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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1원 상점-158화 (158/240)

158화

“…뭐?”

정도현의 돌직구에 투랑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나랑 붙어 보고 싶다고?

그는 혹시 농담한 건가 싶어서 상대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나 정도현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누가 봐도 진심이다.

“…이유가 뭔데? 내가 너한테 뭐, 잘못이라도 했었냐?”

혹시 죽였던 놈들 중에 녀석의 가족이나 친척 혹은 지인이 있었던 게 아닐까?

복수심에 미쳐 저런 말을 한 거면 그나마 이해는 된다.

그도 스승님의 복수를 하기 위해 제 한 몸 불살랐으니까.

무슨 자신감으로 대놓고 말한 건진 모르겠지만.

“아니. 보복 같은 건 아닌데.”

“그럼 왜 이러는데?”

“강한 놈이랑 싸우려는데 꼭 이유가 필요한가?”

투랑은 머릴 긁적였다. 이거 참 골 때리는 놈일세.

‘정신에 문제가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했던 투랑은 흠칫했다.

평소 같았으면 미친놈 혹은 범 무서운 줄도 모르는 하룻강아지라 여겼겠지만, 최근에 사건이 연달아 터졌지 않던가.

동부와 북부의 지배자들이 당했다.

‘설마?’

눈앞의 사내가 범인인가?

투랑은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고갤 저었다.

‘97레벨이 무슨 수로 지배자들을 죽여.’

물론 레벨이 싸움에 있어 전부는 아니다.

투기장에서 레벨 높은 것만 믿고 방심했다가 패한 녀석들도 수두룩했다.

당장 투랑도 자그마치 10레벨 차이가 났던 투기장 관리자랑 싸워 이겼지 않던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는 법.

115과 97. 무려 18레벨 차이다.

게다가 투랑은 적랑족으로 육신을 개조했다.

동레벨 플레이어보다 능력치가 높으니 20레벨 차이는 난다고 봐야 한다.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는 수준이다.

“애송이, 정말 나랑 싸우고 싶냐?”

“그래.”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투랑은 실소를 머금었다.

참으로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스승님을 처음 만났었던 자신처럼.

그래서일까. 태도는 건방져도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투랑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미안한데, 개나 소나 도전한다고 다 받아 주면 내 입장이 좀 곤란해지거든?”

투랑은 이곳의 왕이다.

왕에게 도전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챔피언뿐.

이제 막 들어온 신참이랑 싸워 주면 관객들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환호 대신 비난이 쏟아질 거다.

결과가 뻔하면 아무도 베팅하지 않겠지.

승패를 맞춰서 얻는 이득보다 투기장에서 떼 가는 수수료가 더 클 테니까.

“나한테 도전하고 싶거든 그만한 자격부터 갖춰야지. 밑에 애들이랑 챔피언까지 꺾고 와. 그럼 상대해 줄게.”

“…….”

정도현은 그냥 투랑의 얼굴을 후려칠까 고민하다 관뒀다.

저 녀석 말대로 제대로 된 절차를 밟아 도전하는 게 맞았다.

여기서 난동을 부리면 투랑뿐만 아니라 수백의 투견들을 동시에 상대하게 될 테니까.

그렇게 되면 정도현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싸울 때 방해받지 않으려면 이곳 규칙에 따르는 수밖에.’

* * *

투랑은 정도현을 내보낸 뒤 최측근을 불렀다.

은발에 늑대 귀를 지닌 여인이 들어왔다.

그는 정도현에게 무슨 소릴 들었는지 그녀에게 그대로 전했다.

“…예? 투랑 님한테 도전장을 내밀었다고요?”

“그래. 웃기는 놈이지?”

“…….”

투랑은 재미난 농담이라도 들은 듯이 실실 웃었지만, 여인의 표정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투랑은 전대 관리자한테서 혹사당해 온 그녀와 수인족 투견들을 구해 낸 영웅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잔혹한 괴물이라며 헐뜯지만, 그녀를 비롯한 투기장의 전사들은 그게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투랑은 지하 투기장의 왕이 되고 어지럽던 질서를 바로잡았다.

전대 관리자는 이곳의 투견들을 소모성 부품처럼 험하게 굴렸다.

특히 노예 출신 투견은 연패하는 순간 가차 없이 처형했고, 결투 일정은 아주 빡빡했다.

그러나 투랑은 달랐다.

그는 투견들을 도구가 아닌 한 명의 전사로서 존중해 줬다.

설령 노예 출신 투견이 연거푸 지더라도 죽이는 일 따윈 없었다.

단지 이곳과 맞지 않는 인재라며 적당한 위로금을 쥐여 주고 은퇴시킬 뿐.

그렇기에 투견들의 충성심은 하늘을 찔렀다.

남부 지하 투기장이 C구역 자타 공인 최고가 된 것도 전부 투랑 덕이었다.

“그 녀석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응? 네가 나선다고?”

“투랑 님의 명예를 더럽혔습니다. 부디 단죄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아니, 뭘 그렇게까지 과민 반응해? 그러지 말고 밑에 애들부터 순차적으로 내보내.”

자기가 내뱉은 말에 책임질 실력이 있다면 문제없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자멸하겠지.

투랑의 말에 은랑족 여성은 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고갤 끄덕였다.

“그럼 결투 일정을 최대한 앞당겨 잡겠습니다.”

“그래.”

은랑족 여성은 경례를 올린 뒤 물러났다.

투랑의 집무실에서 나온 은랑족 여성은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정도현이 저지른 망언에 그녀의 마음은 마그마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그 자식, 감히 투랑 님을 모독해?’

그녀는 투랑을 경외했다. 거의 광신도 수준으로 말이다.

그가 이곳에 군림한 뒤로 그녀 같은 수인족 전사들은 사람 대접을 받게 되었다.

언제 처분당할지 몰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지 않아도 됐다.

마음 같아선 그녀가 직접 나서서 놈을 두들겨 패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말라는 명이 떨어졌다.

아쉽지만 절차대로 진행하는 수밖에.

‘내 제자들을 내보내야겠어.’

다시는 그분께 못 기어오르도록 확실히 짓밟아 주마.

은랑족 여성의 눈동자가 칙칙하고 싸늘하게 변했다.

* * *

투랑의 최측근이자 은랑족 여전사, 강유라.

그녀는 자신이 키운 제자들 중 경력이 가장 짧은 투견들을 불러모았다.

“…며칠 전에 들어온 신참이랑 싸우라고요?”

“그래. 제 발로 나가도록 잘근잘근 짓밟아 버려.”

그 말에 제자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막 들어온 신입이랑 결투하라니. 좀 모양새 빠지지 않는가.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닌 강유라의 지시라 대놓고 싫단 내색은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들의 스승이자 전대 챔피언이었으니까.

몇 년 전에 챔피언 자리를 뺏겼지만, 강유라는 여전히 투기장 내에서 손꼽히는 강자였다.

“놈이 투랑 님한테 도전장을 내밀었다.”

“예?”

“스승님,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신참이 뭘 어째요?”

강유라는 정도현이 투랑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말해 줬다. 그러자 제자들이 입을 쩍 벌렸다.

“완전 미친놈 아닙니까?”

“대체 무슨 깡으로…….”

“그래서 누가 처리할래?”

강유라의 말에 누군가가 손들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새까만 곰의 귀가 달린 흑웅족 남자가 으스대며 자신감을 뽐냈다.

강유라가 그를 보며 고갤 끄덕였다.

경력은 3개월로 그녀의 제자 중에서 가장 짧았지만, 1년 차 투견들과도 싸워서 이길 만큼 재능이 넘쳤다.

“흑곰, 적당히 패. 혹시라도 죽거나 불구 되면 소문 나서 투기장 영업에 문제 생기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흑곰이라 불린 사내는 정도현을 어떻게 괴롭혀 줄까 고민하며 경기장으로 향했다.

강유라도 관중석에 앉았다.

그 시건방진 녀석이 두들겨 맞는 걸 직관하고 싶었으니까.

‘어중이떠중이 몇 놈 쓰러트렸다고 기고만장하기는.’

정도현은 실력 평가 때 선전했지만 너무 나댔다.

잘 키우면 간판급 스타가 됐을지 모를 인재지만, 투랑 님께 대놓고 이빨을 드러냈다.

주인의 손등을 물려 하는 사냥개는 필요 없다.

강유라는 도도하게 다릴 꼬며 경기장을 내려다봤다.

“뭐야. 흑곰 녀석, 며칠 전에 온 신입이랑 붙는다는데?”

“와, 진짜야?”

“저 새낀 양심도 없나?”

승부 예측은 당연히 흑곰으로 몰렸다.

이래선 배당금을 따 봤자 수수료만 겨우 면할 정도. 사실상 쉬어 가는 코너였다.

역배를 노리고 정도현에게 건 극소수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들도 그저 재미 삼아 베팅한 것에 불과했다.

우우우우-!

관객들은 새싹을 짓밟으러 나온 흑곰한테 야유를 보냈다.

흑곰은 악역이 됐지만 개의치 않는지 잇몸을 활짝 만개했다.

“어이, 신입. 얘기 들었다. 투랑 님한테 도전하고 싶다며?”

정도현은 흑곰을 보곤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98레벨. 죽일 가치도 없었다.

어차피 투기장 규칙 때문에 죽이면 안 되지만.

“자기 주제를 알아야지.”

흑곰이 그렇게 중얼대며 전신으로 마력을 퍼트렸다.

그러자 신체 곳곳에 시커먼 짐승 털이 자라고 몸집은 두 배 가까이 커졌다.

쿠어어어!

흑곰이 우렁차게 포효하곤 땅을 쿵쿵 흔들며 달려왔다.

정도현은 무심하게 검을 뽑아 휘둘렀다.

카앙-!

주먹과 칼날이 손뼉 치듯 부딪혔다. 충격파가 쩌렁 울린다.

가볍게 휘두른 것처럼 보였지만 검에 담긴 힘은 무시무시했다.

“어, 어떻게…….”

부분 야수화를 사용한 흑곰은 말투가 어눌해졌다. 그래선지 더더욱 바보처럼 느껴졌다.

흑곰의 공격이 쉽게 막히자 관중석에 파문이 일었다.

“뭐야?”

“저걸 막아?”

“에이, 신참이라 좀 봐줬겠지.”

관객들은 반신반의했다.

설마 정도현이 이기리라곤 상상조차 안 했으니까.

하지만 강유라는 무언가 눈치채곤 눈을 부릅떴다.

‘요행으로 막은 게 아니야.’

흑곰이 봐준 건 더더욱 아니었다.

물론 죽이면 안 되니까 적당히 힘을 조절했겠지만. 그래도 저렇게 가뿐히 막아 낼 정도는 아니었다.

“이, 이 새끼가!”

자존심이 구겨진 흑곰은 사력을 담아 연타를 날렸다.

정도현은 제자리에서 칼을 휘둘러 전부 막아 냈다.

터엉-!

정도현은 망부석처럼 미동도 안 했고, 공격을 퍼부었던 흑곰만 차츰 뒤로 밀려났다.

“허억, 헉…….”

흑곰이 지쳐서 잠깐 숨을 고를 때.

정도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쾅!

그와 동시에 흑곰의 가슴팍이 찌그러졌다. 마치 정도현한테서 도망치듯 몸뚱이가 저 멀리 날아갔다.

“커흑……?!”

흑곰의 가슴팍에 세로로 길쭉한 흉터가 생겼다.

당사자는 언제 베였는지도 모를 만큼 빨랐다. 게다가 묵직했다.

쿠당탕!

흑곰이 탁구공처럼 바닥에 몇 번 튕기며 경기장 끝으로 날아갔다.

“쿨럭, 커흑……!”

투웅-!

반원 모양으로 경기장을 둘러싼 결계에 부딪히고서야 겨우 멈췄다.

흑곰이 피를 질질 토하며 한 손으로 땅을 짚었다.

쿵!

팔에 힘이 풀리며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정도현은 검을 늘어뜨린 채 다가갔다.

걸음걸이가 유유자적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젠장… 방심했어…….”

흑곰이 뻘건 침을 뱉으며 뭐라 중얼댔다.

그러는 사이 정도현은 흑곰 코앞에 도달했다.

“내, 내가… 질 리가 없어…….”

꾸득, 꽈드득-!

흑곰이 부분 야수화의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그의 얼굴이, 팔다리와 찢어진 가슴팍이 곰의 그것처럼 변했다.

정도현은 그의 변신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줬다.

한층 거대해진 흑곰의 그림자가 정도현을 완전히 덮었다.

“저 미친놈이!”

강유라가 벌떡 일어났다.

흑곰, 저 멍청이가 대형 사고를 쳐 버렸다.

아무리 궁지에 몰렸어도 전신 야수화를 발동하다니.

게다가 흥분해서 반쯤 이성을 잃었다.

세심한 힘 조절은 불가능할 터. 저러다 정도현이 죽을지도 모른다.

‘말려야 해!’

관중석에서 경기장으로 곧장 뛰어내리고 싶었지만 결계 때문에 불가능했다.

정도현이 흑곰한테 죽어 버리면 투기장 입장에선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막 들어온 투견을 공개 처형한 셈이니까.

강유라는 전속력으로 뛰어 관중석 계단을 내려갔다.

혹시 모를 사태를 막고자 심판과 안전 요원들이 대기 중이긴 했지만, 그들의 힘으론 완전 야수화한 흑곰을 못 막는다. 사상자만 늘어날 뿐이었다.

피해 없이 막을 수 있는 건 그녀뿐이었다.

딱 30초만 버텨라. 그녀가 그렇게 기도했다. 계단을 거의 다 내려왔을 때.

웅성대던 관중석에 정적이 찾아왔다.

“아…….”

강유라는 직감했다. 정도현이 당해 버렸다는 걸.

참혹한 시체가 돼서 다들 말문이 막힌 모양이다.

그녀는 울화가 치밀었다.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고 폭주해 버린 제자도, 찰나를 버티지 못한 정도현도, 현장에 있었는데도 사태를 막지 못한 그녀 자신한테도.

강유라가 주먹을 꽉 말아 쥐었을 때.

““와아아아아!””

그녀의 머리 위로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눈을 끔뻑였다. 사람이 죽었는데 웬 환호성?

뭔가 이상했다. 그녀는 서둘러 경기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심판과 안전 요원으로 배치된 수인족 전사들이 보인다.

그들은 멍하니 서서 어딘가를 쳐다봤다.

“……!”

강유라의 발걸음이 멎었다.

경기장 바닥에 쓰러진 건 정도현이 아닌 흑곰이었다.

정도현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멀쩡히 서 있었다.

“…어떻게?”

강유라의 중얼거림을 들은 정도현.

그가 고갤 돌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몇 년 전에 챔피언이었다지?”

그의 질문에 강유라는 왠지 모르게 오한이 들었다.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예전 챔피언을 꺾으면 현 챔피언한테 도전할 수 있겠지?”

“…뭐?”

정도현이 그녀에게 칼을 겨누며 말했다.

“똘마니들로 시간 질질 끌지 말고 빨리 끝내자.”

정도현이 전대 챔피언 강유라에게 승부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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