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1원 상점 - 40화
카앙! 캉!
수십 합을 주고받았다.
검기를 휘두를 때마다 마력이 쭉쭉 빠져나갔다. 마치 몸속의 피가 말라가는 느낌이다.
‘오래는 못 쓰겠어.’
정도현이 숨을 헐떡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그는 양반이었다.
심정환의 얼굴은 흙빛이었다. 마치 전날 밤에 술을 잔뜩 마시고 숙취로 고생하는 사람 같았다.
“···크윽!”
검기가 맞부딪힐 때마다 그의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었다.
상대의 검기가 너무 견고해서 심정환만 내상을 입은 것이다.
파스스-!
정도현의 망치질에 심정환의 검기가 유리 조각처럼 깨지며 허공으로 흩날렸다.
쩌적-!
그러다 결국 검이 버티지 못하고 뚝 부러졌다. 심정환이 바닥에 주저앉으며 거무죽죽한 피를 왈칵 토해냈다.
“쿨럭! 커흑···.”
결국 바닥에 대자로 뻗은 심정환.
숨을 헐떡대던 그의 머리 위로 망치가 드리웠다. 심정환이 허탈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졌다. 아, 진짜 쪽팔려 죽겠네.”
승패가 갈리자 중앙홀은 정적에 휩싸였다. 충격에서 헤어나온 조직원들이 하나둘 웅성댔다.
“···길드장님이 졌어?”
“그것도 50레벨한테?”
초반엔 심정환이 정도현의 공격을 전부 막거나 흘리며 우세를 점했다.
정도현의 아이템 공세에 잠시 위태로웠지만 그것도 잘 넘겼다.
마침내 검기를 꺼내며 항복을 종용할 땐 모두 그가 이겼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정도현도 검기를 생성했다.
저건 망치니까 엄밀히 따지면 검기는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원리는 똑같으니까.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로 정도현이 이겨버렸다.
“마, 말도 안 돼···.”
민소이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멍하니 중얼댔다. 그러다 황급히 심정환에게 뛰어갔다.
그녀가 쓰러진 그의 등을 받치며 상반신만 일으켜 세웠다.
심정환이 면목 없단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최선을 다했는데···. 도저히 못 이기겠더라.”
“···.”
그 말에 민소이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심정환은 결과가 이렇게 되리란 걸 알았으리라. 그런데도 항복하지 않고 꾸역꾸역 끝까지 버텨가며 싸웠다.
“···미련하게 왜 그랬어요? 못 이길 것 같으면 빨리 항복했어야죠!”
“어떻게 그러냐. 검은 뱀이 잔뜩 벼르고 있을 텐데.”
“아···.”
결투에서 패하면 승자가 시키는 대로 따라야만 했다.
즉, 그가 항복하면 서아린이 민소이한테 보복하려 들 터.
심정환은 죽는 한이 있어도 그녀를 지켜주고 싶었다.
“흐윽, 흑···.”
그가 무리했던 이유를 뒤늦게 안 민소이. 미안함에 눈물이 맺혔다.
심정환은 그런 그녀의 등을 토닥여줬다.
그 둘을 서아린이 빤히 쳐다봤다.
조용히 지켜보던 그녀 옆으로 정도현이 다가와 말했다.
“어떻게 할 거야?”
“아···. 정말 고생하셨어요.”
서아린은 경외가 담긴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성장의 보옥도 안 쓰고 이길 줄은 몰랐어요.”
서아린은 정도현에게 성장의 보옥을 넘겨줬다. 그가 결투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그런데 정도현은 성장의 보옥을 보더니 쓰지 않고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지금 쓰는 무기에 사용하긴 좀 아까워.’
그 말에 그녀는 당황했었다.
성장형 무기를 들어도 심정환을 이길지 말지 단언할 수 없는데, 당장 아깝다는 이유로 아낀다니?
물론 그 마음은 어느 정도 이해한다.
기왕이면 더 좋은 무기를 성장형 무기로 만들고 싶겠지. 사람의 욕심은 원래 끝이 없으니까.
하지만 아낄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서아린은 그를 설득했다.
‘이걸 준 건 도현 씨가 꼭 이겼으면 해서에요.’
‘이거 안 써도 이겨.’
‘네?’
‘쉽지는 않겠지만 어차피 내가 이긴다고.’
자신감에 찬 그의 목소리.
서아린은 한숨을 푹 쉬며 알려줬다.
심정환은 검기를 구사할 줄 안다고. E구역 플레이어들과는 아예 수준이 다르다고.
그러자 그가 너무도 태연하게 답했다.
‘검기? 그거 나도 쓸 줄 아는데.’
‘···?’
허세가 아니라 정말이었다.
정도현은 검기를 완벽히 펼쳤고 심정환한테서 압승했다.
덕분에 그녀도 목숨 하나를 아낄 수 있었다.
“민소이.”
“···!”
서아린이 민소이에게 다가갔다.
민소이는 소중한 연인을 꼭 끌어안은 채 오들오들 떨었다.
자신만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곧 처형당할 죄수 같았다.
“미,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궁지에 몰리자 머릿속도 새하얘졌다.
민소이의 사과에 서아린은 코웃음 쳤다.
“눈이랑 팔다리. 셋 중에 필요 없는 거 하나 골라.”
“뭐, 뭐?”
“벌칙은 똑같이 받아야지. 그래야 공평하잖아?”
서아린은 자신이 받기로 한 처벌을 그대로 되돌려줬다.
민소이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바닥에 머릴 박았다. 머릴 조아린 그녀가 애걸복걸했다.
“미,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죽이려 들 땐 언제고. 인제 와서 사과하면 끝이야?”
서아린이 단검을 들이밀며 반박했다.
민소이도 결국 눈을 질끈 감고 포기했다.
“외, 왼손으로 해줘···.”
“그래.”
서아린이 고갤 끄덕였다. 그녀가 민소이의 왼팔을 붙잡고 손목 위에 단검을 갖다 댔을 때.
덥석-!
심정환이 서아린의 팔뚝을 붙잡으며 말했다.
“검은 뱀. 정말 염치없단 걸 알지만···. 이번만 소이를 용서해주면 안 될까?”
“길드장님. 지금 저랑 장난쳐요?”
“나도 알아. 말도 안 되는 억지인 거. 그런데 어떡하냐? 내 여자가 나처럼 불구로 살아가는 꼴은 죽어도 못 참겠는데.”
“···.”
“구차하게 이런 말까지 꺼내고 싶진 않지만···. 나도 너 한 번 도와줬었잖아.”
몇 년 전, 서아린은 심정환한테 빚을 졌다.
퍼플 팬텀은 심각한 부상으로 은퇴하는 경우가 아니면 자의로 나갈 수 없는 조직이었지만, 그녀의 사정을 듣고선 심정환이 배려해줬다.
덕분에 그녀는 숨 막히던 조직의 통제와 팀원들 간의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때가 떠올랐는지 서아린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부탁할게. 제발 한 번만 용서해줘.”
“그래도 싫다면요? 절 죽일 거예요?”
“꼭 복수해야겠다면···. 내 왼손을 잘라.”
심정환이 그렇게 말하며 민소이 대신 손목을 내밀었다. 서아린은 잠시 침묵했다.
심정환한텐 늘 고마움을 느끼며 살았다. 그가 아니었다면 지난 몇 년 간 조직 생활에 계속 치여 살았을 테니까.
은인의 손목을 자르라니. 영 내키지 않았다.
서아린은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왜 이렇게 물러졌나 모르겠네요.”
서아린이 그렇게 중얼대며 정도현을 흘끔 쳐다봤다. 그의 눈빛은 무덤덤했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내려도 자신은 상관없으니 너 알아서 하라 말하는 것 같았다.
서아린이 단검을 거두며 말했다.
“알았어요. 팔은 안 자를게요.”
“정말로?”
심정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펑펑 울던 민소이도 비굴하게 굽신대며 연신 고맙다고 말했다.
덥석-!
서아린은 민소이의 새빨간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손만 안 자른다 했지, 봐준다고는 말 안 했는데?”
“어, 어?”
짜악-!
민소이가 뭐라 대답할 틈도 없이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짝! 짜악! 짝!
연거푸 따귀를 때렸다. 민소이의 입술이 터지고 얼굴은 팅팅 부어올랐다.
그렇게 수십 대를 갈기고 나서야 서아린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뜨거운 숨을 후 뱉으며 말했다.
“민소이. 길드장님한테 평생 감사하며 살아. 저 사람 아니었으면 벌써 손모가지 날렸어.”
“흐, 흐으···. 예에···.”
민소이는 너무 아픈지 똑바로 대답도 못 하고 겨우 고갤 끄덕였다.
서아린은 조금 후련해진 표정으로 고갤 돌렸다.
“이제 돌아가죠, 도현 씨.”
“잠깐만.”
정도현은 심정환에게 다가갔다.
서럽게 우는 민소이를 어르고 달래주던 심정환이 그를 쳐다봤다.
정도현은 피의 맹약서를 꺼내며 말했다.
“심정환. 내가 이겼으니 퍼플 팬텀은 받아 가야겠어.”
“아···.”
패자는 말이 없었다. 심정환이 고갤 푹 떨구며 고갤 끄덕였다.
승자 말에 무조건 따르기로 했으니 조직을 넘기란 말에도 거역할 수 없었다.
절대적 충성을 요구하는 계약서에 심정환은 순순히 서명했다.
순식간에 조직 하나를 삼켜버린 정도현이 넌지시 질문했다.
“그 눈은 못 고친대?”
“어, 엘릭서가 아니면 안 된다더라고.”
“엘릭서라···. 나중에 구해다 줄게. 70레벨이 되면 살 수 있으니까.”
“···뭐?”
엘릭서는 1, 2급 시민들만 구매해 쓸 수 있었다.
가끔 상위 구역의 암시장에 매물이 올라온다곤 하지만 불법적인 루트라 최소 백억 이상은 필요할 터.
70레벨이 아니라 100레벨이 되도 힘들었다.
심정환은 정도현이 실없는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다.
“말이라도 고맙다.”
***
정도현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아린과 이런저런 이야길 나눴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털어놨다.
어머니의 치료비를 마련하고자 암흑가에 발을 들인 일.
성장의 보옥이 어머니가 남기고 간 유품이라는 것.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을 공유하자 마음속 응어리가 사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서아린은 평소보다 훨씬 밝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성장의 보옥은 언제쯤 쓸 거예요?”
“글쎄? 당장 급한 건 아니니 상황 봐서···.”
“그렇게 아끼다 써보지도 못하고 잘못되면 어쩌려고요?”
서아린은 욕심이 너무 과하다고 지적했다. 그녀의 말에도 분명 일리는 있었다.
성장의 보옥을 써도 아깝지 않을 무기를 얻으려면 분명 오랜 시간이 걸릴 터.
그 전에 죽을 확률이 높고, 구할 수 있단 보장조차 없으니까. 하지만 서아린은 모르고 있다. 그에게 1원 상점이 있다는 걸.
‘난 5레벨이나 10레벨이 오를 때마다 장비템을 갈아치울 수 있어.’
그래서 더 문제였다.
성장의 보옥은 자신의 레벨에 비례해 무기 공격력을 올려주는 아이템.
그러니 좋은 무기에 쓸 수록 효율이 좋을 터.
‘60레벨이 되면 에픽 등급 무기를 살 수 있어.’
아직 10레벨이나 남긴 했지만, 성장형 무기 없이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보고 싶었다.
‘정 힘들면 쓰든가 해야지.’
검기도 익혔으니 당분간은 성장형 무기 없이도 던전 공략에 큰 어려움은 없을 터.
물론 싸울 때마다 검기를 남발해대면 마력이 모자라겠지만, 마력 포션은 잔뜩 있으니까 상관없다.
생각에 잠긴 정도현의 옆모습을 서아린이 멍하니 바라보다 농담조로 말했다.
“성장형 무기 만들면···. 무기 꺼낼 때마다 제가 떠오르겠네요?”
“뭐야. 갑자기 생색 부리는 거야?”
“아뇨. 그런 건 아니고···. 나중에 상위 구역 가더라도 저 잊지 말라고요.”
“잊고 싶어도 절대 못 잊겠지. 고마워. 잘 쓸게.”
정도현이 그녀에게 처음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자 서아린이 어깰 움찔했다.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정도현의 집 앞이었다.
“그럼 전 가볼게요. 도현 씨 덕분에 오늘부턴 푹 잘 수 있겠어요.”
“그래. 앞으론 무작정 들이받지 말고.”
“···원래 안 그러거든요?”
퍼플 팬텀은 이제 정도현의 손아귀에 놓였다. 앞으론 그녀에게 얼씬도 하지 못하겠지.
정도현은 그녀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서 집으로 들어갔다.
서아린은 그의 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문이 완전히 닫히자 그녀도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두 달 만에 검기를 터득한 사람이야.’
같은 플레이어지만 그와 그녀는 아예 다른 궤도를 돌고 있었다.
그래. 애초부터 나와는 인연이 아니었던 거야.
서아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알 수 없는 미련을 달랬다.
***
다음 날 아침. 정도현은 송정민의 사무소에 들렀다.
어제 겪었던 파란만장한 사건을 털어놓자 송정민이 머릴 벅벅 긁었다.
평소 같았으면 소리를 질렀을 텐데 오늘은 어째 잠잠했다.
그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보니 송정민은 이렇게 말했다.
“어디서 놀라야 할지 감도 안 잡혀서 쭉 듣다가 타이밍 놓쳤다. 이 미친놈아.”
송정민이 담담한 표정으로 욕설을 뱉었다.
혼자 퍼플 팬텀 본부에 쳐들어가다니.
잘 무마해서 망정이지 자칫하면 초상 치를 뻔했다.
송정민은 제발 철 좀 들었으면 좋겠다며 한숨을 푹 쉬었다.
다 큰 아들이 사고치고 돌아오면 그걸 들어주는 부모가 된 기분이다.
“당분간 위험한 짓거리 하지 말고 얌전히 던전이나 돌아. 너 이번에 평가 점수도 많이 올라가서 E구역 던전은 어지간하면 다 들여보내 줄걸.”
“오.”
그와 비슷한 레벨대의 파티원이 최소 한 명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달렸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관리국이 정말 많이 양보해준 거다.
송정민이 그렇게 덧붙여 말했다.
그 말에 정도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송정민이 그의 속내를 바로 짐작했다.
“경험치 손실 나니까 파티원은 딱 한 명만 구하는 게 좋겠어. 너 방금 그렇게 생각했지?”
“예.”
“에휴···. 그래. 그래야 정도현이지.”
송정민이 해탈한 얼굴로 중얼댔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주섬주섬 꺼내 입었다.
출근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퇴근하려는 걸까? 정도현이 고갤 갸웃했다.
“뭐 급한 볼일이라도 있어요?”
“아니. 집에 바로 가려고. 원래 오늘은 쉬려고 했었어. 진성이가 좀 아프거든.”
그러고 보니 매일 사무소로 데려오던 진성이가 오늘은 안 보였다.
“진성이가 많이 아파요?”
“심한 건 아니고 어젯밤부터 미열이 나더라고. 일단 약 먹이고 재웠는데. 너 온다길래 잠깐 나온 거야.”
“그런 거였으면 전화할 때 말해주시지 그랬어요. 전화로 말했어도 괜찮았는데. 아픈 애 혼자 집에 놔두면···.”
“전화로 나눌 내용은 아니었잖냐. 그리고 용식이가 봐주고 있어서 괜찮아.”
송정민은 혹시 몰라 부하 직원을 집에 보내뒀다.
그냥 감기 같지만 방심하면 안 된다.
진성이는 아직 어린애라 자칫하면 병세가 위독해질 수도 있다.
위잉-!
송정민이 사무소를 나서려던 찰나, 휴대폰이 울렸다.
그의 부하 직원, 강용식이었다.
마침 이쪽에서 전화 걸려던 참이었는데 잘됐다. 송정민이 전화를 받았다.
“어, 용식아. 지금 집으로 갈 건데, 진성이는 괜찮지?”
[사, 사장님! 지, 진성이가···.]
“진성이가 왜? 무슨 일이야?”
[그, 그게···. 갑자기 각성했는데요?]
강용식의 보고에 송정민은 휴대폰을 툭 떨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