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다음 날, 사람들이 숨겨진 통로를 통해 암흑가의 지하로 내려갔다.
땅속에는 또 하나의 작은 도시가 세워져 있었다.
이곳이 바로 동부의 암시장이다.
노예상들이 노예들을 끌고 경매가 열리는 건물로 움직였다.
“다음.”
웬일인지 암시장의 주인, 박건수가 들어온 노예들을 직접 살폈다.
쓸 만한 노예가 안 보이자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미간을 꾹꾹 눌러댔다.
“하, 씨…… 어떻게 한 명이 없냐, 한 명이.”
노예들의 얼굴은 죄다 평범했다.
눈에 확 띄는 녀석이 없었다.
박건수의 심기가 불편해지자, 노예상들은 도망치듯 돈만 챙겨 암시장을 빠져나갔다.
박건수는 무거운 한숨을 뱉었다.
그때, 부하가 부리나케 달려와 보고를 올렸다.
“보스. VIP 회원이 보스와 면담하고 싶어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VIP? 누군데?”
“가면을 쓰고 있어서 확실치는 않으나, 아무래도 마약왕 같습니다.”
“차상훈이?”
차상훈은 동부에서 가장 잘나가는 마약사범이다.
마약은 암시장의 꽃이나 다름없는 상품.
그러니 박건수와도 제법 돈독한 동맹 관계였다.
‘설마 그것 때문인가?’
몇 달 전에 구슬 형태의 마약을 샘플로 들고 왔었는데, 그게 VIP들 사이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아쉽게도 생산에 무슨 차질이 생겼다며 한동안 소식이 없었는데.
‘생산 문제를 해결했나 보군.’
따로 연락도 없이 이렇게 불쑥 찾아온 걸 보면 그럴 확률이 높았다.
구슬 마약을 그에게만 독점 공급해 준다면 돈방석에 앉는 건 시간 문제.
어쩌면 다른 지역의 마약 상권마저 휘어잡을지 모른다.
“어서 들여보내.”
“예.”
막대한 돈이 굴러들어온단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고갤 떨구며 힘없이 중얼댔다.
“……돈을 벌면 뭐 하냐. 내가 곧 죽게 생겼는데.”
손정규가 그에게 경고했다.
두 번째 기회는 없다고.
이번에 바칠 노예들도 수준 미달이면 절대 가만 있지 않을 거다.
그를 제거한 뒤, 다른 이를 이 자리에 앉히겠지. 분하지만 그게 손정규의 방식이었다.
끼익!
심란한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문이 열렸다.
VIP 전용의 화려한 가면을 쓴 사내가 들어왔다.
사내는 가면을 벗어 보이며 인사했다.
예상대로 마약왕 차상훈이었다.
“간만이군, 박 사장.”
“어서 오게. 연락도 없이 웬일인가?”
차상훈은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빙긋 웃었다.
“자네한테 선물을 주러 왔지.”
“……선물? 아, 혹시 저번에 선보인 그 구슬 마약인가? 생산 문제를 해결했나 보군.”
“아쉽지만 그건 아니야. 그쪽은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아.”
아니라는 말에 박건수의 미간이 좁아졌다.
마약이 선물이 아니면 왜 온 거지?
박건수는 시큰둥한 얼굴로 질문했다.
“미안한데 내가 일이 좀 있어서 말이야. 용건만 간단히 말해 주겠나.”
“알았네.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혹시 노예들을 살 생각 없나?”
“……노예?”
너무 뜬금없는 제안이라 박건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상훈은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박건수는 거기에 찍힌 사진들을 살펴보곤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찾았다!’
대박이었다. 노예들의 사진을 보자마자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이들을 팔겠다고?”
“그렇네. 얼마 전에 D구역에서 올라온 플레이어들이라 뒤탈도 없을 걸세.”
“지금 어딨지? 한번 보고 싶은데.”
이들의 출처는 궁금하지 않았다.
박건수는 당장 실물을 보여 달라며 혈안이 됐다.
차상훈은 진정하란 제스처를 취했다.
박건수가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추태를 보였다. 너무 흥분해서 잠시 이성을 잃었다.
“마음에 든 것 같아 다행이군. 내 이럴 줄 알고 암시장에 데리고 왔네.”
박건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제야 숨통이 좀 트인다.
심해 속에 가라앉은 듯 답답했던 가슴이 한결 편해졌다.
‘이 녀석들을 바치면 그 망할 영감탱이도 한동안 잠잠해지겠지.’
손정규는 자칭 예술가였다.
멀쩡한 사람을 재료로 쓰는 미치광이라 그렇지, 자신의 예술에 심취할 땐 아주 진지했다.
그는 석화 주문으로 사람을 조각상으로 바꾼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는 석상이 된 자를 조각칼로 섬세하게 깎고, 윤이 나도록 다듬는다.
마치 원석을 세공해 더욱 아름다운 보석으로 탈바꿈하는 것처럼.
손정규는 본디 아름다운 걸 더욱 아름답게 바꾸는 게 예술의 극치라 여겼다.
그게 울림을 준다나 뭐라나.
박건수는 그의 예술관에 전혀 공감하지 못했지만 어쩌겠는가. 여기선 강한 놈이 정의였다.
‘이 정도 외모면 최소 몇 달은 붙잡고 있겠지?’
손정규는 한번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하면 다른 것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동안 박건수도 미인을 구해야 하는 압박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의 발걸음이 여느 때보다 가벼웠다.
둘은 VIP들만 머물 수 있는 건물 앞에 도착했다. 방에 들어가자 웬 가면 쓴 남자와 사진의 남녀가 보였다.
노예들을 확인한 박건수의 눈동자가 희열로 가득 찼다.
“어떤가?”
“지금까지 봐온 것들 중에 가장 낫군.”
깐깐한 손정규도 저 둘을 보면 트집을 잡지 못할 거다.
지금까지 그가 갖다 바친 노예들만 세 자릿수가 넘는데, 저들은 그중에서도 최상급이었다.
박건수는 고갤 돌려 가면 쓴 사내를 쳐다봤다.
93레벨. 이름과 얼굴은 물음표로 보인다. 박건수가 슬쩍 물어봤다.
“그런데 저자는 또 누구지?”
“아, 저들을 붙잡은 내 고객일세. 비싸게 팔아넘길 곳을 찾길래 데려왔지. 암시장은 이번이 처음이라더군.”
저 노예들을 제공했단 말에 호감이 온천수처럼 샘솟았다.
박건수가 그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반갑네. 이곳 암시장을 관리하는 박건수일세.”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남자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박건수는 이곳에서 왕이나 다름없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그의 미간에 주름이 살짝 잡혔지만 금세 돌아왔다.
누군진 몰라도 이 남자 덕에 난처한 상황을 모면했지 않은가?
그걸 생각하면 이 정도 무례쯤은 눈감아 줄 수 있었다.
“신원을 밝힐 수 없단 건가? 신중하고 강단 있는 게 마음에 드는군.”
“……죄송합니다.”
“아니야. 자네 덕에 나도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했거든.”
박건수가 황금빛 패를 꺼내 건넸다.
“골드 회원패야. VIP 바로 아래 등급이지. 이걸 보여 주면 암시장 수수료도 조금만 떼일 걸세. 앞으로도 자주 이용해주게나. 저런 노예가 또 있으면 무조건 나한테 데려오고. 후하게 쳐주지.”
“감사합니다.”
황금패를 본 차상훈이 눈썹을 꿈틀했다.
‘무슨 일인진 몰라도 어지간히 급했나 보군.’
골드 회원패를 선뜻 건네주다니. 실로 파격적인 보상이었다.
암흑가 플레이어들이 박건수한테 잘 보이려 기를 쓰는 것도 저 황금패를 받기 위해서였다.
“저 둘, 얼마면 되겠나? 원하는 대로 불러보게.”
가면 쓴 남자는 대답 대신 차상훈을 흘끗 쳐다봤다.
차상훈이 헛기침을 몇 번 하곤, 그 대신 귓속말로 금액을 전했다.
그러자 박건수가 피식 웃었다.
자기 목숨값이 겨우 그것밖에 안 된다고 생각한 건가.
물론 저들은 자세한 사정을 모르고 있지만.
“그 두 배를 주지. 부하들한테 따로 얘기해 놓을 테니 환전소로 가 봐. 바로 입금해 줄 걸세.”
박건수가 그렇게 말하곤 노예들을 데려갔다.
그가 떠나자, 차상훈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가면 쓴 사내가 대신 거기에 앉았다.
남자가 가면을 벗으며 말했다.
“따라갈 준비해.”
“예.”
꽈드득-!
정도현은 박건수가 준 황금패를 구겨 버렸다.
누가 보면 아깝게 뭐 하는 짓이냐고 따지겠지만, 어차피 오늘 암시장의 주인은 바뀐다.
그럼 녀석이 발급한 황금패도 단순한 장식품이 될 터.
* * *
박건수는 노예들을 차에 태우고 부랴부랴 출발했다.
손정규의 인내심은 그리 길지 않았으니까.
급한 대로 사진을 몇 장 찍어 보냈다. 그러자 예상대로 뜨거운 반응이 돌아왔다.
“하여간. 다 늙은 영감탱이가 쓸데없이 눈만 높아선……”
손정규는 이다음이 걱정됐다.
나중에는 저 노예들보다 더 아름다운 인간을 바치라고 갈구진 않을까.
‘하, 이러다 연예인들 납치하게 생겼네.’
그가 앞날을 떠올리곤 막막함에 한숨을 내쉴 때, 등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고갤 돌려보자 여자 노예가 그를 째려보고 있었다.
이름은 서아린, 83레벨.
죽일 듯이 노려보는데도 얼굴이 저래서 그런가.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딱 봐도 D구역에서 밀항했군.’
스륵.
박건수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재갈을 풀어줬다.
사지가 묶이고, 마력 억제구도 주렁주렁 채워 둬서 어차피 아무것도 못 한다.
“심심한데 얘기나 좀 할까. 서아린, 어쩌다 잡혔지?”
사실 그도 정상적인 대답이 돌아올 거라곤 기대 안 했다.
노예들은 이런 상황에서 제발 살려 달라고 빌거나 욕을 해대니까.
저 눈빛을 보면 그녀는 기가 제법 세 보였다.
‘후자처럼 행동하겠지.’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녀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목소리도 얼굴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약속했어요. 도와주기로.”
“도와준다고? 누구를?”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거예요.”
“……?”
알쏭달쏭한 대답에 박건수는 몇 초 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헛소리 같았다. 어쩌면 비참한 상황에 정신줄을 놓은 걸지도.
그는 이번엔 남자 노예를 쳐다봤다.
“박성원, 흠. 훤칠하게 잘생겼군. 넌 어쩌다 잡혔지?”
“…어디로 데려가는 겁니까. 저흴 어쩌려는 거죠?”
“흠. 질문은 내가 먼저 했는데? 머리는 그리 똑똑하지 않나 보군.”
그가 그렇게 이죽댔지만 박성원의 눈동자는 차분했다.
누가 봐도 절망이랑은 거리가 멀어 보인다.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뭐, 말해 줘도 괜찮겠지. 자네들은 석화의 마도사를 만날 거다.”
박건수는 그들의 얼굴이 공포로 뒤덮이는 걸 보고 싶었다. 그래서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해 줬다.
“너흰 조각상이 될 거다. 그 영감탱이의 말을 빌리면, 그 아름다움을 영원토록 간직하겠지.”
설명이 끝나자 서아린이 혀를 쯧 찼다.
같잖단 표정이었다.
그녀의 태도에 박건수는 휘파람을 휙 불었다. 곧 죽는데 깡도 좋네.
반면에 박성원의 표정은 분노로 물들었다.
“…몇 명이나 희생된 겁니까.”
“음, 글쎄? 일일이 세어 보진 않아서. 그래도 삼백은 확실히 넘었을 거다.”
박성원이 매섭게 노려본다.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기세였다.
박건수는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운반 차량을 몰고 있다고 얕잡아 보는 건가.
“운 좋은 줄 알아라. 그 영감탱이만 아니었으면 건방진 눈깔을 뽑아 버렸을 거다.”
그의 협박에도 박성원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박건수는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억누르며 운전에만 집중했다.
저들 얼굴에 생채기라도 났다간 손정규가 들들 볶으리라.
박건수는 노예들 입에 다시 재갈을 물린 뒤 한참을 달렸다.
저 멀리 대저택이 보인다. 거의 다 왔다. 바로 그때.
철커덕, 툭.
뒷좌석에서 불온한 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물건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
그가 급히 뒤돌자, 속박에서 자유로워진 서아린과 박성원이 보였다.
그들을 묶어 뒀던 수갑과 족쇄는 이미 풀려서 무력해진 상황.
“어떻게……!”
뻐억-!
그가 뭐라 말하는데 박성원의 주먹이 얼굴로 날아들었다. 면상이 빈 페트병처럼 찌그러졌다.
쨍그랑!
그가 앞유리창을 깨부수고 차량 밖으로 튕겨 나갔다.
“커, 커흑……”
골이 흔들렸다. 주먹이 묵직했다.
저게 어딜 봐서 82레벨인가.
그가 부들대며 일어섰지만, 박성원과 서아린은 이미 차에서 뛰쳐나와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둘에게 두들겨 맞고 그대로 자빠졌다.
“도현 씨, 제압했어요.”
[수고했어. 나도 거의 다 왔어.]
“도와줬으니까 약속 꼭 지켜요.”
[알았어.]
* * *
손정규는 박건수가 보내 준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단언컨대 지금껏 써 왔던 재료들을 통틀어 이들이 최고였다.
“연인을 주제 삼아서 만들면 되겠군.”
발상이 마구 떠오른다.
손이 근질거렸다. 어서 이들을 재탄생시키고 싶었다.
마음이 빵 반죽처럼 부풀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그래.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마중이라도 나가야겠군.
그는 작업실에서 나와 저택 정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때.
콰앙-!
난폭한 소리와 함께 저택 정문이 날아갔다.
“……?”
웬 남자가 발로 걷어차 문을 부쉈다.
손정규는 넋 나간 얼굴로 그 당돌한 침입자를 쳐다봤다.
시키지도 않았던 재료가 배달됐다.
“넌…… 뭐냐?”
손정규의 질문에 침입자는 검을 겨누며 당당히 대답했다.
“경험치 강도다.”
“미친놈이구나.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93레벨 따위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다니. 손정규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얼굴이 못났구나. 조각할 가치도 없겠군.”
“너도 그래.”
“죽어라.”
파아앗-!
석화의 주문이 쏘아졌다.
정도현은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아 줬다.
정도현의 몸 곳곳이 순식간에 돌처럼 굳더니 이내 검을 쥔 조각상으로 변했다.
“…흥. 웬 버러지 때문에 흥이 깨졌군.”
손정규는 더 볼 것도 없단 듯이 매정히 뒤돌아섰다. 그 순간.
쩌적.
묘한 소리가 그의 발길을 붙잡았다.
“……?”
굵직한 금이 갈라지더니 정도현의 석화가 풀려 버렸다.
처음 보는 현상에 손정규가 입을 쩍 벌렸다.
“어, 어떻게……?!”
“이건 「호신강기」라는 거다. 마력으로 몸을 보호하는 거지. 실드 주문이랑 비슷해.”
그게 뭔데. 듣도 보도 못한 스킬 명칭에 손정규는 당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