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늦은 새벽, D구역 어느 항구.
그곳에 탈옥수들을 태운 밀항선 한 척이 정박했다.
배에서 승객들이 하나둘 내렸다.
그런데 그들의 상태가 영 이상했다.
하나같이 술에 취한 것처럼 걸음걸이가 휘청댔고, 몸 곳곳엔 보랏빛 반점이 피었으며, 자꾸 마른기침을 해 댔다.
게다가 기침 속에 피가 섞여 나왔다.
꼭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 같았다.
“콜록, 콜록!”
“으으…….”
“야, 약속대로 치료제를 줘!”
탈옥수들은 가장 마지막에 내린 이를 쳐다보며 간절히 부탁했다.
깡마른 체격의 중년 남성.
그 남자는 열 명이 넘는 탈옥수들을 훑어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래, 약속이니 줘야지. 그런데 만들어 둔 치료제가 이거뿐이거든?”
“뭐, 뭐라고?”
남자는 조그만 약병을 꺼내 약 올리듯 살살 흔들어 보였다.
치료제가 하나뿐이란 말에 탈옥수들 표정이 굳었다.
남자는 그런 반응을 즐기며 사악하게 웃어 댔다.
“다들 이해했지?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최후의 한 명만 살아남는 거다.
남자가 그렇게 말하자 맨 앞에 있던 탈옥수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이 씨발 새끼가! 약속이랑 다르…….”
퍼억-!
욕설까지 뱉으며 항의하던 남자는 맥없이 무너졌다.
다른 탈옥수가 그의 뒤통수를 힘껏 내리찍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피를 쏟으며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게 신호탄이었다.
“죽어!”
“너나 뒈져!”
탈옥수들은 마구 치고받았다.
땅바닥에 피가 튀고 단말마가 울려 퍼진다.
사내는 그들의 싸움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했다.
이윽고 최후의 1인이 정해졌다.
사내는 그를 축하해 주며 박수를 쳤다.
“허억, 헉. 빠, 빨리 치료제 내놔…….”
탈옥수는 금방이라도 숨 넘어갈 것처럼 헐떡댔다.
몸에 있던 보랏빛 반점들은 어느새 목 위까지 번졌다.
남자는 그에게 약병을 건넸다.
그걸 허겁지겁 마시자 보랏빛 반점들이 서서히 옅어졌다.
“후…….”
호흡과 맥박도 점점 정상에 가까워졌다.
난 살았어. 탈옥수가 그리 생각했을 때.
“…윽!”
바닥에서 보랏빛 마력으로 만든 창이 솟구쳤다. 복부를 찔려 버린 탈옥수.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똑바로 서지 못한 채 비틀대다 털썩 주저앉았다.
“어, 째서……!”
탈옥수는 살려 준단 약속을 어긴 남자를 노려봤다.
그러자 흑마법사가 어깰 으쓱하며 말했다.
“치료제를 준다곤 했지만 살려 준다고는 안 했잖나?”
“망할, 개자식이…….”
같잖은 말장난에 탈옥수가 분개했다.
저놈의 면상을 후려치고 싶었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미 그의 몸속엔 역병의 기운이 스며들었으니까.
“끄, 끄어어억!”
탈옥수의 피부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아까 생긴 반점들보다 색이 훨씬 진했다.
푸확-!
그가 칠공분혈을 일으키며 죽었다.
과거 ‘역병술사’라 불렸고, 민간인을 천 명 가까이 죽인 흑마법사, ‘황규진’.
그도 탈옥하여 D구역에 발을 들였다.
* * *
“도현아, 이게 대체 뭐니?”
『와, 황금 사과다!』
정도현이 내민 황금빛 사과에 그의 할아버지, 최진영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열매였다.
정도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몸에 좋은 거예요.”
“정말 내가 먹어도 되는 거 맞니? 때깔이 좋은 게 엄청 귀한 아이템 같은데…….”
“전 이미 하나 먹었어요.”
그 말에 할아버지가 황금빛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보통의 사과처럼 과육이 단단한 줄 알았는데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부드러웠다.
할아버지는 정말 맛있다며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어깨 위에 앉아 있던 앵무새, 말랑이도 사과 맛이 궁금했는지 부리로 한입 콕 쪼아 먹었다. 그러더니 감탄했다.
『와! 이거 되게 맛있다!』
“정말 달구나.”
정도현은 할아버지가 황금빛 사과를 먹는 걸 흐뭇하게 바라봤다.
할아버지 말대로 저건 평범한 과일이 아니었다.
‘세계수의 열매.’
A구역, ‘낙원의 도시’에 거주하는 1급 시민만이 구경할 수 있는 희귀 아이템.
일반인이 먹으면 노화 속도가 느려져서 플레이어처럼 오랫동안 젊음을 유지할 수 있고 탈모를 포함해 온갖 질병과 유전병에서 해방된다.
‘할아버지의 노화를 막기엔 늦었지만, 더는 잔병 앓으실 일은 없겠지.’
세계수의 열매는 그가 70레벨이 되어 일주일에 두 개씩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세계수의 열매를 손에 넣자 가장 먼저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다른 파티에서 용병으로 일한다면서? 힘들지는 않고?”
“괜찮아요.”
“F구역 출신이라고 무시당하는 거 아니냐?”
“아니에요. 전부 착한 사람들이거든요.”
“정말 다행이구나.”
정도현은 저번에 죽였다 되살린 임시 파티원들과 몇 차례 더 던전을 공략했다.
그러니 할아버지가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이 막타도 양보해 줘서 요 며칠 사냥으로 얻은 경험치가 제법 짭짤했다.
이 기세면 곧 72레벨이 될 듯싶었다.
‘아주 순조로워.’
게다가 오늘은 서아린과 박성원이 D구역으로 올라온다.
드디어 박성원도 60레벨을 넘긴 것이다.
“그럼 전 가 볼게요.”
“그래, 몸조심하려무나.”
그들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거의 다 됐다.
슬슬 출발하지 않으면 약속 시각에 늦을 터.
정도현은 할아버지의 따스한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택시를 타고 이동 중일 때 누군가한테 전화가 왔다. 서아린이었다.
연락을 받자마자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로 넘어왔다.
[도현 씨, 큰일 났어요!]
“뭐야. 무슨 일인데?”
[그게… 성원 씨의 초감각이 발동했어요.]
“뭐?”
「초감각」은 누군가가 크게 다치거나 죽을 운명에 처할 때만 발동한다.
즉, 박성원 근처에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가 있단 뜻.
“누가 너희 둘을 노린 거야?”
[아니에요. 이 주변 일대가… 행인들이 전부 위험에 노출됐어요.]
“……!”
정도현은 어떻게 된 일인지 직감했다.
‘무차별 테러다.’
설마 해방단 짓인가?
하지만 그놈들 소행이면 D구역을 담당하는 간부, 한규리가 미리 알아채고 저번처럼 언질을 줬을 텐데.
‘한규리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아니면 해방단이 아닌 다른 존재나 조직이 테러를 벌이려는 걸까.
지금 중요한 건 범인이 누구인지가 아니다.
“당장 거기서 도망쳐.”
[그럼 시민들은요?]
“지부장님한테 얘기해서 그곳에 피난 경보 내리라 할게. 거기 어디야?”
[만나기로 한 기차역 근처예요.]
서아린이 대답한 순간.
수화기 너머로 사람들의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 * *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비가 뚝뚝 내렸다.
그런데 빗방울 색깔이 이상했다. 보랏빛이었다.
행인들이 하나둘 멈춰서서 의아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상공에 보랏빛 먹구름이 보였다.
“…쿨럭!”
“으, 으아악!”
비를 맞은 사람들이 갑자기 피를 토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흑마법사의 소행 같습니다, 서아린 씨.”
“범인부터 잡아야 해요.”
거대한 먹구름은 좀처럼 사라질 기미가 안 보였다.
이 근처에 분명 주문을 발동한 범인이 숨어 있을 터.
서아린은 허둥지둥 비를 피해 도망치는 시민들을 보며 범인을 잡자고 말했다.
박성원이 눈을 크게 떴다.
“저희 둘이서요?”
“도현 씨 기다릴 시간 없어요.”
비를 맞았던 시민들은 시름시름 앓더니 픽픽 쓰러졌다.
핏물을 토하고, 온몸에 보랏빛 얼룩이 곰팡이처럼 피었다.
접촉하면 병에 걸리는 저주 계통 주문 같았다.
이대로 놔두면 피해와 시민들의 혼란이 훨씬 커질 터.
위험하더라도 우리가 나서서 범인을 잡아야 한다.
서아린의 주장에 박성원도 고갤 끄덕였다.
“문제는 범인이 어디 숨었느냔 건데…….”
“저기 건물 보여요?”
“예?”
“저 위로 올라가서 살펴보죠.”
서아린은 주변을 둘러보다 가장 높다란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올라가면 범인이 어딨는지 알 수 있지 않겠어요?”
“아.”
박성원도 뒤늦게 이해했다.
「초감각」은 그의 시야가 닿는 곳까지 적용된다.
높은 곳에 올라서서 주위를 둘러보면 다른 지점보다 더 위험한 장소가 있으리라.
범인은 틀림없이 그곳에 있을 터.
“하지만 서아린 씨,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시죠?”
“예, 알고 있어요.”
「초감각」이 위험하다고 경고해 준다는 건 역으로 흑마법사한테 당할 가능성도 있단 뜻이다.
그걸 알면서도 서아린은 기꺼이 나섰다.
쓰러진 시민들한테서 투병 생활을 하셨던 어머니가 겹쳐 보였다.
그러니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범인을 빨리 찾아내 처치하면 저들을 살릴 수 있을지 모른다.
“성원 씨는 범인 위치만 알려 주고 빠지셔도 돼요.”
“어떻게 그럽니까!”
“전 여벌 목숨이 있으니 죽어도 괜찮지만 성원 씨는…….”
그는 이전에 한 번 부활해서 또 죽으면 끝이었다.
그녀가 그 부분을 짚자 박성원은 고갤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혼자 보낼 순 없습니다.”
“알겠어요. 대신 위험할 것 같으면 제가 시간을 끌어 볼게요. 혼자서라도 도망치세요.”
그녀도 이것만큼은 절대 양보 못 한다고 으름장을 놨다.
박성원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 * *
기차역 근처에 광역 주문 「죽음의 빗방울」을 사용한 역병술사, 황규진.
그는 옥상의 난간에 기대어 지상을 내려다봤다.
쏟아지는 비를 피해 개미처럼 발버둥 치는 사람들. 그 광경을 구경하던 황규진이 히죽댔다.
“도망쳐 봤자 소용없다.”
비를 피하더라도 토양과 대기가 서서히 오염될 것이다.
늦고 빠르고의 차이일 뿐.
저들은 역병의 주문에 한껏 괴로워하다 끝끝내 죽음을 맞이하리라.
그는 신이 되어 우매한 인간들을 심판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래서 내가 이 짓을 못 끊겠다니까.
삐이-!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들려왔다.
낄낄대던 그가 멈칫했다.
“…누구지?”
그는 관람을 위해 고층 빌딩 옥상에 올라와 있었다.
혹시 몰라서 아래층의 비상구 계단마다 알람 주문을 걸어 뒀다.
그런데 두 존재가 계단을 통해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속도로 봐선 플레이어가 틀림없다.
쿵-!
잠가 둔 문을 박차며 침입자들이 옥상에 도착했다.
61레벨의 여자와 60레벨 남자.
서아린과 박성원이었다.
[황규진] [LV.85]
황규진은 그 둘을 신기하단 눈으로 쳐다봤다.
“내가 여기 있단 건 어떻게 알고 왔지?”
물론 주문의 마력을 역추적하면 술사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을 터.
그가 주문을 발동한 지 아직 10분도 채 안 됐으니까.
게다가 저 둘은 딱 봐도 마법사가 아니었다.
그의 질문에 박성원이 질문으로 대답했다.
“왜 이딴 짓을 한 거냐!”
“이유? 그야… 재밌으니까.”
그의 답변에 박성원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황규진은 두 손을 옆으로 벌리며 사이비 교주처럼 말했다.
“강자가 약자를 짓밟고 빼앗는 건 당연한 권리다. 그 단순한 진리를 왜 이해 못 하지?”
“모든 것엔 적정선이란 게 있어! 네가 한 건 그저 무차별 학살이야.”
박성원이 창을 겨누며 반박하자 황규진은 지겹단 표정을 지었다.
마치 매번 듣는 잔소리를 접한 것처럼.
“법이니 사회 질서니 하는 건 누가 만들었지? 전부 약자들이 우릴 통제하고자 만든 거 아닌가. 강자가 약자의 지시에 따라야 할 이유가 어딨나?”
황규진은 그렇게 말하곤 수인을 맺었다.
그러자 상공에 있던 보랏빛 먹구름이 건물 옥상으로 내려왔다.
색깔만 빼고 보면 마치 산봉우리에 자욱이 깔린 안개 같았다.
박성원과 서아린은 숨을 흡 참았다.
육탄전과 심법을 익힌 이들에게 호흡을 방해하는 주문이라니.
‘상성이 좋지 않아.’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
서아린이 눈빛으로 그렇게 말했다.
박성원은 고갤 끄덕이며 힘차게 달려 나갔다.
그가 잔상을 남기며 일순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더니 황규진 눈앞으로 창날이 불쑥 나타났다.
“……!”
상대가 60레벨이라고 방심했던 황규진은 박성원의 움직임을 순간 놓쳤다.
카가각-!
미리 캐스팅해 둔 보호막이 그의 몸을 대신해 찢겨 나갔다.
“무슨……?!”
찌르기 한 방에 내 보호막이 너덜거리다니?
60레벨이 낼 만한 힘이 아니었다.
이 정도면 최소 80레벨 수준은 될 거다.
그 강함의 비결은 박성원의 개인 특성, 「정의집행」에 있었다.
상대의 킬 카운트에 비례해 능력치가 추가로 오르는 능력.
다만 민간인 살해는 킬 카운트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래도 황규진이 죽인 플레이어는 총 오십 명 이상.
그동안 쌓아 온 그의 업보가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역병의 사슬」!”
황규진이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마법진을 그렸다.
촤르륵-!
옥상 바닥에서 마력으로 짜인 사슬들이 솟아나 뱀처럼 덤벼들었다.
그것들은 박성원의 팔다리를 단단히 속박했다.
잡았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흡!”
콰드득-!
박성원이 마력 사슬을 힘으로 깨부쉈다. 엄청난 괴력에 황규진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 녀석, 대체 뭐야!’
「정의집행」의 존재를 몰랐던 황규진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정면 대결론 도저히 못 이긴다.
그렇게 판단한 황규진이 바닥에 주문을 발사했다.
콰과광!
옥상이 무너지며 박성원의 창이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셋은 그대로 아래층에 뚝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