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우오오오!”
콰가가가각-!
이광식이 울부짖으며 손톱을 휘두른다.
정도현은 거울처럼 상대의 움직임을 뒤쫓았다.
하지만 공격을 받아 낼수록 몸 곳곳에 흉터가 생겨났다.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능력치 차이 때문에 전부 다 막을 순 없었다.
‘급소만은 확실하게 피한다.’
파직! 파지직!
정도현도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뇌기를 머금은 검기, 천뢰격이 접촉할 때마다 벌레처럼 야금야금 이광식의 몸을 갉아 댔다.
“…쿨럭!”
맹렬히 공격을 퍼붓던 이광식이 멈칫하며 몇 걸음 물러났다.
뒤이어 입속에서 거무죽죽한 피가 쏟아졌다. 내상을 입혔다.
정도현은 상대가 비틀거리는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촤좌좌좍!
상대의 몸을 마구 베었다.
이광식은 복서처럼 가드를 올린 채 버텼다.
“허억, 헉…….”
둘 다 피투성이에 지쳐서 숨을 헐떡댔다. 이광식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젊은 놈이 강하구나. 아니면 요즘 것들은 다 이렇게 잘 싸우는 건가?”
무려 이십 년이나 흘렀다. 강산이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세월.
그가 알던 것보다 플레이어들의 수준이 확 올라간 걸지도 모른다.
모처럼의 팽팽한 결투에 이광식은 피가 끓어올랐다. 마치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이 싸움은 내가 이겼다.”
이광식은 몸에 묻은 피를 쓱 닦아 냈다.
정도현이 새겨 넣은 칼자국이 흐릿해졌다.
상처가 그새 아문 것이다.
“피를 흘리면서 싸우는 건 자살 행위지.”
둘의 실력은 엇비슷하지만 지혈할 수 없는 정도현이 먼저 지쳐 나가떨어질 터.
이광식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하지만 정도현의 표정은 큰 변화가 없었다.
“뭔 개나 소나 다 재생력이 있네.”
“…뭐?”
“아, 그쪽은 진짜 개였지?”
정도현의 시시껄렁한 농담에 이광식은 정색했다.
분명 유리한 건 자신일 텐데 왜 놈에게 말려드는 기분일까.
그가 원했던 반응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거나, 현실을 부정하며 길길이 날뛰는 거였다.
다채로운 반응을 보면서 죽이는 게 훨씬 재밌는데. 저런 태도는 마음에 안 들었다.
“…크르르릉!”
이광식의 표정이 악귀처럼 흉악하게 변했다. 이는 실험의 부작용이었다.
늑대인간의 마력을 주입한 이후로 그는 점차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고 충동적으로 변해 갔다.
어쩌면 그가 복수심에 완전히 사로잡힌 것도 마탑의 실험체가 된 탓일지 모른다.
물론 지금 와서야 그런 걸 따지는 건 아무 의미 없었다.
“숨통을 끊어 주마!”
쾅!
마음마저 괴물이 되어 버린 이광식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돌진했다.
거리가 충분히 좁혀졌을 때, 정도현은 마치 기다렸단 듯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걸 본 이광식이 움찔했다.
‘매직 스크롤?’
저 애송이가 저런 걸 쟁여 뒀을 줄이야.
가속도가 붙어서 방향을 틀기엔 늦었다.
그렇다면 살을 내어 주고 뼈를 취한다.
이광식은 놈의 주문에 얻어맞더라도 놈을 죽이기로 했다.
‘단숨에 목덜미를 물어뜯어 주마.’
파지지직!
정도현의 손바닥에서 붉은 전격이 솟구쳤다.
이광식은 곧 날아올 뇌전의 충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정도현은 전격 주문을 쏘지 않았다. 오히려 몸속으로 받아들였다.
“……!?”
콰지지지직-!
요란한 천둥소리. 천뢰격은 시뻘겋게 변했고 거의 두 배 가까이 길쭉해졌다.
방금 흡수한 주문을 검기에 덧댄 것이다.
그 놀라운 광경에 이광식은 순간 숨이 제대로 안 쉬어졌다.
그와 동시에 천뢰격이 그의 몸에 닿았다.
“끄어어억!”
터엉-!
이광식은 달려오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반대쪽으로 튕겨 날아갔다.
순간 정신을 잃을 만큼 강렬한 충격이 그를 덮쳤다.
쿠당탕탕-!
이광식은 물수제비 하듯 몇 번이고 땅바닥과 부딪히며 쭉 굴러갔다.
“끄, 끄어어…….”
십여 미터 넘게 날아갔던 그가 겨우 멈췄다.
상반신에는 시커멓게 탄 흉터가 새겨져 있다.
살점이 타는 역한 냄새가 솔솔 피어올랐다.
이광식의 몸이 서서히 줄어들고 전신의 체모도 짧아졌다. 잠시 뒤 변신이 풀렸다.
“…쿨럭!”
그를 일격에 제압한 정도현도 멀쩡하진 못했다.
손바닥부터 시작해 팔뚝까지 피부가 시커멓게 탔고 입속에선 피가 주룩 흘러나왔다.
만만찮은 내상을 입었다.
주문의 마력을 한계 이상으로 받아들였던 탓이다.
푹-!
정도현은 검을 지지대 삼아 일어섰다.
반면에 이광식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그는 바닥에 대자로 뻗은 채 실없이 웃었다.
“크, 흐흐…….”
자기보다 레벨이 한참 낮은 녀석한테 패배한 게 어이없는 모양.
정도현은 천천히 다가와 그의 목에 칼을 겨눴다. 그러자 이광식이 말했다.
“하늘도 참 야속하시지. 도와줄 거면 끝까지 도와주든가. 왜 이런 괴물이 나타나선…….”
“유언은?”
정도현은 사형수에게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줬다. 그러자 이광식이 힘없이 말했다.
“유태민 그놈한테 꼭 좀 전해 주겠나? 죽어서도 네놈을 저주한다고.”
이광식은 그 말을 끝으로 곱게 입을 다물었다. 더 할 얘긴 없어 보인다.
정도현은 깔끔하게 그의 목을 쳤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확실히 강적이었다. 20년이나 수용소에서 썩었는데도 이 정도라니.
그의 집념이 어느 정도였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한 번 더 죽일까?”
정도현은 경험치에 눈이 멀어 시도했다. 하지만 부활 아이템으론 그를 살릴 수가 없었다.
[해당 개체는 플레이어가 아닙니다.]
[몬스터는 되살릴 수 없습니다.]
시스템은 이광식을 몬스터로 간주했다.
아마 늑대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게 신체를 마개조해서 그런 모양이다.
“…윽!”
다 끝났단 생각에 긴장을 풀자마자 온몸이 쑤셨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거 당분간 요양해야겠는데.’
회복 포션도 심각한 내상이나 골병이 든 것까진 못 고치니까. 엘릭서면 또 모를까.
“아.”
그는 막 71레벨을 달성했다.
엘릭서의 구매 제한 레벨은 70. 곧장 구매했다.
황금빛 용액이 담긴 유리병이 그의 손에 들어왔다.
[엘릭서] [소모 아이템]
- 섭취 시, 걸려 있는 상태 이상이 해제됩니다.
- 일주일에 한 번만 사용 가능.
설명은 간단하지만 실로 강력한 성능이었다.
정도현은 곧장 코르크 마개를 뽑고 내용물을 쭉 들이켰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달달한 과일 주스 같았다.
[상태 이상, ‘마력 회로 손상’이 해제됩니다.]
몸속을 날카로운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한 통증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정도현은 편안해진 얼굴로 중급 포션을 꺼내려다 멈칫했다.
‘이제 상급 포션도 구매할 수 있지?’
그는 70레벨을 넘기면서 엘릭서를 비롯한 몇몇 상위 아이템들을 살 수 있게 됐다.
상급 포션이나 매직 스크롤 같은 것들 말이다. 정도현은 다친 김에 상급 포션도 구매했다.
“상급 포션부터는 무조건 마셔야 하나 보네.”
중급 포션은 손에 쥐고만 있어도 시스템의 힘을 통해 사용할 수 있었지만, 상급부터는 직접 복용해야만 한다고 적혀 있었다.
효과가 워낙 좋아서 시스템이 이런 제약을 붙여 둔 모양이다.
한 모금 마시자 여기저기 심하게 긁힌 상처들이 말끔히 아물었다.
피를 많이 흘려서 어지럽던 것도 이제 괜찮아졌다.
‘흘린 피까지 싹 다 재생해 주는 거야?’
과연. 중급 포션이랑은 비교도 안 될 만큼 효과가 좋았다.
기운을 차린 정도현은 시신과 잘린 머리를 수습해 주려 했다. 바로 그때.
다수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쾅-!
강한 충격과 함께 뚫린 벽. 그곳으로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폐공장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달빛 길드원과 팀장급 요원들이었다.
그들은 정도현과 범인의 시체를 번갈아 쳐다보곤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혼자서 끝냈다고?”
“분명 87레벨이라 하지 않았어?”
“그보다 힐러! 저 사람부터 빨리 치료해 줘!”
“그래, 전신이 피투성이잖아.”
범인이 죽어 있어서 다들 당황한 것도 잠시.
누군가의 외침에 달빛 길드의 힐러들이 부리나케 달려와 정도현을 살펴봤다.
“…어?”
“안 다쳤는데요?”
전신이 피범벅이라 당연히 크게 다친 줄 알았다. 그런데 그의 몸에는 생채기조차도 없었다.
힐러들까지 벙찐 가운데.
누군가가 인파를 헤집으며 불쑥 튀어나왔다.
“자네, 괜찮나?”
“예, 전 괜찮습니다. 길드장님.”
“후, 천만다행이군. 무모한 작전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도현을 걱정해 주며 다가온 건 달빛 길드장, 유태민이었다.
그는 정도현의 작전을 듣더니 너무 위험하다며 처음엔 반대했다.
그러나 아들을 살릴 방법이 이것뿐임을 알고선 어쩔 수 없이 협조했다.
“정말 고맙네. 큰 신세를 졌어.”
“아닙니다. 아드님 상태는 좀 괜찮습니까?”
“무사하네. 전부 자네 덕분이야.”
유태민은 아들을 구해 준 은인의 손을 꼭 붙잡으며 그렇게 말했다.
감사 인사를 끝마친 그는 이광식의 시신을 보곤 눈시울을 붉혔다.
“광식아, 미안하다. 전부 내 탓이야…….”
그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이광식의 머리를 수습해 주곤 자조적으로 중얼댔다.
둘 사이에 무언가 사연이 있어 보인다.
유태민은 눈물을 닦아 내곤 고갤 들었다.
“…혹시 광식이가 죽기 전에 남긴 말 같은 건 없었나?”
“예, 남겼습니다.”
죽어서도 저주하겠다. 그게 그의 유언이었다.
솔직하게 대답해 주려던 정도현은 유태민의 얼굴을 보곤 슬쩍 내용을 바꿨다.
“용서한다더군요. 뭘 용서한다는 건지 말은 안 해 줬지만.”
“…뭐?”
정도현의 말에 유태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용서. 그 단어가 머릿속에 윙윙 맴돈다.
잠시 뒤, 유태민은 서글프게 웃으며 말했다.
“…배려해 줘서 정말 고맙네.”
* * *
사건이 끝난 뒤, 유태민은 정도현을 따로 불러내 독대했다.
그는 옛날에 있었던 사건을 설명해 줬다.
“이광식 씨의 아내가 던전에서 사고로 돌아가셨었군요.”
“그렇네. 내 고집 탓이었지.”
유태민은 씁쓸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그가 이끌었던 공략대는 유적형 던전을 탐사하던 중 숨겨진 통로를 발견했다.
그는 안쪽에 대단한 아이템이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고 여겼다. 그래서 길드원들을 설득해 진입했다.
그러다 한 길드원의 실수로 함정 장치를 건드렸다.
실수했던 건 그가 아니라 길드원이었지만, 유태민이 들어가자고 얘기하지 않았으면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끔찍했던 그날의 참극을 떠올리자 유태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넨 강하네, 나이도 아직 젊고. 하지만 던전에선 절대 욕심을 부리거나 오만해져선 안 되네. 그 말을 꼭 해 주고 싶었어.”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유태민은 슬픈 눈빛을 지우고 궁금한 걸 물었다.
“자넨 아직 길드에 가입하지 않았던데,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레벨을 빠르게 올리고 싶어섭니다.”
“혹시 C구역으로 올라가려는 건가?”
“예.”
정도현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유태민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F구역 출신이라 들었네.”
“그렇습니다.”
“솔직히 여기까지 올라온 것도 엄청난 기적이지. 게다가 플레이어가 된 지 반년도 채 안 됐는데 말일세.”
유태민이 그렇게 말하자 정도현은 고갤 갸웃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다.
그의 의아한 눈빛을 읽었는지 유태민이 본론을 꺼냈다.
“자네라면 올해 안에 80레벨을 달성하고 C구역에 입성하겠지.”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곳은 상상 이상으로 넓고 거대하네. C구역엔 지부장만 다섯이야.”
“예, 들어 본 적 있습니다.”
C구역은 동, 서, 남, 북 그리고 중앙 지역까지 이렇게 다섯 구역으로 나눠서 다스린다 들었다.
각각의 구역이 D구역과 맞먹는다.
그러니 지부장도 한 명으론 부족했다.
D구역의 3대 길드도 C구역 길드와 비교하면 평균 수준에 불과했다.
“나도 소싯적에 C구역에 올라갔었네. 적응 못 하고 금방 도망쳤지만. 물론 자넨 다를지 몰라도, 위험하고 힘든 길인 건 마찬가지일 걸세.”
정도현도 그 부분은 순순히 인정했다.
이광식과 싸워 보고 확실히 깨달았다.
자신은 아직 한참 부족하단 걸.
서론을 끝낸 유태민이 몸을 앞쪽으로 기울였다.
“자네, 혹시 내 뒤를 이어 볼 생각 없나?”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부끄럽지만 달빛 길드엔 날 대체할 만한 인재가 없네.”
달빛 길드는 서서히 저무는 해였다.
유태민은 나이를 많이 먹어서 전성기 시절보다 훨씬 약해졌다.
물론 아직까진 3대 길드장 자릴 공고히 지키고 있다지만 내려오는 것도 결국 시간문제였다.
“오륙 년 안에 은퇴할 예정이네. 그런데 여태 후계를 못 정했거든. 자네라면 능히 해낼 것 같단 확신이 들었네.”
“그 말씀은…….”
“C구역에 올라가지 말고 달빛 길드를 이끌어 볼 생각 없나?”
“없는데요? 죄송합니다.”
“…….”
정도현이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자 유태민이 울상을 지었다.
평생을 바쳐 애지중지 키워 온 길드인데 이렇게 까이니 자괴감이 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