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동부 변경의 도시를 관리하는 ‘박영하’ 시장.
그는 내일 아침 본부 요원들이 들이닥칠 거란 소식을 접했다.
“젠장! 하필 그 여자라니.”
본부에서 사람을 보내면 황금으로 회유할 계획이었는데, 하필 조사관이 권하율 팀장이었다.
그녀는 뇌물이 통하지 않는 인물로 소문이 자자했다.
박영하가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마녀한테 큰소리 떵떵 쳤는데, 이제 어떡하지?’
그와 검은 마녀는 협력 관계였지만 동료보단 서로를 이용해 먹는 것에 더 가까웠다.
마녀는 그가 잘못되든 말든 개의치 않을 터. 다른 지역으로 도망쳐, 새로운 협력자를 찾아내 산 제물만 수급하면 된다.
“…그 방법밖에 없어.”
그는 권하율한테 마녀를 팔아넘기기로 마음먹었다.
권하율 입장에선 이번 사태를 최대한 빨리 해결하고 싶을 터.
하지만 아무 정보도 없이 도시를 수색하면 시간도 한참 걸리고, 마녀를 놓칠지도 모른다.
반대로 그가 권하율에게 정보를 넘겨주고 협조한다면 마녀를 붙잡을 확률이 오를 터.
협력하는 대가로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죄는 눈감아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플레이어가 아닌 그가 살아남을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 * *
다음 날 아침, 보고받은 대로 권하율 일행이 박영하를 찾아왔다.
“어서 오시지요, 권 팀장님. 박영하라고 합니다.”
“박영하 시장님. 저희가 왜 찾아왔는지 아십니까?”
권하율은 그를 싸늘하게 노려보며 질문했다. 날이 선 말투.
그녀는 이미 그를 반쯤 죄인으로 취급했다.
박영하는 어린 년이 싸가지가 없다며 속으로 투덜댔다. 그는 침울한 표정을 연기하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실종자들 때문이겠죠.”
“알긴 아시는군요. 몇 달 전부터 실종자가 꾸준히 발생했는데, 윗선에 제대로 보고하지 않으셨더군요. 이유가 뭡니까?”
“…정말 면목없습니다.”
박영하는 곧장 머리 숙여 사과했다.
예상했던 반응과 달랐다.
모른다고 잡아뗄 줄 알았는데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다니.
권하율은 이해가 안 돼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이유를 말하세요. 왜 보고를 누락시켰습니까.”
“…마녀한테 협박당했습니다. 신고하면 저와 제 가족들을 죽이겠다면서.”
“마녀?”
그 말에 요원과 용병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박영하는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도권을 쥐었다.
“자세한 내막은 권 팀장님한테만 따로 설명해 드리고 싶습니다. 아주 중요한 얘기라서요.”
협상하려면 부하 요원들 없이 권하율과 단둘이서 대화하는 편이 유리했다.
아카데미 수석 졸업이니 동부 최강이니 추켜세운들, 그녀는 아직 젊고 미숙했다.
어수룩한 애송이를 혓바닥으로 구워삶는 것쯤이야 그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알겠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다른 분들은 잠시 자릴 비켜 주시겠습니까?”
요원과 용병들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정도현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박영하가 고갤 갸웃했다.
“이보게, 청년. 방금 내가 한 말 못 들었나? 권 팀장님과 긴히 나눌 얘기가 있대도?”
정도현은 대답 대신 권하율을 쳐다봤다. 권하율은 그가 바라는 대로 해 줬다.
“정도현 씨는 남아도 괜찮습니다.”
“예? 아니, 권 팀장님. 이러시면 저도 곤란…….”
“시장님, 전 수십 명이 실종한 사건을 조사하러 나왔습니다. 시장님은 신고하지 않고 사건을 은폐하려 했고요. 명심하세요. 제 권한으로도 언제든지 시장님을 본부로 압송할 수 있습니다.”
권하율은 그가 말하는 걸 도중에 끊어 버리고 경고했다.
박영하는 울컥했지만 어금니를 꽉 깨물고 참았다.
여기서 화를 냈다간 협상은 그대로 물 건너갈 터.
“…알겠습니다.”
박영하는 어쩔 수 없이 뜻을 굽혔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하나든 둘이든 어차피 똑같은 애송이니까.
권하율과 정도현을 제외한 나머지가 방에서 나가자, 박영하는 헛기침하며 무게를 잡았다.
“크흠. 그럼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실은 마녀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예? 그게 무슨…….”
권하율이 또 말을 끊었다. 박영하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때, 정도현이 인벤토리에서 매직 스크롤을 꺼냈다.
거기엔 일정 시간 소리를 차단하는 중급 주문, 「사일런스」가 담겨 있었다.
매직 스크롤을 사용하자, 방 전체에 반투명한 장벽이 펼쳐졌다.
이제 안에서 소릴 질러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듣지 못할 터.
박영하는 겁에 질려서 벌떡 일어났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켁, 케헥!?”
정도현이 한 손으로 박영하의 목을 붙들었다. 그러자 마치 도살장에 끌려온 돼지처럼 꽥꽥댔다.
“끄, 끄으!”
놈이 핏발 선 눈으로 정도현을 노려봤다.
나한테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고 항의하는 듯했다.
정도현은 픽 웃으며 그의 얼굴을 탁자 위에다 처박았다.
쿵-!
시끄러운 소리가 울렸지만 바깥 사람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박영하가 코피를 줄줄 흘리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네, 네놈! 돌아 버린 거냐!”
“예, 저 미친놈 맞습니다.”
“권 팀장님! 이 녀석 좀 어떻게 해 주십쇼!”
“정도현 씨, 잘하셨어요. 그대로 꼭 붙잡고 있어 주세요.”
“궈, 권 팀장님?”
권하율은 정도현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칭찬해 줬다.
박영하는 그제야 상황이 묘하게 돌아간다는 걸 깨달았다.
“자, 잠깐! 이딴 식으로 나오면 나도 수사에 협조 안 해! 범인 잡기 싫어?”
“네, 네. 알겠으니까 시장님은 가만히 있으세요. 그게 수사를 돕는 겁니다.”
“뭐? 뭔 개소리야!”
둘이서 만담을 주고받는 사이, 권하율은 박영하의 어깨에 손을 살포시 얹고 심문했다.
“실종자들은 어떻게 됐죠?”
“난 몰라! 이따위로 할 거면 그쪽이 알아서 찾아보든가!”
“마녀가 전부 산 제물로 바쳤군요.”
“……!”
박영하의 눈동자가 두 배 이상 커졌다.
권하율이 정답을 맞혔다.
아까 그가 마녀에 대한 정보를 흘려서 대충 때려 맞춘 걸까?
“마녀는 지금 어딨죠?”
“다, 다 말할 테니까 일단 이것 좀 풀어 주고 대화를 좀…….”
“지하 방공호. 거기에 제단을 만들고 악마를 불러내는 의식을 치렀죠?”
박영하는 입을 쩍 벌렸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설마 이미 조사를 다 끝내 놓고 날 농락하는 건가? 그의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마녀한테 왜 협력했죠?”
“…….”
올 것이 왔다. 이것만큼은 절대 들키면 안 된다. 박영하는 침묵했다.
하지만 그의 무의식은 대답하고 말았다.
“제물을 바치면 악마가 황금을 줬다. 맞나요?”
“어, 어떻게……!?”
권하율은 전부 알고 있었다.
황금에 대해선 아무한테도 말 안 했는데. 박영하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설마… 그년이 배신한 건가?’
황금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그와 검은 마녀밖에 없다.
그래, 마녀가 관리국에 정보를 흘린 게 틀림없다. 박영하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의 속마음을 읽은 권하율은 대충 장단을 맞춰 줬다.
“익명의 누군가가 신고를 했습니다. 시장이 마녀와 연루되어 있다더군요.”
“젠장, 내 그럴 줄 알았어! 그 망할 년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박영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자 정도현은 뭐 이런 게 다 있냐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이렇게 멍청한 놈이 어떻게 시장 자리까지 올라온 거지?’
아무래도 집안이 빵빵한 모양이다.
가족 중 누군가가 레벨 높은 플레이어라도 되는 거겠지.
“정도현 씨, 마녀의 제단이 있는 곳을 살펴보러 가죠. 뭔가 단서가 남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죠. 박영하 시장은 체포합니까?”
“아뇨, 그는 데려갈 겁니다.”
“뭐, 뭐? 날 왜…….”
“마녀가 지하 방공호를 던전처럼 개조했을 테니까요.”
그녀의 말에 박영하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했다.
정도현도 좋은 생각이라며 끄덕였다.
흑마법사들은 자신의 연구소에 함정이나 키메라를 병사처럼 배치해 두니까.
박영하를 앞세우면 길을 헤맬 일은 없겠지.
* * *
정도현과 권하율 일행은 마녀의 거처로 향했다.
지하 방공호는 마녀가 내부를 죄다 뜯어고친 탓에 미로처럼 복잡했다.
박영하를 데려오길 잘했다. 그가 없었으면 한참 헤맸으리라.
그들은 제단이 있는 지하 시설 최심부에 금방 도착했다.
농염하고 육감적인 자태의 마녀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길쭉한 파이프 담뱃대를 손에 쥔 채 침입자들을 내려다봤다.
[???] [LV.92]
“뭐야, 손님들을 주렁주렁 달고 왔네?”
“궈, 권 팀장님! 저년입니다! 전부 저 마녀가 꾸민 짓이에요!”
박영하는 마녀에게 삿대질하며 죄를 몽땅 뒤집어씌웠다.
그러자 검은 옷의 마녀가 쿡쿡 웃으며 무슨 상황인지 대강 파악했다.
“그쪽 일은 알아서 해결하겠다더니. 하루 만에 배신했네? 뭐, 별 기대도 안 했지만 너무 실망스러워.”
“웃기지 마라! 네년이 먼저 배신했잖아!”
“…내가 배신했다고?”
마녀는 짚이는 게 없어서 담뱃대를 내려놓고 고운 표정을 찌푸렸다.
그녀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허탈하게 웃었다.
“너, 쟤들한테 속은 거야.”
“뭐?”
“무슨 말을 들었는진 몰라도 난 널 배신한 적 없어.”
딱-!
마녀가 일어서며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박영하가 비틀대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곁에 있던 요원들이 그를 부축했지만 막기엔 이미 늦었다.
“끄, 끄어어…….”
박영하가 피거품을 뱉으며 바닥에 엎어졌다.
권하율이 그를 살펴보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죽었다.
권하율은 그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을 노려봤다.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그 돼지한테 저주를 심어 뒀어. 날 배신하면 언제든 처리할 수 있게. 뭐, 그쪽한테 속았어도 결과적으로 배신한 거잖아?”
“…….”
마녀의 설명에 권하율은 분한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판단 때문에 또 사람이 죽고 말았다. 그녀의 어깨가 떨렸다.
정도현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저번에도 말했었지만 팀장님 잘못 아닙니다. 저 녀석이 죽을 짓을 한 거예요. 그리고 지금은 범인 잡는 것부터 신경 써야죠.”
“…네.”
“죽여도 됩니까?”
“사살해도 됩니다.”
정도현의 말 한마디에 권하율의 떨림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마녀는 재미난 거라도 구경한 것처럼 깔깔 웃었다.
“그 남자가 그렇게 듬직한가? 재밌네.”
마녀는 지팡이를 꺼내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바닥에서 가시넝쿨이 뱀처럼 꾸물꾸물 솟아났다.
마녀가 고혹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 남자가 죽어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궁금하네.”
마녀의 손짓에 가시넝쿨이 파도처럼 몰려온다. 요원과 용병들이 기겁하며 방어진을 펼쳤다.
퍼억! 쾅! 터엉!
수십 가닥의 가시넝쿨들이 노예를 채찍질하듯 마구 후려쳤다.
너도나도 가시에 긁히고 찔려서 피를 쏟았다.
“어머.”
그러나 정도현과 권하율은 생채기 하나 없었다. 다가온 가시넝쿨을 전부 베어 넘겼다.
등 뒤에 눈동자라도 달렸는지 사각을 노려도 귀신같이 막아 낸다.
“레벨은 낮은데 제법인걸?”
마녀는 정도현을 인정했다.
요원과 용병들보다 레벨이 낮지만, 그가 훨씬 나았다.
그녀는 악마와의 거래로 방대한 흑마력을 거머쥐었다. 그러니 92레벨이라도 같은 92레벨이 아니었다.
그런데 저렇게 잘 버티다니.
“나도 진심으로 해야겠는걸?”
그녀의 지팡이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자 흑마력을 잔뜩 머금은 가시넝쿨들이 꽈배기처럼 서로 배배 꼬였다.
이윽고 넝쿨들은 길쭉한 뱀처럼 변했다. 그런 것들이 열 개가 넘었다.
사방이 포위당했다. 요원과 용병들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까 날아든 가시넝쿨들도 막아 내기 벅찼는데 저것들을 상대하면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
“자, 그럼 놀아 볼까?”
마녀는 저들의 절망을 만끽했다. 환희에 몸이 파르르 떨린다.
거대한 가시넝쿨들이 일제히 쏟아지려 한 순간.
화르륵-!
정도현이 상급 매직 스크롤로 불꽃의 검기를 일으켰다.
“……!”
콰앙-!
칼질 한 번에 거대한 가시넝쿨 하나가 폭발에 휩쓸려 꺾였다.
정도현은 곧바로 마녀에게 돌진했다.
그녀는 황급히 다른 넝쿨들을 조종해 그를 마구 찔렀다.
하지만 마력의 상성이 나빴다.
콰앙-! 콰과과광!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거대 가시넝쿨들은 산산조각이 났다.
마녀는 마력을 일으켜 손에서 가시넝쿨 채찍을 만들었다.
“죽엇!”
채찍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발악은 말 그대로 발악일 뿐이었다.
칼질 한 번에 불이 옮겨붙으며 잿더미가 됐다.
마녀가 뭔가 해 보기도 전에 정도현의 검이 도달했다.
“아, 안 돼!”
푹-!
인두처럼 달궈진 칼날이 마녀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 중 하나가 불타서 죽는 거라고.
“꺄아아악!”
온몸이 불타올랐다. 마녀는 팔다리를 퍼덕대며 괴성을 토해 냈다.
자신만만하게 굴었던 것치곤 비루하기 그지없는 최후였다.
아니, 화형이면 마녀에게 딱 어울리는 최후려나.
정도현이 검을 회수하며 그렇게 생각할 때.
“……?”
쿠구구궁-!
제단이 흔들리더니 시커먼 연기가 일며 게이트 비슷한 게 열렸다.
거기서 거대한 손아귀가 불쑥 튀어나왔다.
공물을 바쳐 오던 마녀가 죽자, 분노한 악마가 강림한 것이다.
정도현이 입맛을 다시며 중얼댔다.
“웬일로 운이 좋네?”
마녀가 준 경험치는 너무 적어서 아쉽던 참이었는데.
추가 경험치가 알아서 굴러 들어왔다.
니케의 펜던트로 행운이 올라서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