리 말하며 다리를 굽혔다.
콰아앙-!
그가 서 있던 바닥이 움푹 꺼지며 공중에 붕 떴다.
정도현의 머리 위에서 수직으로 강하한다. 오른손에 들린 창날이 마력을 머금고 번뜩였다.
“크하하핫!”
음속보다 빠른 창 찌르기. 정도현은 피하지 않았다. 칼날을 눕혀 공격을 받아 냈다.
쩌어엉-!
충돌의 여파로 경기장 바닥이 쩍쩍 갈라지고 뒤틀렸다.
관중석에 쳐진 결계가 태풍 앞의 유리창처럼 흔들렸다.
“역시!”
도살자는 기쁜 심정을 토해 냈다.
이 녀석이라면 견뎌 낼 줄 알았다.
다른 97레벨 플레이어였으면 방금 일격에 팔이 찢기거나 뼈가 부러졌으리라.
하지만 정도현은 멀쩡했다. 심지어 표정도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눈빛이 말해 주고 있다. 이것밖에 안 되느냐고.
“크하하핫!”
도살자는 미친놈처럼 웃으며 모든 마력을 방출했다. 회색빛 마력이 전신을 휘감았다.
끓다 못해 흘러넘칠 것만 같은 거력이 창에 실렸다.
그는 체력 안배 따윈 없었다.
단거리 달리기 선수처럼 매 순간 온 힘을 쏟아붓는다. 그것이 투견이다.
콰앙!
창날과 칼날이 부딪히자 폭발이 일었다. 어마어마한 마력 반발에 도살자는 손가락이 저렸다.
흥분된다. 챔피언이었던 강유라도 이런 압박감은 주지 못했는데.
도살자는 인정했다. 이 녀석이야말로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 최고의 호적수라고.
아마 죽을 때까지 오늘의 결투를, 이 순간을 잊지 못하리라.
“야.”
그때, 정도현이 입을 열었다.
화난 여자친구 뺨칠 만큼 싸늘한 말투였다.
그러자 살 떨리는 전투에 취해 있던 도살자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흐흐! 왜 그러지? 즐겁지 않나?”
“기대 이하라 실망했다.”
“…뭐?”
“흥분해서 혼자 날뛰는 게 다잖아.”
힘은 그럭저럭 괜찮지만 중요한 기술이 빠졌다.
놈은 벌써 호흡이 가빠졌다. 얼마 못 가서 제풀에 지쳐 탈진할 터.
할아버지 말씀이 맞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지.
“그래도 챔피언이니까 예우는 해 주마.”
“무슨 소릴…….”
스스스-!
정도현의 검기가 서서히 줄어들고 눈부신 빛을 내뿜었다.
그 변화를 코앞에서 본 도살자는 눈을 부릅떴다.
‘검기가 변했어?’
그가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우지직!
검이 창날에 담긴 마력을 깨부쉈다.
서걱!
도살자가 기겁하며 물러났지만, 깔끔한 소리와 함께 한쪽 팔이 잘렸다.
“컥……!?”
도살자가 숨을 훅 들이켜며 거릴 벌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오른팔을 잃었다. 무기도 바닥에 떨궜다.
그는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분석했다.
“…망할 개자식! 방금 건 도대체 뭐냐! 무기에 달린 스킬이냐?!”
살면서 한 번도 검강을 본 적 없던 도살자. 그는 뭔가 착각하곤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비겁한 자식! 무기나 아티펙트 스킬을 쓰는 건 금지다!”
“둘 다 아니야. 이건 그냥 검기를 응축시킨 거라고.”
“거짓말하지 마라! 심판!”
도살자는 심판한테 항의했다.
녀석이 착용한 장비들을 검사해 보라고.
분명 저 녀석의 무기에 마법이 내장되어 있을 거다.
궁지에 몰린 도살자의 항의에 심판은 투랑을 쳐다봤다.
장비를 검사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결투의 흐름이 끊긴다.
이러다 정도현에게 베팅한 사람들이 거세게 항의할 수도 있었다.
투랑은 심판에게 고갤 끄덕였다. 책임은 내가 질 테니 검사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결투 일시 중단! 초신성이 착용한 장비들을 확인하겠습니다.”
심판이 나서서 결투를 중재하자 관중석에서 탄식이 나왔다.
정도현이 승기를 잡은 경기였다. 그런데 중단이라니.
사람들은 상처를 지혈 중인 도살자에게 야유를 날렸다.
“우우우우!”
“비겁한 새끼!”
“챔피언이란 놈이 저딴 꼼수나 부려? 고추 떼라, 이 새끼야!”
“닥쳐라! 알지도 못하는 쓰레기들이!”
사람들의 비난이 쏟아지자 도살자는 역으로 그들에게 성을 냈다.
“아…….”
그 모습에 투랑은 이마를 탁 쳤다.
관객한테 욕을 하다니. 챔피언 이전에 투견으로서 실격이었다.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강유라도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이러면 도살자 말대로 초신성이 실격패를 당해야 해.’
그래야 이 소란을 깔끔히 잠재울 수 있다.
강유라는 장비 템을 검사하는 심판을 애타게 쳐다봤다. 잠시 뒤 확인이 끝났다. 심판이 말했다.
“착용 중인 장비에 이상 없습니다. 경기를 속행합니다.”
“뭐, 뭐라고!”
도살자의 표정이 굳었다.
심판이 경기장에서 내려가자 정도현은 다시 검을 들었다.
성난 관객들은 머리 위로 주먹을 흔들며 비난의 화살을 쏟아 냈다.
“비겁한 새끼!”
“뒈져라!”
“빨리 죽여 버려, 초신성!”
모두의 응원이 깃든 것처럼 정도현의 검이 찬란하게 반짝였다.
겁에 질린 도살자는 주춤주춤 물러서며 중얼댔다.
“바, 방심해서… 그래, 내가 방심만 안 했으면…….”
“추하게 굴지 말고 죽어.”
쾅-!
정도현이 땅을 박차며 단숨에 거릴 좁혔다.
사선으로 검을 내리긋자, 도살자의 상반신이 두 쪽으로 찢어졌다.
챔피언치곤 허망한 최후였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딱 1레벨이 올라 98레벨이 되었다.
정도현은 칼날에 묻은 피를 털어 내곤 관중석으로 고갤 돌렸다.
맨 꼭대기에 앉은 투랑과 눈이 마주쳤다. 정도현이 그에게 손짓했다.
“내려와.”
나지막한 한마디. 관중석에 앉아 있던 모두가 그걸 들었다.
투랑은 그 말만을 기다렸단 듯이 씩 웃으며 일어났다.
“애송이, 아니 몇 년 만에 나타난 도전자여! 네 도전을 받아들이겠다!”
투랑은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게 목청을 높였다.
“몸부터 추슬러라. 이틀 뒤, 이 시간에 결투를 시작하마!”
한 달도 안 된 투견이 챔피언을 꺾고 왕의 자리까지 넘보다니.
와아아아-!
투랑의 발언에 관중석은 또 한 번 뒤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