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잠깐 사이에 진규현의 몰골은 엉망이 됐다. 강인한 수인의 육체로도 천뢰격을 오랫동안 버티긴 힘들었다.
후웅-!
벼락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진규현이 「공간 도약」으로 아예 피한 것이다.
시야에서 사라진 진규현은 정도현의 배후에 나타났다.
그가 손톱을 바짝 세워 손날 찌르기를 날렸다. 소릴 죽인 기습이었다.
그러나 정도현은 등짝에 눈이라도 달렸는지 곧바로 반응했다.
그가 팔을 뒤로 젖혀 방패처럼 검을 내밀었다.
“…큭!”
진규현이 멈칫하며 공격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났다.
저 망할 벼락 때문에 선뜻 건드릴 수가 없었다. 때리면 오히려 손해였다.
거릴 벌린 진규현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다시 기회를 엿봤다.
그러자 정도현이 검을 슬쩍 내렸다.
“이봐, 제안할 게 있어.”
“…제안?”
“그래, 너도 여기서 죽긴 싫을 거 아냐.”
진규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실컷 괴롭혀 놓고 인제 와서 제안이라니. 무슨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대체 무슨 꿍꿍이지?
저의가 의심스러웠지만 당장은 뾰족한 수가 없었기에 일단 응했다.
“…뭘 원하는데?”
“나한테 협조 좀 해 주면 돼.”
“무슨 협조?”
“순백교가 오늘 뭘 하려 했는지 다 알고 있어. 네 특성으로 테러를 저지르려 했지?”
진규현이 흠칫했다. 정보가 샜다고?
그럴 리 없다. 신도들은 영혼 낙인 때문에 정보를 발설하거나, 조직을 배신하지 못할 텐데.
“…그걸 어떻게?”
“저번에 날 습격했던 간부 족쳐서 알아냈어.”
“거짓말하지 마. 신도를 붙잡아 심문하는 건 불가능해. 그러면 영혼 낙인이 발동돼서 죽을 거라고.”
“그 영혼 낙인을 내가 없앨 수 있다면?”
“……!”
정도현이 손쉽게 논파했다.
그 말에 진규현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정말… 영혼 낙인을 지울 수 있어?”
“할 수 있으니까 이런 제안을 하는 거겠지? 안 그랬으면 넌 벌써 죽었어.”
저건 단순한 허세가 아니었다.
정도현이 죽일 마음으로 전투에 임했으면 더 빠르게 결판이 났으리라.
진규현은 자존심 다 내려놓고 질문했다.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
“그렇게 어렵진 않아. 네 특성을 오늘 하루만 좀 빌리고 싶어서. 넌 몇 번 왔다 갔다만 해 주면 돼. 누구랑 싸울 필요도 없고.”
“…….”
진규현은 천천히 흥분을 가라앉혔다.
정도현이 영혼 낙인을 지울 수 있다는 건 믿어 볼 만했다.
하지만 영혼 낙인을 지워 준다 해서 자유의 몸이 된다는 건 아니었다.
‘영혼 낙인을 풀어 주면 피의 맹약을 맺겠지.’
정도현에게만 유리한 부당 조건으로 말이다.
그렇게 되면 목줄을 쥔 사람이 공주은에서 정도현으로 바뀌는 것뿐이었다.
평온과 자유. 그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내가 원한 건 자유로운 삶이었어. 언제 처분당할지 모를 실험체 신세를 벗어나고 싶었거든. 그래서 교주랑 손을 잡았지. 제한 구역을 나왔지만 거기 있을 때랑 바뀐 건 거의 없어. 누군가의 명령에 복종하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건 똑같았으니까.”
“난 계속 붙잡아 둘 생각 없어. 이번에만 제대로 도와주면 이후엔 네가 뭘 하고 다니든 신경 안 쓸 거야.”
“…그게 정말이야?”
그의 「공간 도약」은 아주 유용한 능력이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곱게 놔주겠다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단, 나랑 내 주변 사람들만 건들지 마. 어쩔래? 할 거야 말 거야?”
“…….”
진규현은 잠시 고민했다.
아무리 내키지 않아도 공주은은 그를 제한 구역에서 꺼내 줬다.
그의 실력을 높이 사서 개인 특성도 줬다.
하지만 그는 진정한 자유가 고팠다.
누군가의 명령에 따르고, 언제 죽을지 몰라 끙끙거리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기회가 왔다. 손을 뻗어 붙잡기만 하면 된다.
“좋아, 협조할게. 대신 방금 한 약속 꼭 지켜.”
“걱정하지 마. 피의 맹약을 맺을 테니까.”
정도현은 그렇게 말하며 피의 맹약서를 내밀었다. 그들은 합의하에 서로 협조한다는 맹약을 체결했다.
계획대로 일이 풀리자 정도현은 약속대로 해결책을 휙 던져 줬다.
진규현은 그걸 받아들곤 눈이 휘둥그레졌다.
“에, 엘릭서?”
영혼 낙인을 어떻게 풀어 줄지 궁금했는데 설마 엘릭서를 꺼낼 줄이야.
‘저 녀석 정체가 뭐야?’
진규현은 혼란에 빠진 눈으로 정도현을 바라봤다.
정도현이 웃으며 얼른 마셔 보란 제스처를 취했다.
꿀꺽, 꿀꺽!
시키는 대로 내용물을 비우자, 영혼 낙인이 사라졌다는 알림이 떴다.
진규현은 가슴팍의 문신이 사라진 걸 확인하곤 감개무량했다. 정말로 자유의 몸이 되다니.
진규현은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일단 자릴 옮기자. 요원들 눈에 띄면 귀찮아지니까.”
“그러지.”
* * *
스스스-!
정도현과 진규현은 아카데미 본관 옥상으로 이동했다.
여기엔 아무도 없었다. 남몰래 대화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진규현은 난간에 등을 기대며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질문했다.
“그래서, 넌 뭘 하고 싶은 건데?”
“순백교를 정리할 생각이야.”
“…뭐?”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순백교 신도들은 이천 명이 훌쩍 넘는다.
그들은 관리국, 길드, 암흑가 등등 도처에 숨어서 활동하고 있다.
“그 많은 놈들을 다 어떻게 상대하게?”
“체스 알지?”
“…갑자기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말해 봐. 체스에서 상대를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거야 당연히… 상대 왕을 잡으면 되잖아?”
그렇게 대답하던 진규현은 문득 깨달았다. 정도현이 무슨 소릴 하고 싶었는지를.
“상대편 말이 얼마나 많이 남았든 왕만 잡으면 내가 이겨.”
“너… 설마?”
“교주가 있는 곳으로 날 이동시켜 줘.”
정도현은 왕을 노릴 생각이었다.
진규현 눈에는 그가 완전히 미친놈처럼 보였다.
“…교주 레벨이 몇인지는 알고 하는 소리야?”
“알아. 110레벨.”
“그걸 알면서 그딴 소릴 한다고? 아니면 뭐, 관리국한테 얘기해서 지원이라도 요청하게?”
“아니. 관리국이 내 말을 믿겠어? 적의 함정일 수 있다, 내가 첩자일지 모른다, 그렇게 의심만 하다 아까운 시간만 날릴걸?”
관리국의 도움은 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
고위층 중에 순백교한테 뇌물을 받아먹은 녀석이 있을 수도 있고, 없더라도 돕긴커녕 방해만 할 거다.
설령 관리국이 협력해 줘서 교주를 잡는다 쳐도, 경험치가 피자처럼 조각조각 나뉘겠지. 그럼 손해였다.
“이길 자신은 있고?”
“싸워 봐야 알겠지만, 계획대로만 흘러가면 충분히 가능성 있어.”
“…확신도 없으면서 싸우겠다고?”
목숨이 몇 개라도 되는 건가?
진규현은 정도현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너무 무모했다.
마치 큰 판에 눈이 뒤집힌 도박꾼 같았다. 저런 사람은 늘 모 아니면 도였다.
“물론 교주랑 당장 싸우진 않을 거야.”
“…그럼?”
“왕을 치려면 측근들부터 야금야금 잡아먹어야지.”
모든 일에는 다 순서가 있는 법.
정도현은 진규현한테 계획을 설명했다.
* * *
테러를 위해 집결해 있던 순백교 최고 간부들.
그들은 아카데미 인근의 어느 호텔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스스-!
방 안에 시커먼 연기가 모이더니 진규현이 나타났다.
“…응?”
“뭐야, 고양이 오빠.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진규현이 약속했던 시각보다 훨씬 일찍 오자 간부들은 의아해했다.
진규현은 그들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문제가 좀 생겼어.”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문제라니?”
“누군가가 선수를 쳤어. 아카데미에 슬라임 무리가 나타나서 시민들이 밖으로 대피 중이야.”
그 말에 간부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기랄! 어떤 놈들이지?”
“몬스터를 뿌렸으면… 흑마법사 놈들 짓 아냐?”
“어쩌면 마녀 쪽일지도.”
일이 단단히 꼬여 버렸다.
시민들이 대피한 이상 그들은 작전을 진행할 수 없다.
“당장 교주님께 알리자.”
“아, 내가 이미 보고했어.”
“교주님께서 뭐라 하셨지?”
“우리더러 시민들이 대피한 장소를 습격하라 했어.”
“…대피한 곳을?”
“설마 관리국 본부라도 공격하란 건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니었다. 간부들이 난감해했다.
그러자 진규현이 고갤 저으며 마저 설명했다.
“알아보니 아카데미 근처에 지하 방공호가 있더라고.”
“지하 방공호?”
“사태가 수습될 때까지 시민들을 거기 격리해 두겠대. 요원들은 지상의 입구를 봉쇄했고.”
“잠깐, 그렇다면…….”
간부들의 표정에 화색이 돌아왔다.
요원들과 시민들이 동떨어져 있단 소리잖아?
지하 방공호 내부로 「공간 도약」을 하면, 요원들의 눈을 피해 시민들이랑 접촉할 수 있으리라.
순백교임을 밝히고 몇 명만 살려 두면 알아서 입소문이 퍼지겠지.
“이거… 오히려 잘된 거 아냐?”
어떤 간부의 중얼거림에 다른 간부들도 고갤 끄덕였다.
물론 아카데미 내부를 휘저었으면 사람들에게 좀 더 강렬한 인상을 심을 수 있었겠지만, 일단 그건 물 건너갔다.
중요한 건 메시지지.
“내 마력으론 한 번에 두 명씩 데려가는 게 한계인데, 누가 먼저 갈래?”
“나, 나! 내가 먼저 갈래, 고양이 오빠!”
양손에 권총을 쥔 소녀가 눈을 반짝이며 의욕을 보였다.
그녀가 나서자 옆에 있던 파트너 간부, 근육질 사내가 한숨을 쉬며 손을 들었다.
“나도 가지. 쟤 브레이크 잡아 줄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돼지랑 내가 가서 싹 쓸어 버릴게!”
“어이, 우리 몫은 좀 남겨 달라고.”
이 둘은 심장 포식자 사건 때 함께 행동했던 간부들이었다.
동시에 진규현처럼 마탑의 실험체였고.
진규현은 둘의 어깨에 손을 얹고 「공간 도약」을 발동했다.
스스스-!
검은 안개가 그들을 삼키더니 순식간에 지하 방공호로 이동됐다.
쌍권총 소녀는 신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다 고갤 갸웃했다.
그녀가 총구를 내리며 짜증을 냈다.
“뭐야? 텅 비었잖아! 고양이 오빠, 잘못 온 거 아냐?”
“어떻게 된 거냐, 진규현?”
“어떻게 되긴, 속은 거지.”
“……!”
진규현 대신 누군가가 그리 말했다.
간부들이 고갤 돌려 누군지 확인했다. 그리곤 경악했다.
“저, 정도현?”
“네놈이 여길 왜…….”
스스스-!
진규현이 정도현 옆으로 「공간 도약」 했다. 그러더니 마치 한편인 것처럼 자연스레 나란히 섰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 간부들.
그들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기 새처럼 입을 쩍 벌렸다.
“배, 배신한 거야?”
“하지만 어떻게…….”
그들에게 추측할 여유는 없었다.
정도현이 칼을 들고 뛰어왔으니까.
타다다당! 꽈드득!
소녀의 권총이 불을 뿜고, 근육질 남성은 거대한 멧돼지로 변신해 돌진했다.
진규현은 멀찍이 물러나 그들의 싸움을 지켜봤다.
‘이런 식으로 간부들을 꾀어낼 줄이야.’
아카데미 근처에 지하 방공호가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곳에 시민들이 잠시 대피한 것도 틀림없는 사실.
하지만 지하 방공호는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몇 개 더 있었다.
진규현은 시민들이 대피하지 않은 방공호로 간부들을 데려왔다.
쾅, 콰앙!
정도현과 간부들이 살벌하게 치고받았다.
폭격이 떨어지듯 굉음이 끊이질 않는다. 하지만 방공호의 깊이는 100m가 훌쩍 넘었다.
아무리 난동을 부려 봤자 지상까지 소음은 닿지 않을 터.
“돼지! 어떻게 좀 해 봐!”
정도현이 바짝 달라붙자, 권총녀가 필사적으로 거릴 벌리며 총을 갈겼다.
하지만 거대 멧돼지는 아까부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검기에 온몸을 난도질당해 피투성이였다.
정도현은 심장 포식자 때보다 훨씬 강해졌다.
순백교 간부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게 이젠 식은 죽 먹기였다.
굳이 도핑제를 쓸 필요도 없었다.
“커헉!?”
“끄으…….”
서걱, 촤악-!
소녀의 한쪽 팔이 날아갔다.
거대 멧돼지도 치명상을 입자 서서히 줄어들며 변신이 풀렸다.
정도현은 상처에 포션을 조금씩 뿌려 줬다.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자신들을 마무리 짓지 않자, 근육질 남자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 째서냐……?”
“벌써 죽으면 좀 곤란하거든. 아직 4명 더 남았잖아.”
“……!”
근육질 남자의 눈이 커졌다.
설마 다른 간부들도 이런 식으로 불러내 사냥할 셈인가?
하지만 아무리 인원을 둘로 쪼개더라도, 혼자서 간부 전원을 상대한다니.
그게 될 거라고 보는 건가?
꿀꺽, 꿀꺽!
그의 의문은 정도현이 꺼낸 회복 포션으로 풀렸다.
“사, 상급 포션……?”
상급 포션은 그도 겨우 몇 번밖에 보지 못했을 만큼 귀한 아이템이었다.
한 병에 이천만 원은 족히 나갈 터.
그 비싼 걸 자신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뿌렸단 말인가?
심지어 진규현한테도 마시라며 한 병 휙 던져 줬다.
“대체 넌 정체가…….”
퍼억-!
정도현은 둘을 검집으로 후려쳐 기절시켰다.
자신들이 붙잡힌 걸 시인하는 순간 영혼이 빠져나가 죽어 버릴 테니까.
혹여나 나중에라도 깨어나지 못하게 상점창에서 수면제도 구입해 먹였다.
응급조치를 끝낸 정도현이 손을 탁탁 털며 진규현에게 말했다.
“다음 환자들 데려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