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뜻밖의 제안에 정도현은 고갤 갸웃했다. 동료 마녀를 죽인 놈한테 동맹을 권하다니. 수상쩍었다.
“왜 나랑 동맹하려는 거지? 난 인형과 부패의 마녀를 죽였는데.”
부패의 마녀는 아직 살아 있지만, 부활 페널티로 레벨이 줄어들었다.
동료 마녀들한테 그걸 들키면 성가셔질 테니, 당분간 죽은 척 잠적하라고 명했다.
고로 밤의 마녀는 정도현이 마녀를 둘이나 죽였다고 생각할 터.
그럼 동맹이 아니라 복수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당신과 싸워서 좋을 게 없으니까요.]
“너, 레벨 몇인데?”
정도현은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다.
하지만 밤의 마녀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멈칫했다.
[…다시 말하지만 저흰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왜? 납득이 안 가서 그래. 너희가 나보다 훨씬 레벨 높지 않아?”
[마녀들은 원래 싸움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마법 연구만 할 수 있으면 족하죠.]
“그럼 인형이랑 부패의 마녀는 왜 그랬는데?”
시내 한복판에서 무차별 테러를 벌였지 않은가.
그렇게 따지자 밤의 마녀는 안타깝단 어조로 변명했다.
[그 애들은 재능은 뛰어났지만 좀 어려서 충동적이었습니다. 저와 남은 마녀들은 그럴 일 없을 거예요.]
확실히 밤의 마녀는 목소리에서 진한 연륜이 느껴졌다.
상대적으로 노화가 느린 플레이어가 저 정도면 그의 할아버지 이상으로 오래 살았을 터.
나이가 들면 혈기도 가라앉겠지. 정도현은 의심을 조금 내려놨다.
“근데 난 흑마법사들이랑 손잡기 싫은데. 너희도 떳떳하게 살진 않았을 거 아냐.”
[목적을 지닌 동맹보단 상호 불가침이라 생각해 주세요.]
“서로 건드리지만 말자?”
[네.]
정도현은 까마귀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동물이라 그런가. 눈빛에서 감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몰래 숨어서 감시했으면서.”
[그럼 저 말고 시스템을 믿으시죠. 피의 맹약을 맺으면 되지 않을까요?]
역시 그런 식으로 나오는 건가.
정도현은 잠시 고민하더니 선선히 고갤 끄덕였다.
“좋아. 내 주변에 피해 끼치지 마. 그럼 나도 안 건들 테니.”
[감사합니다.]
밤의 마녀는 혹여나 그가 생각을 바꿀세라, 서둘러 아공간을 열고 피의 맹약서를 꺼냈다.
부리로 종이를 문 채 정도현 앞으로 날개를 퍼덕대며 날아왔다.
서로 공격하지 않는단 조약에 서로 서명했다. 정도현은 슬쩍 질문했다.
“그런데 레벨 몇이야? 그래도 동맹인데, 그 정돈 알려 줘야지.”
[…109레벨입니다.]
그걸 굳이 또 물어보다니.
밤의 마녀는 떨떠름했지만, 피의 맹약도 맺었으니 괜찮겠다 싶어서 대답해 줬다.
109레벨. 손정규보다 1레벨 더 높았다.
[…엄한 생각 품으신 건 아니죠?]
“미쳤다고 그러겠냐. 피의 맹약을 어기면 바로 죽잖아.”
[그건 그렇죠.]
정도현이 너스레를 떨었다.
분명 맞는 말인데 밤의 마녀는 왠지 모르게 오한이 든다.
그녀는 원인 모를 불안을 떨쳐 냈다.
손정규를 압도하던 정도현의 모습에 너무 놀란 탓이겠지.
나이를 먹어서 민감해진 것이리라.
밤의 마녀는 그렇게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나이가 많아서 그런가, 확실히 촉은 좋네. 이게 연륜인가?’
정도현은 밤의 마녀의 추궁에 속으로 뜨끔했다. 진짜로 딴마음을 품었으니까.
그는 기본적으로 남을 믿지 않는다.
특히 흑마법사 같은 위험하고 이기적인 자들은 더더욱 믿지 않는다.
마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형이나 부패의 마녀처럼 놔두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정도현한테 피해를 안 주겠다고 했지, 범죄를 안 저지른다곤 안 했다.
필시 죄 없는 사람들을 이용해 흑마법 연구를 할 터.
이러쿵저러쿵 말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저들이 줄 경험치였다.
‘싹 청소하면 짭짤하게 들어오겠지.’
밤의 마녀는 피의 맹약을 맺고 안도하고 있겠지만, 오래 살았으니 잘 알 거다.
세상일은 전부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맹약 파기권을 쓰면 돼.’
그와 다시 만날 때까지 밤의 마녀는 피의 맹약이 사라진 줄도 모를 거다.
[그나저나 석화의 마도사는 왜 죽이셨죠?]
“그건 왜?”
[그가 죽은 걸 알면 다른 지역의 지배자들이 움직일 겁니다.]
그녀는 지배자들을 순서대로 언급했다.
[서부의 ‘사막의 무녀’, 남부의 ‘투랑’, 북부의 ‘철혈의 여제’, 중부의 ‘역귀’. 하나같이 만만찮은 강자들이죠. 석화의 마도사는 이들 중 최약체입니다.]
“그래? 그럼 너흰 어디 편인데?”
[저흰 중립입니다. 누구의 편도 아니죠.]
밤의 마녀의 경고에도 정도현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들과의 만남이 기대되는지 칼자루를 만져 댄다.
[조심하세요. 석화의 마도사를 죽인 게 당신인 걸 알아채면 분명 얕잡아 보고 노릴 겁니다.]
밤의 마녀는 그의 실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지만, 다른 지배자들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정도현의 힘을 짐작할 근거는 오로지 레벨뿐이었다.
94레벨. 낮진 않지만 100레벨이 훌쩍 넘는 음지의 지배자들에겐 만만하기 짝에 없다.
“그래, 충고해 줘서 고맙다. 이제 할 말 다 했어?”
[…아직 대답을 못 들었습니다. 석화의 마도사는 왜 건드리셨나요?]
“나한테 필요한 걸 갖고 있었거든.”
정도현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자세히 설명해 줄 생각이 없단 걸 알았는지, 밤의 마녀는 고갤 끄덕이곤 물러났다.
스스스-!
까마귀가 시커먼 연기로 변해 증발했다.
그를 감시하는 듯한 시선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서 완전히 떠난 모양.
“그럼 마저 해 볼까.”
정도현은 부활 아이템을 꺼내 손정규를 되살렸다.
밤의 마녀가 경고한 대로, 손정규가 갑자기 사라지면 다른 지역의 지배자들이 날뛸 터.
그러니 수하로 삼은 뒤, 당분간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손정규는 그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미친놈이었다.
충성하라는 말에 놈이 발작했다.
“…뭣이? 내게서 예술을 빼앗아 가겠단 소린가!”
“예술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냥 살인이잖아.”
손정규는 충성을 바치는 조건으로 정도현에게 두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 자신이 예술 활동을 계속 이어 나갈 수 있게 지원해 줄 것.
둘째, 석화의 마도서를 되돌려줄 것.
물론 정도현은 둘 다 들어줄 수 없었다. 그러자 손정규가 부들거렸다.
“감히, 감히… 내 예술을 모독하다니! 컥!?”
손정규는 독기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다, 시커먼 피를 토하며 털썩 쓰러졌다.
시스템의 경고를 무시하고 정도현을 공격하려 든 것이다.
‘퍼펫 못지않게 미친놈일 줄이야.’
손정규가 죽어 버리자 정도현은 성가시단 얼굴로 머릴 긁적였다.
“하나씩 찾아내서 도장 깨기라도 해야 하나.”
* * *
석화의 마도사, 손정규가 죽었지만 다행히 소문이 바로 퍼지진 않았다.
그는 이미 은퇴하고 칩거 생활을 오래 해 왔으니까.
진상을 아는 건 정도현 일행뿐이었다.
하지만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
각 지역의 지배자들은 두어 달에 한 번씩 모여 회담을 해 왔다.
그런데 석화의 마도사가 돌연 불참해 버렸다.
대신 그의 최측근인 박건수가 회담장에 나타났다.
박건수는 손정규의 몸 상태가 안 좋아서 불참했다고 둘러댔다.
하지만 다른 지배자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박건수가 도망치듯 돌아가자 지배자들이 술렁였다.
“몸 상태가 안 좋아졌다고?”
“뻔하지, 뭐. 누구랑 싸웠겠지.”
“아니면 다른 놈한테 당한 거 아냐?”
“동부에 그럴 만한 놈이 있을까?”
동부는 C구역에서도 가장 약한 지역으로 통했다.
석화의 마도사와 왕좌를 걸고 싸울 만한 이가 있을까.
“마녀들이 한 짓 아냐? 얼마 전에 어린 마녀들이 테러 벌였다면서.”
“아니, 여명의 빛은 아닐 거야. 만약 죽었다면 다른 세력 짓이겠지.”
“혹시 언노운이 한 거 아냐?”
“해방단의 대장이라…….”
“흐응, 확실히 그 남자라면 가능할지도.”
언노운. 해방단의 수장, 신호영.
수십 년째 얼굴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서 붙은 별명이었다.
애꿎은 사람이 범인 후보로 거론됐다.
‘석화의 마도사가 진짜로 죽었다면…….’
‘동부가 텅 비었단 소린데.’
동부는 바다와 가장 인접한 땅.
D구역과도 항로로 무역할 수 있었다.
절반 이상이 사막 지대인 서부나, 틈만 나면 눈이 내리는 북부에 비해 참으로 살기 좋은 곳이었다.
그래서일까.
북부의 지배자, 철혈의 여제는 석화의 마도사가 정말로 죽었는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회담이 끝나자마자 철혈의 여제는 친위대를 불러모았다.
그날 밤, 그녀의 친위대가 몰래 동부 암흑가로 침투해 박건수를 납치해 왔다.
“모른다고?”
“저, 정말 모릅니다! 갑자기 연락이 끊겨선…….”
맞아서 얼굴이 퉁퉁 부은 박건수.
그는 철혈의 여제 앞에 개처럼 질질 끌려와 무릎 꿇었다.
고갤 들자 커다란 옥좌에 앉은 여인이 보였다.
“아…….”
그는 순간 자신이 어떤 처지인지도 잊고 감탄사를 흘렸다.
새하얀 피부에 핏빛 눈동자, 은빛 머릿결에 이국적인 이목구비까지.
여제가 그를 내려다보며 고혹적으로 웃었다.
“감히 여제님께 거짓을 고하다니.”
“바른 대로 말해라!”
친위대가 박건수를 노려보며 윽박질렀다. 그의 머릴 깨부술 기세였다.
박건수는 바들바들 떨며 눈을 바짝 깔았다.
“조용.”
철혈의 여제가 손을 들며 흥분한 친위대를 진정시켰다.
그녀의 한마디에 친위대는 고개 숙이고 몇 걸음 물러났다.
여제가 부드러운 어조로 다시 질문했다.
“정말 몰라? 넌 최측근이었잖아.”
“죄, 죄송합니다……. 정말로 어디 갔는지 모릅니다!”
박건수는 시치미를 뚝 뗐다.
손정규가 누군가한테 살해당한 건 알지만, 그걸 말했다간 자신도 죽는다.
서아린과 박성원한테 협박당해, 피의 맹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흐음.”
철혈의 여제는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지, 새침한 얼굴로 자신의 머리칼을 빙빙 꼬았다.
박건수는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쳐다봤다.
꿀꺽.
심장은 떨리고 가슴이 미어졌다.
그녀에게 거짓말한 게 마치 큰 죄를 범한 기분이었다.
맹약만 없었더라면 그도 순순히 털어놨을 것이다.
“누가 말 못 하게 금제를 걸어 놨구나?”
“…네?”
철혈의 여제는 그가 자신의 유혹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걸 보곤 어떤 상황인지 짐작했다.
‘말하면 죽는 거겠지.’
그녀는 귀찮단 표정으로 옥좌에서 일어났다. 사뿐사뿐 계단을 내려온다.
그 자태에 박건수는 일순 숨이 멎었다.
아름다웠다. 마치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처럼.
여제는 다가와 허릴 굽혀 시선을 맞췄다. 코끝으로 달콤한 향기가 확 느껴졌다.
그녀가 싱긋 웃자 박건수도 따라서 헤벌쭉 웃었다.
“…어?”
콰득-!
따끔한 통증에 몽롱하던 정신이 돌아왔다. 마치 얕은 잠에서 깨어나듯.
그녀가 자신의 목을 깨물었다.
“으, 아아…….”
커다란 주사기가 박힌 것처럼 혈액이 쭉쭉 빨려 나간다.
그는 머리부터 시작해 발끝까지 미라처럼 비쩍 말랐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발버둥도 칠 수 없었다.
“…역시 맛없어.”
「흡혈」을 끝마친 철혈의 여제가 피 묻은 입술을 싹 핥았다.
혈액을 모조리 빼앗긴 박건수는 털썩 쓰러졌다. 볼 것도 없이 죽었다.
그녀는 그가 죽든 말든 별 관심도 없는지 고갤 돌리며 눈을 감았다.
“음, 진짜 죽긴 죽었나 보네?”
철혈의 여제는 방금 먹어 치운 피에 새겨진 기억을 찬찬히 읽어 나갔다.
“서아린, 박성원……. 이 둘을 석화의 마도사한테 바치려다 역으로 당했구나?”
그녀가 눈을 떴다. 새빨간 눈동자가 별빛처럼 반짝인다.
둘은 아리따운 외모도 외모였지만, 박건수보다 레벨이 훨씬 낮은데도 쉽게 승리했다.
박건수는 방심하다 당한 거라며 자기 합리화했지만, 그 둘은 절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다.
‘박건수는 내 친위대급이야.’
둘이 협공했다곤 하나 친위대급의 강자를 아주 수월하게 쓰러트렸다.
일대일로 싸웠어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터.
여제는 강렬한 소유욕을 느꼈다. 그 둘을 자신의 권속으로 삼고 싶어졌다.
“…하지만 좀 이상해.”
그 둘이 강한 건 맞지만, 석화의 마도사를 잡을 정돈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이 둘 뒤에 누군가 더 있어.’
석화의 마도사를 이길 정도의 강자라니, 대체 누굴까. 얼굴을 보고 싶어졌다.
“친위대 대장을 맡겨도 되겠어.”
그녀의 중얼거림에 부복해 있던 친위대의 표정이 굳었다.
몇몇은 여제의 관심을 독차지한 누군가에게 질투를 품었다.
여제는 허공에 피로 서아린과 박성원의 초상화를 그리며 말했다.
“서아린과 박성원, 이 둘을 조사해 봐. 가능하면 산 채로 잡아 오고, 권속으로 삼을 거니까.”
이 둘은 알고 있을 거다. 석화의 마도사를 살해한 범인이 누군지.
권속으로 만든 뒤 차근차근 알아내 주마.
* * *
서아린은 콧노래를 흥얼댔다.
그녀는 작전을 도와준 대가로 정도현과 함께 영화를 보기로 했다.
사실 서아린은 영화 보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가 이런 제안을 한 이유는 순전히 권하율 때문이었다.
‘흥. 영화 한 번 같이 본 게 뭐 대단하다고.’
권하율이 자랑하듯 말했었다.
자기는 정도현이랑 영화관도 갔었다고.
서아린은 그와 그런 곳에 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왠지 진 기분이었다.
그래서 욱한 마음에 조건으로 영화나 같이 보자고 말했다.
“뭐 보고 싶어?”
“저거 보죠.”
팝콘과 음료수를 사 들고 온 정도현이 묻자, 서아린은 손가락으로 어떤 영화 포스터를 가리켰다.
남자 흡혈귀와 일반 여자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로맨스 영화였다.
서아린의 취향은 굳이 꼽으라면 악당을 시원하게 처부수는 액션 영화 쪽이지만, 남자랑 처음으로 같이 보는 거니까.
‘가끔 이런 것도 나쁘지 않겠지.’
서아린은 영화 예매표를 뽑으며 웃었다.
그런 그녀를 멀리서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묘한 시선을 느낀 정도현은 주변을 쓱 둘러봤다.
그는 감시자들을 단번에 찾고선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갤 돌렸다.
‘세 명인데. 저놈들, 서아린은 왜 감시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