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D구역에서 벌어진 무차별 살인 사건.
관리국은 해방단이 벌인 테러로 공표했지만, 믿지 않는 자들이 더 많았다.
윗선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범인을 잡아내라고 성화였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D구역 지부장은 각 지역을 담당하던 팀장급 요원들을 소집했다.
“젠장, 고작 한 놈이잖아. 그거 하나 못 잡고 검문소까지 뚫려 버린 게 말이나 돼!”
팀장급들은 감히 고갤 들지 못했다.
그러자 군복 차림의 D구역 지부장, ‘강민겸’이 씩씩대며 윽박질렀다.
“못 잡으면 우리 모두 끝장이야. 한 명씩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견 내 봐.”
“우선 E구역 지부장한테 말해서 봉쇄령을 내리는 게…….”
“E구역을 봉쇄하면 뭐? D구역 검문소를 뚫은 놈인데 E구역이라고 뭐 다르겠냐? 생각을 좀 하고 말해!”
말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은 팀장급 요원이 식은땀을 흘렸다.
다들 이런저런 의견을 내 봤지만 뾰족한 수단은 없었다.
강민겸 지부장이 답답함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오, 이 무능한 새끼들…….”
다들 눈만 뒤룩뒤룩 굴리며 눈치를 살필 때,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었다.
“오, 한 팀장. 뭐 좋은 의견이라도 있나?”
“지부장님, 이번 사건은 최대한 빠르고 조용히 처리해야만 합니다. 봉쇄령 같은 액션을 취하면 언론이 냄새를 맡고 진상을 파헤치려 들겠죠.”
“그래.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여기서 일을 더 키우면 윗분들한테 대차게 까일 거라고.”
“그러니 소수 정예로 팀을 꾸려 보내 주시죠.”
“…소수 정예?”
“예, E구역 지부장의 지원을 받는다면 반드시 잡을 수 있습니다. 이번 참상은 저희가 미처 몰라서 벌어진 불상사입니다. 놈의 존재를 알았더라면 이렇게까진 되지 않았겠죠.”
“흐음, 그건 그렇지.”
한 팀장의 말에 강민겸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래, 우리가 무능한 게 아니다. 방심해서 당한 거야.
그렇게 합리화하니 그의 마음도 조금 가벼워졌다.
“그럼 이번 작전은 한 팀장이 맡아 주겠나?”
“물론입니다.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었습니다.”
“역시 아카데미 출신이라 그런지 다르구만. 아주 듬직해! 내 자네만 믿겠네.”
한 팀장이 알아서 총대를 메 주자 다른 팀장들은 내심 안도했다.
이번 사태를 잘 수습한다면 지부장의 두터운 신임을 얻겠지만, 만약 실패했다간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야말로 독이 든 성배나 다름없었다.
‘실적에 미쳤다더니…….’
‘역시 소문대로네.’
‘한은성’ 팀장. 그는 D구역 관리국에서 제법 유명했다.
본인보다는 형쪽의 지분이 더 컸지만.
한은성의 형은 D구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파도 길드의 간부였다.
잘나가는 형이 있으니 이것저것 비교당했고 그래서인지 그는 공을 세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번 사건을 자진해서 맡은 것도 분명 그런 이유이리라.
* * *
한은성은 직접 선발한 정예 요원들을 데리고 E구역에 내려왔다.
안태환 지부장이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한은성] [LV.72]
“한은성 팀장입니다. 또 뵙는군요, 지부장님.”
마약 사범으로 체포한 장현민을 호송해 간 것도 한은성이었다.
이번엔 E구역으로 도망친 흉악범을 쫓아왔다.
‘타구역까지 동분서주하는 팀장은 드문데.’
한은성에 대한 정보를 조사해 봤다.
그의 형, ‘한은철’은 D구역에서 명망 높은 길드 소속이다.
반면에 동생은 관리국에 몸담고 있다.
아무래도 관리국 요원보다는 중견급 길드를 더 높이 쳐준다.
‘보아하니 공을 세우는 데 급급한 모양이군. 형한테 자격지심이라도 느끼는 건가?’
안태환은 한은성이 어떤 인물인지 단숨에 파악했다.
다행이었다. 저쪽에서 적극적으로 범인 수색에 임해 준다면 이쪽은 옆에서 적당히 도와주기만 하면 될 터.
“CCTV에 찍힌 범인은 장검을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검사란 소리군. 레벨은 확인됐나?”
“아뇨, 목격자 중에 생존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피해자들 시신에서 이상한 부분을 찾아냈습니다.”
“…이상한 부분?”
“피부 군데군데에 시커먼 화상 자국이 남았습니다.”
“검에 화염 주문이 담긴 건가. 그럼 까다롭겠군.”
“화염이 아닙니다. 부검 결과 감전당한 흔적이라더군요.”
“감전? 전격 주문이 담긴 검이란 건가?”
전격 주문은 익히기 어려운 대신 강한 위력과 빠른 속도를 자랑한다.
그래서 전격 주문을 다룰 줄 아는 마법사들이 훨씬 좋은 대우를 받는다.
그런 전격 주문이 검에 깃들었다니.
근접 무기 중에 그보다 더 위협적인 건 찾기 힘들 것이다.
욕심이 절로 났다. 안태환의 눈빛을 읽은 한은성이 바로 선을 그었다.
“범인과 무기는 저희가 회수해 갈 겁니다.”
“크흠, 물론이네.”
안태환은 무안해서 헛기침을 뱉었다.
한은성은 그와 작전을 논하면서 신신당부했다.
“녀석이 F구역으로 도망치면 더더욱 잡기 어려워집니다. 그러니 여기서 꼭 승부를 봐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수색에 필요한 자원과 인력은 아낌없이 지원하지.”
“어중이떠중이들이 나서 봤자 사상자만 더 늘겠죠.”
“크흠…….”
한은성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E구역 요원은 30에서 40레벨대가 대부분. 팀장급도 50레벨에 미치지 못한다.
반면에 범인은 D구역에서 내려왔다.
그렇다면 최소 60레벨은 넘는다는 뜻.
실제로 D구역에서 사망한 플레이어들의 평균 레벨이 60레벨 중반인 걸 보면 범인도 최소 그쯤은 될 것이다.
“50레벨이 넘는 자들로 용병을 구해 주시죠. 단, 최대한 빠르고 조용히.”
“그 정도 레벨대 플레이어는 단시간에 구하기 힘드네.”
“암흑가에 많지 않습니까?”
“…레드 플레이어를 고용하자고?”
안태환의 눈썹이 꿈틀했다.
한은성은 뭐가 문제냐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어차피 죽어도 상관없는 놈들입니다. 전기 내성을 올려 주는 비약을 지원해 주면 고기 방패로 적당히 써먹을 수 있겠죠.”
“난 그놈들과 거래하고 싶지 않네.”
“지부장님, 뭔가 착각하신 것 같은데…….”
한은성이 차갑게 웃으며 다릴 척 꼬았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전 강민겸 지부장님 대행으로 여기에 온 겁니다.”
“…….”
“제 말이 곧 지부장님의 지시란 걸 명심하십시오.”
“…알겠네. 최대한 빨리 구해 보지.”
안태환이 체념하고 물러나자, 한은성은 흡족한 미소를 머금고서 일어났다.
그가 나가자 안태환이 짜증 섞인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레드 플레이어. 그 쓰레기들한테 손을 벌릴 줄이야.”
그는 수십 년 전 일이 떠올랐다.
그가 젊었던 시절엔 레드 플레이어와 관리국이 반목하고 무력을 통해 대립했었다.
E구역도 중앙 지역을 제외하면 F구역 못지않은 무법 지대던 시절.
그의 부모님은 레드 플레이어들 손에 무참히 살해당했다.
동기는 단순했다.
안태환이 관리국 요원이었고 그중 유망주였으니까.
지금은 E구역도 최소한의 치안과 질서가 잡혀서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그땐 그랬었다.
‘내 손으로만 백 명 넘게 죽였지.’
부모님을 잃고 복수심에 불탔던 그는 레드 플레이어를 소탕하는 작전에 제 몸을 내던졌다.
그때의 공로를 인정받아 간부직이 되었고 이제 지부장 자리까지 올랐다.
당시에는 요원이 된 걸 후회했었다.
자신 때문에 부모님이 죽었다고 자책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잘못된 건 레드 플레이어라고.
복수하든 안 하든 후회할 거라면 차라리 복수하기로 결심했었다.
그놈들이 다시는 날뛰지 못하게 E구역을 바꾸고 싶었다.
단지 그 일념 하나로 여기까지 올라왔다.
“괜찮으십니까, 지부장님?”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뭐. 암흑가에서 쓸 만한 놈들로 구해 봐.”
“예.”
민규원은 안태환의 과거를 잘 알고 있기에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레드 플레이어를 병적으로 증오하는 그가 그들의 힘을 청한다니. 착잡한 심정이겠지.
“아, 그 녀석한테도 한 번 연락해 봐.”
“정도현 말씀이시죠?”
“그래. 그 녀석만큼 실력 확실한 녀석이 또 어딨겠어.”
* * *
정도현은 안태환의 의뢰를 받아들였다.
위험하지만 거절하기엔 너무 큰 액수였다.
할아버지와 송 씨 부자를 D구역으로 이주시키려면 돈이 아주 많이 필요했으니까.
던전 공략으로 벌어들이는 수입만으론 부족했다.
“D구역에서 스무 명 넘게 죽이고 도망쳤다니. 간도 크네요.”
“그러게. 왜 그런 짓을 했을까.”
“글쎄요, 강력한 무기를 얻어서 한번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이번에도 그와 함께 고용된 서아린.
그녀의 추측에 정도현은 고갤 저었다.
“아무리 성능을 확인해 보고 싶었어도 너무 극단적이야. 무차별적으로 죽일 필요가 있을까?”
“하긴, 그것도 그러네요. 그럼 개인적인 복수는 아닐까요?”
“희생자들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도 없었대. 그냥 눈에 띄는 사람을 죽인 거지.”
“그럼 그냥 미친놈이겠죠.”
서아린은 범인의 목적이나 살해 동기엔 별 관심 없었다.
그보단 자신과 정도현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박수무당 씨는 좋겠어요. 위험하니 열외도 시켜 주고.”
안태환은 이번 작전에서 박성원을 제외했다.
만에 하나라도 그를 투입했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안태환 입장에선 뼈아픈 손실이었으니까.
정도현 일행은 그 대타로 투입된 셈이다.
“왔다.”
관리국이 보낸 운송용 차량이 두 사람 앞에 멈춰 섰다.
정도현과 서아린이 탑승하자, 요원과 용병으로 고용된 플레이어들이 빼곡히 앉아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72레벨의 젊은 사내, 한은성.
저 남자가 이번 작전을 지휘할 D구역 요원일 터.
“만나서 반갑습니다, 한은성 팀장입니다.”
한은성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둘에게 인사했다.
D구역 출신이라길래 잘난 체하거나 무시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친절했다.
“정도현입니다.”
“서아린이에요.”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한은성이 작전을 설명했다.
“어젯밤에 남동쪽 구역 암흑가에서 피해자가 몇 발생했습니다. 오늘 밤 안에 녀석을 찾아내 사살해야 합니다.”
한은성의 목소리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십 명을 죽인 흉악범을 상대하는데도 전혀 두렵지 않은 모양이다.
“여러분들이 해 줘야 할 건 놈의 위치를 찾아내고, 최대한 발목을 붙잡아 주시는 겁니다. 전기 내성을 올려 주는 비약을 나눠 줄 테니, 놈과 마주치면 곧장 사용하세요.”
““예.””
한은성은 그렇게 말하곤 모두에게 하급 전기 내성 비약을 건넸다.
물론 정도현은 이미 수백 개나 갖고 있는 거라 굳이 받을 필욘 없었다.
그래도 호의를 무시할 순 없으니 일단 챙겼다.
‘중급 내성 비약도 수십 개 정도 있는데.’
나중에 서아린한테 따로 챙겨 줘야겠군. 정도현이 그런 생각을 할 때.
옆에 있던 서아린이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왜 두 개죠?”
“제 것도 드렸습니다. 전 필요 없거든요.”
“아, 네…….”
한은성은 그녀에게 자신의 내성 비약까지 건네줬다.
노골적인 호의 표시에 서아린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의 관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은성은 그녀에게 사적인 질문이나 이야기를 해 댔다.
자신이 아카데미 출신인 것과 집안의 재력이 꽤 상당하단 걸 어필했다.
서아린은 별로 안 궁금하다고 톡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행여나 정도현이 곤란해질까 꾹 참았다.
‘왜 친절한가 했더니 서아린 때문이었나.’
아무래도 한은성은 김태양처럼 여자를 밝히는 것 같았다.
* * *
암흑가에 도착한 요원과 용병들.
그들은 각자 맡기로 한 구역으로 흩어지고자 팀을 구성했다.
범인의 인상착의와 얼굴은 이곳 CCTV에 찍힌 영상으로 확인했으니 마주치기만 하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서아린 양은 수색조 말고 저희 본대랑 함께 대기하시죠.”
“…예? 전 정도현 씨랑 함께 움직이기로 했는데요?”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한은성이 정도현을 흘끗 보곤 그렇게 말했다.
아예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놔주질 않았다.
제 딴엔 그녀를 챙겨 주고 점수를 따내려는 것 같았다.
서아린이 그의 손을 떨치려 할 때, 옆에 있던 정도현이 불쑥 끼어들었다.
“한 팀장님, 저희 임무는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 너무 신경 안 써 주셔도 됩니다.”
“…뭐라고?”
정도현의 돌직구에 한은성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정도현을 노려보며 말했다.
“57레벨… 뭐, 그 정도면 E구역에선 어깨 좀 펴고 다닐 만하지. 그런데 이번 범인은 D구역 출신이야. 너랑은 급이 다르다고.”
정도현과 한은성.
서아린이 둘 중 누구 곁에 있는 게 안전할지는 굳이 대 볼 필요도 없었다.
한은성의 주장에 정도현은 속으로 성가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떤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그렇다고 자기 여자를 다른 남자한테 맡길 순 없잖습니까.”
“뭐, 뭐?”
“안 그러냐, 서아린?”
“…예?”
정도현이 서아린의 어깨를 한 손으로 붙잡고 확 끌어당겼다.
졸지에 그의 가슴팍에 안긴 그녀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맞아요. 저희 사귀는 사이에요.”
서아린이 그에게 엉겨 붙으며 자연스레 연기를 받아 줬다.
그녀의 진심이 담겨 있어선지 누가 봐도 연인 사이 같았다.
정도현도 순간 그랬었나 착각할 정도였다.
54화
D구역에서 벌어진 무차별 살인 사건.
관리국은 해방단이 벌인 테러로 공표했지만, 믿지 않는 자들이 더 많았다.
윗선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범인을 잡아내라고 성화였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D구역 지부장은 각 지역을 담당하던 팀장급 요원들을 소집했다.
“젠장, 고작 한 놈이잖아. 그거 하나 못 잡고 검문소까지 뚫려 버린 게 말이나 돼!”
팀장급들은 감히 고갤 들지 못했다.
그러자 군복 차림의 D구역 지부장, ‘강민겸’이 씩씩대며 윽박질렀다.
“못 잡으면 우리 모두 끝장이야. 한 명씩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견 내 봐.”
“우선 E구역 지부장한테 말해서 봉쇄령을 내리는 게…….”
“E구역을 봉쇄하면 뭐? D구역 검문소를 뚫은 놈인데 E구역이라고 뭐 다르겠냐? 생각을 좀 하고 말해!”
말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은 팀장급 요원이 식은땀을 흘렸다.
다들 이런저런 의견을 내 봤지만 뾰족한 수단은 없었다.
강민겸 지부장이 답답함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오, 이 무능한 새끼들…….”
다들 눈만 뒤룩뒤룩 굴리며 눈치를 살필 때,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었다.
“오, 한 팀장. 뭐 좋은 의견이라도 있나?”
“지부장님, 이번 사건은 최대한 빠르고 조용히 처리해야만 합니다. 봉쇄령 같은 액션을 취하면 언론이 냄새를 맡고 진상을 파헤치려 들겠죠.”
“그래.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여기서 일을 더 키우면 윗분들한테 대차게 까일 거라고.”
“그러니 소수 정예로 팀을 꾸려 보내 주시죠.”
“…소수 정예?”
“예, E구역 지부장의 지원을 받는다면 반드시 잡을 수 있습니다. 이번 참상은 저희가 미처 몰라서 벌어진 불상사입니다. 놈의 존재를 알았더라면 이렇게까진 되지 않았겠죠.”
“흐음, 그건 그렇지.”
한 팀장의 말에 강민겸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래, 우리가 무능한 게 아니다. 방심해서 당한 거야.
그렇게 합리화하니 그의 마음도 조금 가벼워졌다.
“그럼 이번 작전은 한 팀장이 맡아 주겠나?”
“물론입니다.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었습니다.”
“역시 아카데미 출신이라 그런지 다르구만. 아주 듬직해! 내 자네만 믿겠네.”
한 팀장이 알아서 총대를 메 주자 다른 팀장들은 내심 안도했다.
이번 사태를 잘 수습한다면 지부장의 두터운 신임을 얻겠지만, 만약 실패했다간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야말로 독이 든 성배나 다름없었다.
‘실적에 미쳤다더니…….’
‘역시 소문대로네.’
‘한은성’ 팀장. 그는 D구역 관리국에서 제법 유명했다.
본인보다는 형쪽의 지분이 더 컸지만.
한은성의 형은 D구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파도 길드의 간부였다.
잘나가는 형이 있으니 이것저것 비교당했고 그래서인지 그는 공을 세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번 사건을 자진해서 맡은 것도 분명 그런 이유이리라.
* * *
한은성은 직접 선발한 정예 요원들을 데리고 E구역에 내려왔다.
안태환 지부장이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한은성] [LV.72]
“한은성 팀장입니다. 또 뵙는군요, 지부장님.”
마약 사범으로 체포한 장현민을 호송해 간 것도 한은성이었다.
이번엔 E구역으로 도망친 흉악범을 쫓아왔다.
‘타구역까지 동분서주하는 팀장은 드문데.’
한은성에 대한 정보를 조사해 봤다.
그의 형, ‘한은철’은 D구역에서 명망 높은 길드 소속이다.
반면에 동생은 관리국에 몸담고 있다.
아무래도 관리국 요원보다는 중견급 길드를 더 높이 쳐준다.
‘보아하니 공을 세우는 데 급급한 모양이군. 형한테 자격지심이라도 느끼는 건가?’
안태환은 한은성이 어떤 인물인지 단숨에 파악했다.
다행이었다. 저쪽에서 적극적으로 범인 수색에 임해 준다면 이쪽은 옆에서 적당히 도와주기만 하면 될 터.
“CCTV에 찍힌 범인은 장검을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검사란 소리군. 레벨은 확인됐나?”
“아뇨, 목격자 중에 생존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피해자들 시신에서 이상한 부분을 찾아냈습니다.”
“…이상한 부분?”
“피부 군데군데에 시커먼 화상 자국이 남았습니다.”
“검에 화염 주문이 담긴 건가. 그럼 까다롭겠군.”
“화염이 아닙니다. 부검 결과 감전당한 흔적이라더군요.”
“감전? 전격 주문이 담긴 검이란 건가?”
전격 주문은 익히기 어려운 대신 강한 위력과 빠른 속도를 자랑한다.
그래서 전격 주문을 다룰 줄 아는 마법사들이 훨씬 좋은 대우를 받는다.
그런 전격 주문이 검에 깃들었다니.
근접 무기 중에 그보다 더 위협적인 건 찾기 힘들 것이다.
욕심이 절로 났다. 안태환의 눈빛을 읽은 한은성이 바로 선을 그었다.
“범인과 무기는 저희가 회수해 갈 겁니다.”
“크흠, 물론이네.”
안태환은 무안해서 헛기침을 뱉었다.
한은성은 그와 작전을 논하면서 신신당부했다.
“녀석이 F구역으로 도망치면 더더욱 잡기 어려워집니다. 그러니 여기서 꼭 승부를 봐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수색에 필요한 자원과 인력은 아낌없이 지원하지.”
“어중이떠중이들이 나서 봤자 사상자만 더 늘겠죠.”
“크흠…….”
한은성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E구역 요원은 30에서 40레벨대가 대부분. 팀장급도 50레벨에 미치지 못한다.
반면에 범인은 D구역에서 내려왔다.
그렇다면 최소 60레벨은 넘는다는 뜻.
실제로 D구역에서 사망한 플레이어들의 평균 레벨이 60레벨 중반인 걸 보면 범인도 최소 그쯤은 될 것이다.
“50레벨이 넘는 자들로 용병을 구해 주시죠. 단, 최대한 빠르고 조용히.”
“그 정도 레벨대 플레이어는 단시간에 구하기 힘드네.”
“암흑가에 많지 않습니까?”
“…레드 플레이어를 고용하자고?”
안태환의 눈썹이 꿈틀했다.
한은성은 뭐가 문제냐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어차피 죽어도 상관없는 놈들입니다. 전기 내성을 올려 주는 비약을 지원해 주면 고기 방패로 적당히 써먹을 수 있겠죠.”
“난 그놈들과 거래하고 싶지 않네.”
“지부장님, 뭔가 착각하신 것 같은데…….”
한은성이 차갑게 웃으며 다릴 척 꼬았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전 강민겸 지부장님 대행으로 여기에 온 겁니다.”
“…….”
“제 말이 곧 지부장님의 지시란 걸 명심하십시오.”
“…알겠네. 최대한 빨리 구해 보지.”
안태환이 체념하고 물러나자, 한은성은 흡족한 미소를 머금고서 일어났다.
그가 나가자 안태환이 짜증 섞인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레드 플레이어. 그 쓰레기들한테 손을 벌릴 줄이야.”
그는 수십 년 전 일이 떠올랐다.
그가 젊었던 시절엔 레드 플레이어와 관리국이 반목하고 무력을 통해 대립했었다.
E구역도 중앙 지역을 제외하면 F구역 못지않은 무법 지대던 시절.
그의 부모님은 레드 플레이어들 손에 무참히 살해당했다.
동기는 단순했다.
안태환이 관리국 요원이었고 그중 유망주였으니까.
지금은 E구역도 최소한의 치안과 질서가 잡혀서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그땐 그랬었다.
‘내 손으로만 백 명 넘게 죽였지.’
부모님을 잃고 복수심에 불탔던 그는 레드 플레이어를 소탕하는 작전에 제 몸을 내던졌다.
그때의 공로를 인정받아 간부직이 되었고 이제 지부장 자리까지 올랐다.
당시에는 요원이 된 걸 후회했었다.
자신 때문에 부모님이 죽었다고 자책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잘못된 건 레드 플레이어라고.
복수하든 안 하든 후회할 거라면 차라리 복수하기로 결심했었다.
그놈들이 다시는 날뛰지 못하게 E구역을 바꾸고 싶었다.
단지 그 일념 하나로 여기까지 올라왔다.
“괜찮으십니까, 지부장님?”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뭐. 암흑가에서 쓸 만한 놈들로 구해 봐.”
“예.”
민규원은 안태환의 과거를 잘 알고 있기에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레드 플레이어를 병적으로 증오하는 그가 그들의 힘을 청한다니. 착잡한 심정이겠지.
“아, 그 녀석한테도 한 번 연락해 봐.”
“정도현 말씀이시죠?”
“그래. 그 녀석만큼 실력 확실한 녀석이 또 어딨겠어.”
* * *
정도현은 안태환의 의뢰를 받아들였다.
위험하지만 거절하기엔 너무 큰 액수였다.
할아버지와 송 씨 부자를 D구역으로 이주시키려면 돈이 아주 많이 필요했으니까.
던전 공략으로 벌어들이는 수입만으론 부족했다.
“D구역에서 스무 명 넘게 죽이고 도망쳤다니. 간도 크네요.”
“그러게. 왜 그런 짓을 했을까.”
“글쎄요, 강력한 무기를 얻어서 한번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이번에도 그와 함께 고용된 서아린.
그녀의 추측에 정도현은 고갤 저었다.
“아무리 성능을 확인해 보고 싶었어도 너무 극단적이야. 무차별적으로 죽일 필요가 있을까?”
“하긴, 그것도 그러네요. 그럼 개인적인 복수는 아닐까요?”
“희생자들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도 없었대. 그냥 눈에 띄는 사람을 죽인 거지.”
“그럼 그냥 미친놈이겠죠.”
서아린은 범인의 목적이나 살해 동기엔 별 관심 없었다.
그보단 자신과 정도현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박수무당 씨는 좋겠어요. 위험하니 열외도 시켜 주고.”
안태환은 이번 작전에서 박성원을 제외했다.
만에 하나라도 그를 투입했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안태환 입장에선 뼈아픈 손실이었으니까.
정도현 일행은 그 대타로 투입된 셈이다.
“왔다.”
관리국이 보낸 운송용 차량이 두 사람 앞에 멈춰 섰다.
정도현과 서아린이 탑승하자, 요원과 용병으로 고용된 플레이어들이 빼곡히 앉아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72레벨의 젊은 사내, 한은성.
저 남자가 이번 작전을 지휘할 D구역 요원일 터.
“만나서 반갑습니다, 한은성 팀장입니다.”
한은성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둘에게 인사했다.
D구역 출신이라길래 잘난 체하거나 무시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친절했다.
“정도현입니다.”
“서아린이에요.”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한은성이 작전을 설명했다.
“어젯밤에 남동쪽 구역 암흑가에서 피해자가 몇 발생했습니다. 오늘 밤 안에 녀석을 찾아내 사살해야 합니다.”
한은성의 목소리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십 명을 죽인 흉악범을 상대하는데도 전혀 두렵지 않은 모양이다.
“여러분들이 해 줘야 할 건 놈의 위치를 찾아내고, 최대한 발목을 붙잡아 주시는 겁니다. 전기 내성을 올려 주는 비약을 나눠 줄 테니, 놈과 마주치면 곧장 사용하세요.”
““예.””
한은성은 그렇게 말하곤 모두에게 하급 전기 내성 비약을 건넸다.
물론 정도현은 이미 수백 개나 갖고 있는 거라 굳이 받을 필욘 없었다.
그래도 호의를 무시할 순 없으니 일단 챙겼다.
‘중급 내성 비약도 수십 개 정도 있는데.’
나중에 서아린한테 따로 챙겨 줘야겠군. 정도현이 그런 생각을 할 때.
옆에 있던 서아린이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왜 두 개죠?”
“제 것도 드렸습니다. 전 필요 없거든요.”
“아, 네…….”
한은성은 그녀에게 자신의 내성 비약까지 건네줬다.
노골적인 호의 표시에 서아린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의 관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은성은 그녀에게 사적인 질문이나 이야기를 해 댔다.
자신이 아카데미 출신인 것과 집안의 재력이 꽤 상당하단 걸 어필했다.
서아린은 별로 안 궁금하다고 톡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행여나 정도현이 곤란해질까 꾹 참았다.
‘왜 친절한가 했더니 서아린 때문이었나.’
아무래도 한은성은 김태양처럼 여자를 밝히는 것 같았다.
* * *
암흑가에 도착한 요원과 용병들.
그들은 각자 맡기로 한 구역으로 흩어지고자 팀을 구성했다.
범인의 인상착의와 얼굴은 이곳 CCTV에 찍힌 영상으로 확인했으니 마주치기만 하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서아린 양은 수색조 말고 저희 본대랑 함께 대기하시죠.”
“…예? 전 정도현 씨랑 함께 움직이기로 했는데요?”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한은성이 정도현을 흘끗 보곤 그렇게 말했다.
아예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놔주질 않았다.
제 딴엔 그녀를 챙겨 주고 점수를 따내려는 것 같았다.
서아린이 그의 손을 떨치려 할 때, 옆에 있던 정도현이 불쑥 끼어들었다.
“한 팀장님, 저희 임무는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 너무 신경 안 써 주셔도 됩니다.”
“…뭐라고?”
정도현의 돌직구에 한은성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정도현을 노려보며 말했다.
“57레벨… 뭐, 그 정도면 E구역에선 어깨 좀 펴고 다닐 만하지. 그런데 이번 범인은 D구역 출신이야. 너랑은 급이 다르다고.”
정도현과 한은성.
서아린이 둘 중 누구 곁에 있는 게 안전할지는 굳이 대 볼 필요도 없었다.
한은성의 주장에 정도현은 속으로 성가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떤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그렇다고 자기 여자를 다른 남자한테 맡길 순 없잖습니까.”
“뭐, 뭐?”
“안 그러냐, 서아린?”
“…예?”
정도현이 서아린의 어깨를 한 손으로 붙잡고 확 끌어당겼다.
졸지에 그의 가슴팍에 안긴 그녀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맞아요. 저희 사귀는 사이에요.”
서아린이 그에게 엉겨 붙으며 자연스레 연기를 받아 줬다.
그녀의 진심이 담겨 있어선지 누가 봐도 연인 사이 같았다.
정도현도 순간 그랬었나 착각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