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강유라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 상황에서 곧장 나한테 도전하겠다고?
대체 뭐 하는 자식이야.
“…고작 3개월 차 한 명 이긴 거 가지고. 까불지 마라.”
“쫄았나?”
“도발해도 소용없어. 투견이면 이곳의 규칙에 따라야지.”
강유라는 그렇게 말하곤 휙 돌아섰다.
정론이었지만 남들 눈에는 영락없이 꼬릴 만 개처럼 보였을 터.
수백, 수천의 관객들이 보는 앞이라 더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일반 투견도 아닌 무려 전대 챔피언이 들어온 지 며칠밖에 안 된 신입이랑 붙는다니. 어불성설이다.
비겁하고 추잡스러웠다.
소문이 번지면 투기장 이미지에 악영향만 생길 거다.
‘역시 힘을 숨기고 있었어.’
실력 평가에서 놈이 보여 준 건 일부분에 불과했다. 물론 전력을 다한 게 아닌 것쯤은 그녀도 예상했었다.
그러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심지어 자신에게 도전하는 걸 보면 아직도 여력이 남은 모양.
‘괴물 같은 자식.’
저게 어딜 봐서 97레벨이야.
강유라는 기절한 제자를 보곤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놈 데려가서 치료해.”
“아, 예!”
그녀의 지시에 얼이 빠졌던 안전 요원들이 그제야 정신 차리고 허둥지둥 흑곰을 챙겼다.
정도현은 멀어지는 강유라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안 넘어오네.’
수인족이라 못 참고 들이받을 줄 알았는데 보기 보다 침착했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시간문제니까.
“와아아아!”
“역배 터졌다! 씨발 터졌다고!”
한편 관중석은 난리가 났다.
재미 삼아 정도현한테 돈을 걸었던 몇몇은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마구 지른다.
반면 흑곰을 찍었던 이들은 전부 죽상이었다.
안전 자산인 줄 알았던 베팅금이 훨훨 날아갔다.
휴짓조각이 돼 버린 승부 예측 용지들이 경기장에 벚꽃잎처럼 흩날렸다.
* * *
“흑곰이 졌다고? 걔, 일 년 이상 구른 애들이랑도 비볐지 않냐?”
“…예. 게다가 전신 야수화까지 사용했습니다.”
“허, 그런데도 졌어? 그것도 순식간에?”
전신 야수화는 투랑이 부분 야수화를 개량해 만든 기술.
그는 그걸 수인족 전사들에게 전수해 줬다.
그 기술은 강력하지만 그만큼 위험하고 통제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투견끼리 싸울 땐 사용을 금했다.
전신 야수화를 사용해도 되는 순간은 생사결이거나 몬스터와의 전투뿐.
흑곰의 우수한 재능과 방만함이 오히려 독이 된 셈이었다.
“네 제자 상태는 어때?”
“내상을 좀 입었지만 몇 주 쉬면 복귀할 수 있습니다.”
“그건 다행이네.”
강유라는 잠시 머뭇대다 결국 얘길 꺼냈다.
“…처벌은 어떻게 할까요?”
“무슨 처벌?”
“흑곰은 투랑 님의 명을 어기고 투견과의 대결에서 전신 야수화를 썼습니다.”
흑곰은 강유라가 직접 키워 온 제자지만 승리에 눈이 멀어 감히 투랑의 명을 어겼다.
그러니 합당한 벌을 받아야만 한다.
그래야 조직의 규율이 선다.
전신 야수화를 사용할 때 흑곰도 분명 그 정도는 각오했을 터.
“아, 그래. 벌은 받아야지.”
“…벌칙 룰렛을 돌리면 되겠습니까?”
강유라는 전대 투기장 관리자가 내리던 형벌을 떠올렸다.
눈, 귀, 손가락, 혓바닥 등등.
그자는 벌칙 룰렛을 돌려 당첨된 신체 부위 하나를 도려냈었다.
“아, 룰렛은 됐고. 그 녀석 술 좋아한다고 했었지?”
“…예? 그, 그렇습니다.”
흑곰은 중독자 수준으로 술을 좋아했다. 지난 달에는 경기 전날까지 진탕 마셔 대서 그녀가 따끔하게 혼을 냈었다.
프로 의식을 가지라면서.
“몸 다 낫고 한 판 이길 때까지 술은 입도 대지 말라고 전해.”
“…예?”
형벌이 고작 금주령이라고? 날짜로 따지면 끽해야 한 달 정도일 터.
물론 알코올 중독자 입장에선 견디기 힘들겠지만, 신체 부위 하나를 제거하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투랑 님, 정말 그걸로 괜찮으신 겁니까?”
“뭐가?”
“형벌이 너무 약한 게 아닌지…….”
솜방망이 처벌은 조직의 기강을 느슨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음지에선 폭력과 공포로 부하들을 다스린다.
“뭐, 틀린 말은 아닌데. 그래도 인명 사고 안 나고 끝났잖아? 또 내 명령 어기면 평생 술 못 마실 거라 전해 줘.”
강유라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역시 그는 다른 암흑가 지배자들과는 달랐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부하가 규칙을 어겼는데도 융통성을 발휘해 주다니.
다른 암흑가 조직이었으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평생 따르겠습니다.’
강유라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용기가 없어서 속으로만 맹세했다.
그를 보면 꼬리가 제멋대로 살랑거렸다. 몸 안쪽이 뜨겁고 욱신댄다.
말로 형언하기 힘든 묘한 기분이었다.
마약을 해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그나저나 그 녀석, 역시 힘을 숨기고 있었네.”
“…그렇습니다.”
“내 목을 따겠다고 했으니 이 정돈 돼야 재밌지. 기대되는데?”
투랑의 혼잣말에 강유라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렇다. 그 녀석의 최종 목표는 투랑.
다시 말해 지하 투기장의 왕좌를 노린다는 소리.
뜨겁게 달아올랐던 강유라의 마음이 팍 식었다.
‘만에 하나 투랑 님이 지시면…….’
같은 하늘에 태양이 둘이나 떠 있을 순 없는 법.
왕을 결정짓는 싸움은 생사결. 승자만이 살아남는다.
투랑이 죽을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지독한 불안감이 몰려왔다.
‘아냐, 그럴 리 없어.’
기우다. 투랑 님이 그딴 놈한테 질 리 없다.
아니. 애초에 전제가 잘못됐다.
투랑 님에게 도전하기 전에 저지해야만 한다.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녀의 눈빛에 강철과도 같은 결의가 맺혔다.
* * *
정도현이 흑곰을 쓰러트렸단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날 투기장에 없었던 관객들은 반신반의했다.
흑곰은 최근에 들어온 투견들 중에서 최고의 에이스로 평가받았다.
그런 이가 며칠 된 신입한테 깨졌다니.
“어이, 네가 흑곰을 꺾었다며?”
“나랑 한판 붙자.”
투견들이 먼저 다가와 시비를 걸어 댔다.
경력은 쌓였지만 승률이 낮거나 애매해서 인기가 없는 투견들이었다.
주목받는 자를 꺾으면 그만큼 인지도가 올라간다.
정도현을 보며 다들 생각했다.
다른 지역 투기장에서 활동하다 온 녀석도 아니고, 들어온 지 며칠밖에 안 된 초짜.
흑곰처럼 방심만 안 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커헉……!?”
“자, 잠깐만!”
“켁!”
정도현을 만만히 보고 덤빈 투견들이 전부 경기장 바닥을 뒹굴었다.
새로운 괴물 신인의 등장에 관객들은 미친 듯이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
“역대급 신인이다!”
벌써 4연승이었다. 심지어 초짜들이 아니라 제법 경력 쌓인 투견들을 상대로.
돈을 잃은 관객들은 정도현의 연승 행진이 마음에 안 드는지 불퉁스럽게 말했다.
“연승이라 해 봤자 승률 낮은 투견들 상대로 이긴 거잖아.”
“그래. 상위권 투견들이랑도 싸워 봐야 알지.”
“역대급 신인은 개뿔. 위로 올라가면 거품인 거 까발려질걸?”
그들이 뭐라 구시렁대든 정도현한테 돈을 건 사람들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
“5연승 가즈아아아!”
“그 정도로 되겠어? 난 10연승에 걸었다고!”
“와, 저 미친놈.”
돈을 딴 사람들은 전쟁터에 내던져진 것처럼 광기에 휩쓸렸다.
너도나도 정도현의 승리에 돈을 걸기 시작했다.
몇몇은 5, 10연승에도 돈을 베팅했다.
연승을 맞추는 건 어지간하면 실패하기에 배당이 말도 안 되게 높았다.
대박을 노리는 한탕주의자들이 차츰 늘어났다.
그중엔 검은 가면을 쓴 사내도 있었다.
‘순조로워.’
검은 가면의 사내는 신호영이었다.
그는 정도현을 믿고 판마다 거금을 걸었다.
덕분에 초기 자금이 하루 만에 몇 배로 불어났다.
이게 바로 돈 복사지. 신호영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야, 너 거기서 뭐 하냐?’
신호영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도현의 전음이었다.
신호영은 흠칫했다.
수천 명 사이에 앉아 있던 자신을 발견하다니. 소름이 쫙 끼친다.
짐승보다 더한 육감이었다.
‘야, 씹냐? 뭐 하냐니까?’
‘…도박하고 있었다.’
‘누구 허락 맡고?’
조직 폭력배 같은 말투에 신호영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내 돈으로 도박하는데 허락이 필요한가?’
‘나 이용해서 돈 벌고 있잖아.’
‘…….’
‘그래서 얼마 벌었냐?’
맞는 말이었다. 정도현이 아니었으면 그도 이렇게까지 벌지 못했을 테니까.
오히려 돈을 잃었을 수도 있지.
신호영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5:5로 나누자. 어떤가?’
‘…….’
‘6:4. 그 이상은 안 된다.’
‘안 돼? 안 되면 내가 되게 만들어 볼까.’
‘…뭐?’
정도현이 의미심장한 소릴 했다.
‘설마 승부 조작이라도 하겠단 거냐?’
‘걱정하지 마. 아슬아슬하게 지는 척해서 다른 말 안 나오게 할 테니까.’
‘…7:3.’
정도현은 더 뜯어 볼까 하다 관뒀다.
이 이상 자극하면 손 털고 도박을 그만둘 녀석이다.
그리고 녀석도 적당히 돈을 벌어 둬야 유사시에 도움이 될 터.
‘거봐. 하면 할 수 있잖아?’
‘…….’
신호영은 한숨을 푹 쉬었다.
하늘은 어찌하여 나를 낳고 정도현을 또 낳았는가.
* * *
정도현이 투기장에 온 지 딱 보름째.
어중간한 실력의 투견들은 정도현과 한 번씩 붙었고 전부 패했다.
전적 47승 0패. 그의 대활약에 ‘초신성’이란 별명까지 붙었다.
이제 남은 건 인지도 있는 상위권 투견들.
“뭐 저딴 괴물이…….”
“네가 먼저 나가.”
“뭔 소리야. 내가 미쳤다고 싸워?”
투견들은 서로의 등을 떠밀어 댔다.
정도현의 연승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젠 그에게 돈을 거는 이들이 과반수였다.
“쯧쯧. 한심한 것들.”
끼익.
누군가가 문을 열며 선수 대기실로 들어왔다.
그 목소리에 투견들은 몸이 얼어붙었다. 그럴 만도 했다.
혀를 찬 사내는 몇 년 전 챔피언이었던 강유라를 꺾은 자였으니까.
“도살자…….”
누군가가 챔피언의 칭호를 언급했다.
도살자란 별명이 붙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잔혹한 성미로 유명했으니까.
십수 년 전에 유행했고 지금은 완전히 사장된 생사결.
그는 거기서 투견을 백 명이나 죽였다.
종종 겁대가릴 상실했거나 명성을 얻으려던 투견들이 덤볐지만, 죄다 불구가 되어 은퇴당했다.
“겁쟁이 새끼들. 너넨 손가락 빨면서 구경이나 해라.”
“그게 무슨 소리야?”
“강유라가 부탁했거든. 그놈이랑 붙으라고. 아예 불구로 만들어도 상관없다던데?”
보름밖에 안 된 녀석이 현 챔피언이랑 붙는다고?
파격적이다 못해 미친 매치업이었다.
분명 불공정하다며 논란이 일 거다.
하지만 도살자는 욕을 먹든 말든 별 상관없었다.
그는 챔피언이라 투기장에서 쫓겨날 일이 없었으니까.
‘망가트리는 보람이 있겠어.’
도살자는 킥킥 웃었다.
강유라, 평소에 고고한 척 굴더니 먼저 머릴 숙일 줄이야.
“아예 생사결을 해야겠어.”
“…생사결?”
“그거 투랑 님이 예전에 없앤 거 아냐?”
“아니. 도살자는 예외야.”
투견 중에서 짬을 많이 먹은 자가 설명했다.
도살자는 유일하게 생사결을 치를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도살자가 챔피언이 되고서 투랑한테 직접 요구한 조건이었다.
들어주지 않으면 다른 투기장으로 가겠다면서.
투랑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수락했다.
도살자는 내치기엔 너무 아까운 인재였으니까.
게다가 다른 투기장으로 가면 학살극을 벌일 테니 차라리 여기 데리고 있는 편이 나았다.
“근데 그것도 상대가 거부하면 못 하잖아?”
투랑은 도살자에게 최소한의 목줄을 채워 뒀다. 상대방이 생사결을 거부할 수 있도록.
“흐흐. 그러니까 너희가 발전이 없는 거야. 그놈은 나랑 같은 부류야.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지.”
도살자는 며칠 전부터 정도현의 경기를 전부 챙겨 봤다. 그리고 직감했다.
녀석은 목숨을 건 전투를 갈구하는 투사. 자신과 동류라는 걸.
‘오랜만에 제대로 즐길 수 있겠어.’
도살자는 피로 얼룩진 투구와 갑옷을 입고 기다란 창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