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진규현이 호텔로 되돌아오자 대기하던 간부들이 성화를 냈다.
“뭐 이렇게 오래 걸려?”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잖아.”
그가 돌아오는 데 몇 분이나 걸렸다.
「공간 도약」이 있는데도 이렇게 복귀가 늦어지다니.
간부들의 따가운 시선에 진규현은 머릴 긁적이며 변명했다.
“어쩔 수가 없었어. 다른 사람이랑 같이 이동하면 마력이 왕창 들어서 힘들다고.”
“쯧. 그래서 거기서 쉬다 온 거냐?”
“그런 거면 미리 말이라도 해 주든가.”
“불만 있으면 걸어가든가.”
진규현의 한마디에 툴툴대던 간부들이 조용해졌다.
“최하층은 그 녀석들이 청소 중이고, 그 위층은 누가 갈래?”
“내가 가지.”
새하얀 가면을 쓴 간부가 손을 들었다.
그가 자원하자 진규현이 고갤 갸웃했다.
‘저 녀석, 관리국 팀장이라 하지 않았었나?’
시민들을 지키던 녀석이 학살극에 동참하다니.
게다가 저 남자는 마지못해 나선 것도 아니었다.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본인의 의지로 사람들을 사냥하고 싶어 하다니.
‘나도 배신자라 뭐라 따질 입장은 아니지만.’
저 녀석은 구제 불능의 쓰레기였다.
저런 녀석이 관리국 팀장을 맡았었다고?
‘아무리 인재가 없었어도 그렇지.’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긴 꼴 아닌가.
진규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가면 쓴 남자와 그 파트너 간부 어깨에 손을 얹고 「공간 도약」을 사용했다.
* * *
스스스-!
진규현이 새로운 간부 둘을 지하 방공호로 데려왔다.
“…응?”
“뭐야!”
그런데 시민들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먼저 갔던 동료들은 피투성이가 된 채 널브러져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간부들은 당황했다.
“이, 이봐!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간부들이 기절한 동료들에게 뛰어갔다.
어깨를 붙잡고 거칠게 흔들어 봐도 깨어나질 않는다.
숨은 쉬는데 못 일어나는 걸 봐선 약을 써서 재운 듯했다.
“진규현. 우릴 배신했구나!”
스릉-!
가면을 쓴 간부가 단숨에 칼을 뽑고서 진규현의 목을 노렸다.
진규현은 「공간 도약」으로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뭐가 저렇게 빨라?’
방심하지도 않았는데 하마터면 베일 뻔했다. 수인의 몸은 워낙 튼튼하니 죽진 않았겠지만, 중상으로 이어졌을 터.
인성은 개판이어도 실력이 일품이었다.
저딴 놈을 왜 팀장으로 기용했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배신이라니? 이봐, 그게 무슨…….”
“그거 말곤 없잖아. 저 녀석이 배신한 게 아니면 어떻게 설명할 건데?”
“그, 그건 그렇지만…….”
진규현이 함정을 판 거다.
가면 쓴 간부의 주장에 다른 간부도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
“정답. 눈치가 좀 빠르네?”
“……!”
짝짝.
어디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정답을 맞춘 걸 축하해 주는 것처럼.
간부들이 고갤 돌려 그게 누군지 확인했다.
“……!”
박수를 친 건 정도현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간부들은 깜짝 놀라서 몸이 굳었다.
그것도 잠시. 가면 쓴 간부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 격렬한 반응에 진규현은 의아함을 느꼈다.
‘쟤 갑자기 왜 저래?’
그에게서 진득한 살의가 뻗어 나왔다.
경계심이나 두려움이면 모를까 저렇게까지 분노하다니.
진규현이 모르는 뭔가가 저 둘 사이에 있는 것 같았다.
“네놈이 왜 여깄지!”
“…응?”
가면 쓴 남자가 삿대질하며 뭐라 따지자, 정도현은 검을 뽑으려다 멈칫했다.
그도 알아챘다, 가면 쓴 간부가 자신에게 강한 적개심을 품었단 걸.
이름은 물음표로 뜨고, 목소리도 들어 본 적 없었다. 저 가면이 바꿔 준 모양이다.
“너 누구냐? 얼굴 좀 까 봐.”
“닥쳐!”
가면 쓴 간부가 땅을 박찼다. 어찌나 빠른지 지하실에 돌풍이 일었다.
카아앙-!
둘의 검기가 힘껏 부딪혔다.
정도현은 검을 맞대다 슬쩍 뒤로 빼며 교묘하게 검을 비틀었다.
그러자 잔뜩 흥분해서 사정없이 밀어붙이던 상대는 순간 자세가 흔들렸다.
빈틈이 생겼다. 정도현은 피하지 못할 각도로 검을 찔러 넣었다.
샥-!
하지만 가면 쓴 간부는 재빠르게 피했다.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뺨을 스쳐 지나갔다.
상대의 비정상적인 속도에 정도현은 기시감이 들었다.
“…「가속」? 아, 네가 물려받았어?”
강력하고 까다로웠던 특성, 「가속」.
그런데 정도현은 오히려 기뻐했다.
강한 녀석일수록 돌아올 보상도 커질 테니까.
“죽어!”
놈은 한 번 더 「가속」했다.
96레벨이라 그런지 이전에 쓰던 녀석보다 더 빨랐다.
정도현은 상대의 움직임을 아슬아슬하게 쫓았다.
도핑제를 먹지 않은 상태라 속도로는 조금 밀린다.
카앙, 캉!
그런데도 곧잘 피하고 막아 냈다.
속도만 부족한 거지, 나머지 면에선 정도현이 훨씬 앞섰다.
‘어째서!’
가면 쓴 간부는 정도현이 여유롭게 막아 내자 이를 갈며 바삐 손을 놀렸다.
강력한 개인 특성을 얻었다. 복수심에 미쳐 불과 한 달 만에 2레벨이나 올렸다.
분명 전보다 강해졌는데, 어째서 저놈을 죽일 수 없는 거지?
“죽어, 죽으란 말이다!”
카가가강-!
세 번째 「가속」으로 속도를 더욱 끌어올렸지만, 그마저도 정도현은 막거나 흘렸다.
저번보다 강해진 건 정도현도 마찬가지였다.
칼을 휘두르는 족족 막혔다. 검이 충돌할 때마다 손아귀가 뜨거웠다.
어떻게든 정도현을 죽여 보려 발악할 때, 귓가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광서혁, 너냐?”
“……!”
정도현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검을 휘둘렀다.
상대는 큰 동작을 펼치느라 회피가 반 박자 늦었다.
쩌적-!
가면이 쪼개지며 간부의 얼굴이 드러났다.
예상대로 가면의 사내는 동부 관리국의 팀장, 광서혁이었다.
“…큭!”
정체를 들킨 광서혁이 후다닥 물러섰다. 정도현은 그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분명 수용소에 보냈다고 했는데. 순백교는 범죄자도 빼낼 수 있나 보지?”
“닥쳐!”
범죄자란 말에 광서혁이 발끈했다.
자신을 수용소로 보내 버린 장본인한테 저런 소릴 들으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너만, 너만 아니었으면……!”
“거기, 너. 멍청하게 구경만 하지 말고 얘랑 같이 덤벼. 진규현, 넌 빠지고.”
정도현은 꽥꽥대는 광서혁을 무시했다.
그리곤 광서혁의 동료한테 검을 까딱거리며 같이 덤비라 말했다.
진규현과 대치하던 동료 간부는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같이 덤비라고?”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다니.
더 웃긴 건 진규현은 정도현의 지시대로 멀찌감치 물러섰다.
정도현의 오만방자함에 광서혁은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너, 또 뭔 개수작이냐!”
“개수작이라니, 효율적인 거지.”
“효, 효율? 어딜 봐서!”
“넌 저번에 분석 다 끝냈잖아. 움직임이 훤히 보여. 동료랑 같이 덤벼야 싸움이 될 것 같거든.”
광서혁은 그간 2레벨이 올라 96레벨로 껑충 성장했다. 하지만 정도현 기준에선 그게 그거였다.
“이 개새끼가!”
완전히 무시당하자 광서혁이 발작했다.
그렇지만 혼자서는 버겁단 걸 내심 인정했는지 동료 간부를 흘끔 쳐다봤다.
그가 보낸 눈빛에 동료도 고갤 끄덕인다.
둘이서 힘을 합치지 않으면 정도현을 이길 수 없었다.
“우오오오오!”
광서혁의 동료가 함성을 내질렀다.
전신의 피부가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곳곳에 굵다란 혈관이 튀어나왔다.
정도현은 그의 변신이 끝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 줬다.
‘저 녀석은 버프 계통인가.’
변신을 끝마친 간부가 풀쩍 뛰어올라 양날 도끼를 쾅 내리찍었다.
동시에 광서혁도 측면으로 파고들어 검을 마구 휘둘렀다.
정도현은 도끼와 검을 쳐 냈다.
‘아무래도 진짜 미친놈 같은데.’
진규현은 정도현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본인보다 레벨이 높은 상대 둘을 동시에 상대하다니.
심지어 잘 버틴다. 아니, 그가 점차 밀어붙이고 있었다.
‘87레벨이 어떻게 저런 힘을 내는 거지?’
혹시 저 녀석, 레벨 업 할 때 남들보다 능력치가 더 많이 오르는 거 아냐?
그러지 않고서야 저 레벨에 저리 잘 싸울 수가 없었다.
진규현의 추측은 정답에 얼추 근접했다.
정도현은 여러 영약을 복용해, 동레벨 플레이어보다 능력치가 우월했으니까.
“…윽!”
“커헉!”
정도현의 검이 그들의 팔을 하나씩 날려 버렸다. 전투가 개시된 지 몇 분도 채 안 됐다.
광서혁은 허전해진 어깨를 부여잡고 아프다며 울부짖었다.
“씨발… 이건 말도 안 돼!”
“말이 안 되긴.”
섬에서 싸웠을 땐 제대로 된 무기나 방어구도 없었다. 그런데도 광서혁을 제압했었다.
하물며 지금은 에픽 무기와 방어구를 두른 상태.
정도현이 장비를 운운하자 광서혁이 곧바로 반박했다.
섬에서 싸울 때, 정도현이 변변찮은 장비를 착용한 건 사실이지만 그건 광서혁도 똑같았다고.
“나도 에픽 등급을 맞췄어, 그런데 왜!”
광서혁은 순백교 간부가 된 뒤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래서 무기와 방어구 전부 에픽 등급으로 맞췄다.
“그러니까 안 되지.”
“…뭐?”
“날 이기고 싶었으면 그 윗급인 유니크 장비를 꼈어야지.”
“뭔 헛소리야!”
에픽 등급이라 해서 똑같은 게 아니었다.
이쪽은 장인이 만든 에픽 장비에 +15만큼 합성해서 강화했다. 그러니 상대가 안 되는 것.
서걱-!
정도현은 설명해 주는 대신 광서혁의 목을 잘랐다. 옆에 있던 간부는 심장을 찔려 절명했다.
끼에에엑-!
간부들이 죽자 몸에서 빠져나온 망자들이 구슬피 울며 지상으로 올라갔다.
혼백이 빠져나간 시체는 스스로 불타 없어졌다.
정도현은 기절한 간부들도 처리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네 명을 죽였는데 2레벨이나 올라 89레벨이 되었다.
개인 특성을 가진 놈들이라 그런지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경험치를 더 많이 얻었다.
한층 강해진 정도현은 고양감을 만끽하며 말했다.
“남은 녀석들도 데려와.”
“이미 저지르긴 했지만… 정말 교주랑 싸워도 괜찮겠어?”
간부들을 죽였다.
방금 날아간 망령들이 교주한테 도착하면 그녀도 이들의 죽음을 알아챌 터.
이제 남은 간부들은 둘. 그들을 다 죽여도 90레벨이 한계일 터.
반면에 공주은은 110레벨. C구역의 거대 길드장들과 맞먹는다.
‘그런데도 싸우겠다고? 그것도 일대일로?’
무려 20레벨 차이다.
고레벨 기준에서 그 정도 격차면 다섯 살배기 꼬마를 데려다 놓고 어른이랑 싸움을 붙이는 꼴이다.
진규현이 그렇게 말하자 정도현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긴 해. 근데 그거 알아?”
“뭘?”
“다섯 살짜리 애가 체격은 어른이랑 거의 비슷하고 총까지 들고 있다면?”
“…지금 말장난할 때야?”
진규현은 그렇게 투덜대며 「공간 도약」을 했다. 남은 간부들도 마저 상납하기 위해서.
* * *
쨍그랑-!
공주은은 찻잔을 바닥에 떨궜다.
깨진 파편과 홍차 때문에 바닥이 지저분해졌다.
“어떻게…….”
간부들의 영혼이, 그것도 무려 네 명분이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왔다.
공주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네 명이 한꺼번에 당했다고?’
아무리 정예 요원들이 있었다 한들, 간부들의 힘이라면 능히 해치울 수 있었을 터.
설령 위험에 처했더라도 진규현의 「공간 도약」이 있었다.
안전한 곳으로 내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을 터.
“젠장! 어떻게 된 거야!”
공주은이 다급히 진규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통화 불가 지역에 있다는 안내문만 반복된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집어 던졌다.
끼에에엑-!
그런데 또 다른 망령들이 그녀 품으로 돌아왔다.
“……!”
그것 역시 간부들의 영혼이었다.
이로써 진규현을 제외한 순백교의 최고 간부들은 전원 사망했다.
어떻게 보충한 전력인데. 하루아침에 날아갔다.
관리국일 리 없다. 다른 세력이 개입했다.
“…대체 누가?”
스스스-!
그녀의 혼잣말에 응답하듯 시커먼 연기가 모여들었다.
「공간 도약」의 전조였다. 그녀는 진규현한테 어떻게 된 일인지 꼬치꼬치 캐물으려 했다.
그런데 진규현은 혼자 돌아오지 않았다. 옆에 친구를 달고 왔다.
“……!”
정도현, 그가 진규현 옆에 있었다.
공주은은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다, 당신이 왜……?!”
“왜 왔냐고?”
경험치 받으러 왔다. 정도현이 그렇게 말하며 검을 겨눴다.
그런데 평소 애용하던 롱소드가 아니라, 옥빛의 대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