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언젠가 다가갈 그 날 (7)
‘역시 그렇게 쉽게는 안 되나.’
기회가 왔지만 라이온즈는 추가득점을 내지 못했다.
베어스의 이재학 감독은 흔들리는 바스케스를 내리고 불펜 투입으로 급한 불을 껐다.
투수진이 두텁기 때문에 선발 투수를 일찍 내린다고 손해 볼 게 없는 입장, 그에 반해 성운 라이온즈는 권오환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불펜 카드가 없다.
선발 존 워커가 조금은 오래 버텨줘야 하는 입장, 존 워커는 김환희 - 김재규 - 페르난데스로 이어지는 베어스의 중심 타선을 잘 넘기며 3회 말을 마무리 했다.
생각보다 풀리지 않는 경기, 아직 1대 1 동점이지만 홈팬들은 답답한 공격에 불만을 표했다.
답답한 건 성운 라이온즈 타선도 마찬가지, 하지만 5회 초 선두 타자 전재상이 볼넷으로 출루하면서 균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오~ 볼넷인데요. 임재경 선수까지 출루하면서 무사 주자 1 - 2루가 됩니다.”
“이제 임완수 선수 타석부터 시작되거든요. 여기서 출루가 된다면 성운 라이온즈는 대량 득점도 가능합니다.”
적색경보가 걸린 베어스는 다시 투수를 교체, 그 사이 임완수는 3루 코치의 사인에 주목했다.
‘네 멋대로 해라.’
팀 배팅이란 진루를 시키는 게 아니라 안타, 더 나아가 장타를 때려내는 게 진짜 팀 배팅이다.
임완수는 올 시즌 2번에서 가장 많은 희생타를 기록했지만 그게 정말 팀을 위해 필요한 플레이였을까.
2번에서 0.266을 치던 선수가 홍현구의 부상으로 1번으로 기용되면서 뛰어난 활약을 하고 있는데 이게 우연일까.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저 선수의 가능성을 억누르고 있었던 게 아닌지, 뭔가를 깨달은 이성한 타격 코치는 밀어치는 사인 따윈 주지 않았다.
따악~!!
“됐어!!”
임완수는 그 기대에 응하듯 바깥쪽 공을 보기 좋게 잡아당겼다.
다만 좌익수가 전진배치 돼 있었고 생각보다 빠르게 이뤄진 중계 플레이, 3루 코치는 팔을 높이 들어 2루 주자를 3루에 묶었다.
이제 무사 주자 만루에서 타석에는 이인영, 라이온즈 팬들은 그분이 오셨네를 연호하며 추격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베어스는 선택할 카드가 별로 없는 상황, 일단 바깥쪽으로 범타를 유도했다.
‘아뿔싸!!’
때렸지만 배트 끝에 걸린 타구, 베어스의 3루수 김재규는 3루를 밟고 홈으로 송구했다.
순식간에 더블 플레이, 하지만 2루 주자 임재경은 김재규의 발이 베이스에 닿지 않았다며 항의했다.
한승규 감독도 바로 비디오 판독을 요구, 중계진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이 장면인데요… 아~ 베이스에 닿지 않았네요. 이렇게 되면 1사 주자 만루가 되는 거죠?”
“네, 다른 선수도 아니고 김재규 선수가 이런 실수를 할 줄은… 베어스 입장에선 치명적입니다.”
판정이 확정되자 김재규는 고개를 떨궜다.
호랑이가 무사 만루에서 미끄러졌는데, 그 숨통을 끊을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리다니, 동료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따악~!!
“와아아~!!”
여기에 이어지는 후속 타자 김상규의 적시타, 3루 주자와 2루 주자가 모두 홈을 밟으며 성운 라이온즈는 3대 1로 앞서나갔다.
판을 뒤엎을 뻔 했다가 한 숨 돌린 이인영은 2루에서 박수를 치며 포효, 관중석은 쥐죽은 듯 조용해 졌다.
“야, 이 XX야!! 네가 발 안 닿은 거 봤어?!! 봤냐고?!!”
이때 관중석에서 어느 팬의 폭언이 날아들었다.
화가 나면 베이스를 못 밟은 김재규를 욕할 것이지 왜 라이온즈 선수들에게 화를 푸는 건가. 비뚤어진 팬 심이 만들어낸 촌극, 경기가 진행되는 중에도 욕설은 멈추지 않았다.
“저 인간들 왜 저래?”
외야 한쪽으로 몰려간 베어스 팬들은 중견수 임재경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보자보자 하니까 계속 지껄이는데, 이인영은 단숨에 사건 현장으로 달려갔다.
“뭐 어쩌라고?!! 불만 있으면 내려와!! 붙어줄게!!”
임재경은 괜찮다는 사인을 보냈지만 이인영은 팬들을 도발했다.
링 위라면 10초 안에 정리될 것들이 펜스 위라고 욕설을 하고 있는데, 소동이 제법 심각해지자 심판은 바로 경기를 중지 시켰다.
‘성 위에선 오합지졸도 목소리를 높이는 법이지’
그러건 말건 이인영은 팬들과 언쟁을 주고받았다. 팬이라고 봐주니까 계속 까부는데, 너 나중에 나랑 마주치면 재미없을 줄 알라며 위협을 가했다.
“그러니까 내려와서 덤비라고!! 너 동물원 원숭이냐?!! 철창 뒤에 숨으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어?!!”
“야, 야, 참아라. 네가 욕먹는 것도 아니잖아.”
“아!! 이거 놔 봐요!!”
임재경은 그런 후배를 말렸지만 그런 행동이 오히려 슈퍼스타를 도발했다.
내가 욕먹는 것도 아닌데 왜 발끈 하냐고? 같은 팀원이 욕먹는데 왜 내가 난리라니, 솔직히 시즌 중 가족보다 오래 보고 사는 게 팀 동료들이다.
그 동료가 모욕을 당했는데 가만히 있다는 건 직무 유기, 보다 못한 이성한 코치까지 외야로 달려 나왔다.
그제야 겨우 잠잠해진 외야, 그 사이 마이크를 잡은 주심은 관중들에게 불필요한 행동은 자제해주시길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자… 이제 겨우 경기가 재개되는군요.”
“네, 좋은 무대에서 이런 상황은 별로 좋지 못합니다.”
“박한우 위원님도 선수 시절 이런 상황을 자주 겪으셨습니까?”
“뭐… 이런 일 안 겪어 본 선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거죠.”
한편, 중계석도 이 사건을 두고 이런저런 대화가 오갔다.
하지만 이인호는 침묵, 선수라고 무조건 불합리한 일에 참아야 한다는 법이 있나. 전 베어스 소속이라 조금이나마 베어스를 응원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이 사건으로 완전히 아들 편으로 돌아섰다.
‘오늘 지면 내가 성을 간다.’
제자리로 돌아와서도 이인영은 문제의 관중들이 있었던 곳을 계속 응시했다.
곰이라고 놀려대도 그냥 웃어넘기니까 만만히 보였던 건가. 그러다 제대로 걸리면 뼈까지 씹어 먹힐 뿐, 다음에도 같은 사건이 일어나면 참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드러냈다.
“우우~ 우~”
경기는 계속 흘러 7회 초 성운 라이온즈의 공격, 홈팬들은 타석에 들어서는 이인영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그러건 말건 성난 곰은 정면을 응시, 3구를 받아쳐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깨끗한 안타를 기록했다.
이번 포스트 시즌에서 5번째 멀티히트 게임 그리고 전 경기 출루 기록, 1루에 안착한 뒤 관중석을 향해 윙크를 날리는 여유를 보였다.
어쨌든 타석에는 오늘 2타점 적시타를 날린 김상규, 도루가 나올 상황은 아니지만 김상규를 경계한 오건무 포수는 공을 하나 뺐다.
‘튀었네?’
포수가 몸을 날렸지만 옆으로 튄 타구, 이인영은 바로 2루로 뛰었다.
공을 잡은 오건무는 바로 2루로 송구, 그런데 여기서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어디 갔지? 어디 간 거야?!!’
백업을 들어온 2루수 김환희는 송구를 놓쳤다. 눈앞에서 사라진 공, 이런 때는 동료들이 콜을 해주는데 누구도 공을 찾아내지 못했다.
‘어딜 보는 거야?’
이인영은 베이스 옆에 붙어 있는 공을 봤지만 그냥 넘어갔다.
주자가 공을 건드리는 건 아마추어도 안 하는 개그, 하지만 김환희가 계속 못 찾고 헤매기에 여기라고 눈치를 줬다.
그제야 공을 발견한 야수. 송구도 못 잡았는데 후속 플레이에서 적의 도움을 받을 줄이야, 자존심이 상했는지 김환희는 2루 쪽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포수가 블로킹을 제대로 못한 탓에 벌어진 일, 베어스 팬들의 야유는 이제 오건무 쪽으로 돌아섰다.
이게 2020시즌 정규리그 1위를 한 팀의 실력인가. 형편없는 경기력에 실망한 이재학 감독의 얼굴도 벌겋게 달아올랐다.
“너희들 저런 애송이 한 명한테 휘둘릴 거냐?!! 어?!!”
이재학 감독은 이닝을 마치고 돌아온 선수들을 질책했다.
베어스는 올 시즌 올스타를 6명이나 배출한 강 팀, 이번 도쿄 올림픽에서도 야수 4명과 선발투수 1명, 불펜 2명을 내보냈다.
올스타 군단이라는 칭송을 받는 팀이 애송이 한 명에게 끌려가는 분위기라니, 부끄러운 줄 알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말하지 않아도 자존심 상하는 일, 베어스는 분위기를 바로 잡기 위해 뒤늦은 추격에 나섰다.
“자, 7회 말 베어스의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호세 페르난데스의 타석, 오늘 3타수 1안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올 시즌 35홈런을 기록했지만 변화구에 약점을 보이면서 페이스가 주춤했거든요. 그래도 위험한 타자라는 건 분명합니다.”
마운드에 오른 권오환은 바깥쪽 빠른 볼로 카운트를 잡아냈다.
4대 1이면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임, 돌다리를 두들기듯 신중한 투구를 이어갔다.
딱~!!
“좌측!! 파울입니다. 카운트는 이제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위협적인 타구로 보이지만, 타이밍이 늦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페르난데스 선수도 그 점을 의식할 텐데, 지금이 바로 체인지업을 던질 타이밍입니다.”
유준혁 포수는 벤치 사인을 확인했다.
승부 하라는 사인, 여기서 빠른 볼을 한 번 더 던지면 타자에게 다음 공은 체인지업이라는 확신을 줄 수도 있다.
어차피 던질 체인지업이라면 바로 승부를 하는 게 낫겠지, 사인을 확인한 권오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딱~!!
배트 끝에 걸리면서 파울, 4구를 앞두고 권오환이 발을 풀면서 양측의 대치는 계속 됐다.
“야!! 야!! 부르는데 왜 답을 안 하냐?!!”
한편, 이인영은 등 뒤에서 날아드는 시비에 귀를 닫았다.
상대를 안 하는 게 답, 그런데 마침 이때 큰 타구가 좌측으로 날아들었다. 뒷걸음질 치다보니 어느 덧 펜스, 이인영은 그 자리에서 높게 날아올랐고, 펜스 근처에 있던 팬들은 뒤로 빠졌다.
그런데 이인영에게 시비를 걸던 팬은 타구를 향해 손을 뻗었고, 중심이 앞으로 쏠리면서 펜스 밖으로 굴러 떨어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많이 놀랐는지 문제의 팬은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이때 서서히 다가오는 어둠의 그림자, 지은 죄가 있는 팬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말 그대로 곰 우리 안에 던져진 신세, 하지만 외야를 등지고 있던 이인영은 문제의 팬이 시비를 건 사람이라는 걸 몰랐다.
“괜찮으세요?”
“네….”
“앞으로 공 잡으려고 하지마세요. 그러다 진짜 큰 일 납니다.”
펜스에서 떨어진 팬은 마침 사건 현장으로 달려온 안전 요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그라운드를 떠났다.
여러모로 아찔했던 순간, 어쨌든 주심이 관중 개입을 이유로 아웃을 선언하면서 베어스는 이래저래 손해를 봤다.
따악~!
“유격수 정면!! 잡아서 1루로 송구하면서!! 한국 시리즈 1차전이 막을 내립니다!!!! 성운 라이온즈가 적지에서 먼저 1승을 추가하는 군요!!”
“김상규 선수의 2타점 적시타, 그리고 존 워커 선수의 6이닝 1실점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 냈다고 봐야겠죠. 역시 성운 라이온즈가 저력이 있는 팀이라는 걸 확인한 경기였습니다.”
“이인영 선수의 동점 홈런도 빼 놓을 수 없죠. 그 홈런이 있었기에 성운 라이온즈가 추격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이인호는 마지막까지 아들을 살뜰히 챙겼다.
편파 해설은 안 하려고 했는데 역시 피는 물보다 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