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황규진은 순간의 기지로 위기를 벗어났다.
아래층으로 추락한 박성원과 서아린.
그들은 착지하자마자 다시 황규진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황규진은 이미 반격 준비를 끝마쳤다.
“「역병 포자」!”
“……!”
보라색의 모래알 같은 입자들이 불어닥쳤다.
「초감각」이 경고했다. 저걸 뒤집어 쓰면 위험하니 당장 피하라고.
박성원은 옆으로 몸을 내던져 겨우 피했다.
하지만 「초감각」이 없었던 서아린은 반응이 조금 늦고 말았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윽!”
역병 포자를 흠뻑 뒤집어쓴 서아린.
묘인으로 변신한 상태인데도 숨통이 콱 막히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몸속으로 역병의 기운이 퍼지자 그녀가 비틀댔다.
박성원이 그녀를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전 신경 쓰지 말고 계속 공격해요!”
그녀의 외침에 박성원도 다시 전투에 몰입했다.
황규진은 비열하게 웃으며 다음 주문을 발동시켰다.
“「역병 기사의 창」.”
허공에 보랏빛 마력이 모여들더니 길쭉한 창의 형태로 변했다.
십수 개의 창들이 일제히 쏘아진다.
박성원은 그걸 피하려다 의아함을 느꼈다.
‘초감각이 발동하지 않는다고?’
황규진은 그를 노리지 않았다.
창들은 경로를 틀더니 서아린 쪽으로 날아들었다.
카앙! 깡!
그녀는 필사적으로 쳐 냈지만 전부 막진 못했다.
푹! 푸욱-!
그녀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깨 부근에도 창이 하나 박혔다.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다. 창에 담긴 위력은 끽해야 하급 주문 수준.
그녀 수준의 플레이어에겐 그리 위협적인 공격도 아니었다.
“…윽!”
하지만 그녀의 한쪽 무릎이 꺾였다.
어지러움이 몰려온 탓이다.
창에 찔린 곳에서부터 보라색 얼룩이 피어났다.
역병의 주문이 완전히 퍼진 것이다.
완전히 무력화된 서아린을 보며 황규진은 씩 웃었다.
“이 자식이!”
박성원이 달려들며 창을 힘껏 내질렀지만, 황규진은 오히려 기다렸단 듯 양손을 뻗었다.
“「리플렉터」!”
둘 사이에 반투명한 장벽이 생겨났다.
「리플렉터」. 물리 공격을 막아 내고 충격의 일부를 상대에게 반사하는 중급 주문.
박성원도 그 정돈 알고 있었다.
‘공격하면 나도 위험하다.’
초감각이 속삭였다. 저걸 때리면 네 몸도 성치 못할 거라고.
하지만 이 이상 시간을 끌었다간 서아린과 시민들의 목숨이 위험해진다.
그는 자신의 안위보단 공격을 택했다.
“흐아압!”
쩌적-!
창날이 장벽을 꿰뚫고 황규진의 가슴팍을 찔렀다.
그와 동시에 박성원의 몸에도 강렬한 충격이 전해졌다.
「정의집행」으로 능력치가 확 올라간 탓에 반사 데미지도 만만치 않았다.
박성원이 휘청대며 피를 왈칵 토했다.
‘그래도 급소를 제대로 찔렀어.’
상대는 마법사다. 레벨에 비해 신체 능력이 한참 뒤처질 터.
방금 걸로 죽었거나 치명상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고갤 들자 뜻밖의 광경이 보였다.
“너, 사람 죽여 본 적 없구나?”
“……!”
“멍청하긴. 죽일 거면 머릴 노렸어야지.”
황규진은 가슴을 관통당했는데도 죽지 않았다. 심지어 가슴팍에 꽂힌 창날을 꽉 붙잡고 실실 웃어 댔다.
황규진의 상반신과 오른팔이 기이하게 변해 있었다.
털이 숭숭 자랐고 근육도 몇 배로 부풀었다. 마치 야수형 몬스터의 신체를 갖다 붙여 둔 느낌이었다.
“윽!”
황규진 역시 이광식처럼 실험체 중 하나였다. 황규진과 달리 신체 일부만 바뀌는 실패작이었지만.
박성원은 창을 뽑으려 했지만, 야수의 손에 붙잡혀서 꿈쩍도 안 했다.
어쩔 수 없이 무기를 포기하고 뒤로 물러나자 황규진의 마수가 확 뻗어 왔다.
덥석-!
그가 박성원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컥!”
“마탑 놈들도 도움이 되는군. 덕분에 살았으니까. 크흐흐!”
꽈아악-!
황규진은 손아귀에 힘을 줘서 머릴 부수려 했다.
박성원은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그의 배와 옆구리를 마구 걷어찼다.
하지만 황규진의 상체는 이전보다 훨씬 단단해져서 맞아도 멀쩡했다.
주룩.
박성원의 코와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그의 버둥거림도 서서히 멎어 갈 때쯤.
역병에 휩쓸려 쓰러졌던 서아린이 남은 힘을 쥐어짜 암기를 던졌다.
푹-!
암기는 황규진의 오른쪽 허벅지에 꽂혔다.
“크아악!”
황규진이 끔찍한 비명을 뱉어 내며 잡고 있던 박성원을 놓쳤다.
겨우 목숨을 건진 박성원은 쿨럭대며 바닥에 떨어진 창을 주워 들었다.
“…저 망할 년이!”
황규진은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서아린을 노려보며 아껴 뒀던 주문을 발동했다.
꾸물-!
가슴에 난 상처에서 붉은 실처럼 피가 쭉 뽑혀 나왔다.
“「블러드 베놈」!”
그는 자신의 피를 매개체로 써서 주문을 완성했다. 머리 위로 붉은 구체가 생겼다.
동시에 박성원의 창이 날아든다.
이번엔 확실히 죽이고자 머리를 노린다.
“이미 늦었어.”
황규진은 그를 비웃듯이 중얼대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허공에 생겨난 핏빛 구슬이 펑 터졌다.
* * *
“헉, 헉…….”
황규진은 가슴에 난 상처를 부여잡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박성원과 서아린은 역병에 완전히 잠식된 채 쓰러졌다.
둘 다 죽진 않았지만 저대로 놔두면 얼마 못 가서 숨이 멎을 터.
‘위험했다.’
고작 60레벨 플레이어들한테 비장의 주문까지 쓰게 될 줄이야.
‘저 녀석, 대체 정체가 뭐지?’
서아린은 그렇다 쳐도 박성원의 무력은 비정상적이었다.
게다가 착용한 아이템들도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았다.
‘뭔가 숨기고 있어.’
황규진은 중급 회복 포션을 꺼내 사용했다. 가슴팍에 난 구멍이 서서히 아물었다.
소모한 마력도 차츰 차오른다.
“쿨럭, 쿨럭…….”
“으…….”
“허, 벌써 정신을 차렸나?”
박성원과 서아린이 기침을 뱉으며 눈을 떴다.
그들의 끈질긴 생명력에 황규진은 경이로움마저 느꼈다.
‘좋은 생각이 났다.’
황규진은 인벤토리에서 치료제를 꺼냈다. 딱 하나만.
“살고 싶나? 이건 치료제다. 둘 중 한 명만 살려 주지. 누가 대신 희생할 건지 골라라.”
물론 진짜로 살려 줄 생각은 없었다.
그는 그저 같은 편끼리 추하게 싸워 대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의 추악한 속내를 알아챈 것일까.
서아린이 피식 웃었다.
그러자 황규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계집, 뭐가 웃기지?”
“힘들게 이겨 놓고 잘난 척, 여유로운 척하는 거 안 쪽팔려?”
그녀의 도발에 황규진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살려 달라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감히 저딴 소릴 지껄이다니.
황규진이 야수의 손으로 그녀의 머리채를 붙잡아 들어 올렸다.
“네년, 죽고 싶어서 환장했냐?”
황규진이 으르렁댔지만 그녀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쏘아봤다.
그 안에서 어떤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자 황규진이 역으로 당황했다.
‘뭐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다니.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황규진은 흥이 식었다. 싸움에서 이겼는데 어째 진 기분이었다.
그냥 둘 다 죽여 버려야겠다.
“…어?”
바닥에 엎어져 있던 박성원이 돌연 의아한 목소릴 냈다.
황규진이 그를 쳐다봤다.
온몸에 역병의 표식이 퍼져서 다 죽어 가는 주제에 활짝 웃고 있다.
얜 또 왜 저래?
황규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둘의 행동에 미칠 것 같았다.
“초감각의 경고가 사라졌어요.”
“그럼…….”
“도착했나 봐요.”
박성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타다닥-!
아래층에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황규진이 고갤 내린 순간.
쩌적! 퍼억-!
바닥이 부서지며 누군가가 솟구쳤다.
“……!”
퍼억-!
바닥을 부수고 올라온 남자가 황규진한테 발차기를 날렸다.
황규진은 들고 있던 서아린을 내팽개치고 황급히 야수의 팔로 막았다.
그의 몸이 쭉 밀렸다. 제대로 막았는데도 팔뚝이 저렸다.
박성원 못지않게 만만치 않은 놈이었다.
황규진이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넌 또 뭐냐!”
기습을 가했던 남자는 바닥에 쓰러진 서아린을 공주님처럼 안아 들었다.
그러자 서아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네, 아슬아슬했어요. 덕분에 목숨 하나 아꼈네요.”
“농담하는 거 보니 괜찮나 보네. 자, 마셔.”
정도현은 그녀의 손에 포션을 쥐여 줬다. 그 모습을 본 황규진이 비웃으며 말했다.
“포션 써 봤자 소용없다. 이미 역병에 잠식됐거든. 고통만 더 길어질 뿐이야.”
“역병?”
“감염자랑 접촉했으니 네놈도 곧 똑같은 꼴이 될 거다.”
정도현은 서아린과 박성원의 몸에 보라색 얼룩이 피어난 걸 확인했다.
길거리에 쓰러져 있던 시민들과 똑같은 증상이다.
다만 이 둘의 상태가 훨씬 심각했다.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 터.
“이거면 되겠지.”
“…응?”
정도현이 황금빛 물약을 꺼내 그녀의 입속에다 흘려 넣어 줬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 핀 얼룩들이 전부 사라졌다.
“뭐, 뭣……?!”
황규진은 경악했다.
치료제도 없이 역병을 고치다니, 말도 안 된다.
“네, 네놈! 방금 뭘 먹인 거냐!”
“넌 성원 씨 데리고 먼저 내려가.”
“…혼자 싸우게요?”
정도현은 황규진을 무시하고 황금빛 물약을 하나 더 꺼내 서아린한테 챙겨 줬다.
서아린은 그를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황규진의 역병 주문은 대인전에 너무 강력했다.
아무리 정도현이라도 역병이 퍼지면 오래 버티지 못할 터.
“빨리 가.”
정도현이 연거푸 말하자 서아린은 고갤 끄덕였다.
회복 포션과 엘릭서 덕에 움직이는 데 지장은 없었다.
마음 같아선 그와 함께 싸우고 싶었지만, 박성원을 치료하는 게 먼저였다.
“이 자식이 감히… 무시하지 마라!”
제대로 무시당한 황규진이 분노를 토해 냈다. 그의 몸에서 보랏빛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죽여 버리겠…….”
타앙-!
정도현이 땅을 박차며 달려든다.
박성원과 거의 맞먹는 움직임. 황규진이 기겁하며 야수의 팔을 휘둘렀다.
카가각!
검기와 마력으로 단단해진 주먹이 충돌했다.
정도현이 황규진을 상대하는 동안, 서아린은 박성원에게 엘릭서를 먹인 뒤 등에 업고 아래층으로 뛰었다.
“크윽!”
카가가각-!
정도현의 검이 교묘히 꺾이며 날아든다.
육탄전에 재능이 없는 황규진은 야수의 팔을 방패처럼 앞세워 칼날을 막아 내는 게 최선이었다.
‘어디 계속 날뛰어 봐라!’
하지만 황규진은 속으로 비웃었다.
놈이 귀신같이 검을 잘 다뤄도 역병이 퍼지면 끝이다.
그는 그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된다. 아까 그 연놈들을 놓친 게 아쉽긴 하지만.
“……?”
촤좍! 촤좌좍-!
정도현은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러 댔다.
속도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이상했다. 저렇게 움직이고 힘을 쓰려면 사람인 이상 숨을 내쉬어야 할 터인데.
‘왜 감염이 안 되지?’
역병 포자를 실시간으로 들이마시고 있는데 정도현의 피부는 말끔했다.
보랏빛 반점이 생길 기미가 안 보였다.
71레벨의 마법 저항력으론 이렇게 오래 견딜 리 없는데 말이다.
“죽어라!”
황규진은 초조해져서 역병의 주문을 마구 난사했다.
정도현은 그 주문들을 겁도 없이 칼로 쳐 냈다.
위력은 하급 주문이랑 다를 게 없는 수준이라 종잇장처럼 썰렸다.
하지만 역병 주문을 피하지 않고 저렇게 접촉하면 몸속으로 역병의 기운이 빠르게 퍼질 터.
‘그런데 왜!’
저리 멀쩡하단 말인가.
상대가 역병에 걸리지 않자 황규진은 악몽에 갇힌 기분이었다.
촤악-!
주문에다 마력을 너무 쏟아부은 탓에 야수의 팔의 경도가 약해졌다.
칼날이 푹 박히며 피가 튀었다.
뼈를 긁는 고통이 몸속에 퍼졌다.
“크아악! 이, 이건… 말도 안 돼!”
“뭐가 말이 안 되는데?”
“어째서 네놈은 역병에 안 걸리는 거냐!”
“아, 그거?”
정도현은 저승길 선물로 알려 줄까 하다가 고갤 저었다.
이 녀석이 뭘 잘했다고 알려 주는가.
하마터면 동료들을 잃을 뻔했는데.
“지옥에서 천천히 생각해 봐.”
정도현의 조롱에 황규진은 이를 갈며 비장의 주문을 발동했다.
여태껏 흘린 피가 허공으로 모여들더니 구체로 변했다.
“죽어라!”
「블러드 베놈」이 풍선처럼 터졌다.
역병의 마력이 녹아든 핏물이 정도현을 흠뻑 적셨다.
“에, 에취!”
정도현이 재채기를 몇 번 했다.
「블러드 베놈」의 효과는 그게 끝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