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언젠가 다가갈 그 날 (8)
“야, 너 이거 봤냐?”
“뭔데요?”
이곳은 한국시리즈 2차전이 열리는 어반 UA 베어스 파크, 임완수는 스트레칭에 열중하던 이인영 앞에 자신의 휴대폰을 들이 밀었다.
‘… 이게 뭐야?’
이인영은 문제의 그림을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곰돌이에게 유치원 옷을 입히고 손에 야구 방망이를 쥐어준 캐릭터, 뭔가 감이 왔지만 감히 입에 담지는 못했다.
[웅이의 하루]
시작부터 거창한 제목, 프로야구 카툰을 담당하는 웹툰 작가가 그린 만화인데, 이인영을 이렇게 묘사해 놨다.
[곰이지만 웅이는 사자반 아이들과도 잘 지냅니다]
“너 곰인데 왜 우리 반에 있어?”
“나도 몰라, 우리 아빠가 인생은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래.”
첫 컷부터 이인영은 사자반 아이들 속에 끼인 곰돌이로 묘사됐다.
곰으로 불리고 있는데 라이온즈 소속이라고 이런 식으로 묘사를 한 모양, 더는 보기 싫었는지 이인영은 주인에게 휴대폰을 던지듯이 돌려줬다.
“이 선배 군기 빠지셨네, 경기 앞두고 이런 거나 보고 계셨어요?”
“뭐가 인마, 이거 너잖아. 잘 봐.”
“유치해서 보기 싫어요.”
이인영은 달라붙는 어린 사자를 떨쳐냈다.
뭐가 재미있다고 저런 걸 보는 건지, 공포의 2번 타자로 불리고 있는데 그 카리스마에 찬물을 끼얹는 웹툰 아닌가.
순박한 이미지는 이제 버릴 때, 이번 시리즈에서 내 진짜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투지를 불태웠다.
“지시한 거 잊지 마라.”
“알겠습니다.”
한편, 2차전을 앞둔 베어스 벤치는 긴장감에 휩싸였다.
오늘 선발 투수는 김세경, 빠른 볼과 체인지업을 조합을 앞세우는 전형적인 기교파 스타일이다.
타자에게 가장 까다로운 투수는 뭘까? 불같은 강속구와 날카로운 변화구로 삼진을 쓸어 담는 스타일? 그것도 위협적이지만 타이밍을 빼앗는 투수도 만만치 않다.
똑같은 공이라도 어느 코스에 던지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히팅 포인트, 예를 들어 140km 빠른 공을 몸 쪽으로 붙이면 145km 이상의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변화구를 바깥쪽으로 던지면 타자의 눈에 더 느리게 보이기 때문에 제구가 되는 투수는 몸 쪽으로 빠른 볼을 붙이고 바깥쪽으로 변화구를 던져 타자의 타이밍을 흔들 수 있다.
김세경은 이게 가능한 투수, 이재학 감독은 라이온즈의 중심 타선을 억제하기 위해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문제는 스트라이크 존, 김세경은 제구에 의존하는 선수라 주심의 스트라이크 존에 결과가 많이 갈린다. 실제로 1~ 2회 평균자책점은 4.43으로 좋지 않지만 그 위기만 넘어가면 3.04로 급격히 낮아진다.
1차전에서 좋지 않은 리드를 보인 오건무는 투수를 잘 리드해 승리를 이끌어야 하는 입장, 김세경과 호흡을 맞추며 컨디션을 점검했다.
“자, 한국시리즈 2차전의 막이 오릅니다. 오늘 UA 베어스는 김세경 선수를 선발로 내세우는군요. 올 시즌 25경기 등판, 13승 5패, 평균자책점 3.38, 145이닝 동안 볼넷 51개, 탈삼진은 107개를 잡아냈습니다.”
“KBO를 대표하는 좌완 중 한 명이죠. 다만 기록으로 보이듯이, 탄착군이 바깥쪽에 집중된 선수라 볼넷이 적지 않은 편입니다. 초반에 볼 카운트를 유리하게 끌고 가지 못한다면 고전할 가능성이 있죠. 라이온즈 타자들 입장에선 빠른 카운트에 공략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주심의 콜과 함께 2차전의 막이 올랐다.
선두 타자는 임완수, 베어스 배터리는 예정대로 빠른 볼을 몸 쪽으로 찔러 넣었다.
‘생각보다 빠른데’
전광판을 본 임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속은 138km지만 역시 체감 구속은 높은 편, 타이밍을 조금 앞쪽에 뒀고 2구는 바깥쪽으로 흘러가는 체인지업이 들어왔다.
예상했던 패턴, 이성한 코치가 빠른 타이밍에 공략을 하라고 조언을 줬지만 임완수는 차분하게 볼을 보며 히팅 포인트를 잡아냈다.
‘아~ 조금 빨랐나.’
투 볼 원 스트라이크에서 4구를 때렸지만 유격수 앞으로 굴러가는 땅볼, 까다로운 타자를 잡아낸 베어스 배터리는 한숨을 골랐다.
[2번 타자 - 좌익수 - 이 ‧ 인 ‧ 영]
하지만 진짜 악몽은 지금부터, 이 녀석은 어떻게 가야 하나.
초구부터 몸 쪽을 던지기엔 부담스러운 상대, 하지만 바깥쪽 체인지업을 결정구로 삼으려면 어쨌든 몸 쪽을 던져야 한다.
그렇다면 몸 쪽 체인지업, 바깥쪽 체인지업, 몸 쪽 빠른 볼 순으로 가는 것도 방법, 오건무 포수는 예정대로 몸 쪽에 미트를 벌렸다.
“몸 쪽, 반응하지 않습니다. 카운트는 원 볼 노 스트라이크.”
“김세경 선수가 올 시즌 좌타 상대 피안타율이 0.271, 반면 우투 상대 피안타율이 0.241이었거든요. 좌완인데도 오히려 좌타 상대 피안타율이 높았습니다.”
“그런데 이건 딱히 나쁘게 볼 수 없는 현상입니다. 좌완 선발이라면 우타자를 많이 상대해야 되는데, 좌완이 우타 상대로 쓸 수 있는 무기가 뭐가 있겠습니까? 체인지업이거든요. 실제로 역대 좋은 좌완 선발 투수를 보면 수준급의 체인지업을 보유한 선수들이 많았습니다. 김세경 선수도 그 중 하나고요. 슬라이더만 좋았다면 더 좋은 투수가 됐을 텐데, 그 점은 좀 안타깝습니다.”
방망이가 나오지 않자 베어스 배터리는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던졌다.
그냥 둬도 좋았을 코스, 하지만 이인영은 뒷발을 빼며 타구를 들어 올렸다.
‘이걸 친다고?!’
외야로 날카롭게 날아가는 타구, 좌익수가 따라 붙었지만 라인 안 쪽에 떨어졌다. 좌익수가 펜스 구석에서 숨바꼭질을 벌이는 사이 이인영은 1루를 지나 2루까지 진출, 믿었던 체인지업이 공략 당하자 김세경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랬던 애가 아닌데?’
정규시즌에서 김세경은 이인영과 6타석을 맞붙었다.
결과는 4타수 1안타 2볼넷, 볼넷은 많이 내줬지만 그렇다고 못 막은 건 아니다. 특히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으로 재미를 많이 봤는데 그걸 공략 당하다니,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충격이 컸다.
‘전혀 감을 못 잡겠어.’
후속타자 김상규는 좌우를 찌르는 투구에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어제 2타점 적시타를 때렸으니 컨디션은 나쁘지 않은 편, 하지만 김상규는 히팅 포인트를 다양하게 가져가지 못하는 게 단점이다.
반면 이인영은 몸 쪽 공이 오면 손목을 몸 쪽으로 당겨 배트가 홈 플레이트 안 쪽을 지나가도록 하고, 바깥 쪽 공이 오면 손목을 바깥쪽으로 밀어내 히팅 포인트를 뒤로 밀어 타이밍을 자유자재로 바꾼다.
말 그대로 타격 천재, 물론 모두가 이렇게 타격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딱~!
“아, 파울이군요. 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가 됩니다.”
“너무 공을 따라다니네요. 이런 타격은 좋지 않습니다.”
“이제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이 들어올 타이밍이란 말이죠. 김상규 선수도 이걸 알고 있을 텐데, 그래도 지금은 빠른 공에 타이밍을 맞춰야 됩니다.”
결정구는 바깥쪽 빠른 볼, 체인지업을 의식하고 있던 김상규는 완전히 늦은 타이밍에 배트를 돌렸다.
말 그대로 농락당한 타석, 다음 타자도 범타로 물러나면서 이인영의 2루타는 물거품이 됐다.
역시 김세경을 투입한 작전은 적중, 베어스의 이재학 감독은 박수를 치며 선수들의 활약을 독려했다.
따악~!!
“와아아~ .”
완패한 1차전과 달리, 베어스는 초반부터 경기를 리드해 나갔다.
김환희 - 김재규 - 페르난데스로 이어지는 중심타선은 라이온즈에 뒤지지 않는 수준, 아니, 이인영의 존재감이 압도적으로 높은 라이온즈 타선에 비해 밸런스는 더 낫다는 평가를 받았다.
전문가들의 예상이 척척 맞아들고 있는 경기, 3회 말이 끝났을 때 스코어는 3대 0으로 벌어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
이성한 코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차하면 밀릴 수 있는 게 한국시리즈, 1차전은 하위 타선이 활약을 하면서 잡아냈지만 전체적인 밸런스는 베어스가 앞서고 있다.
어제의 기운을 타고 2차전까지 잡아내야 했는데, 이런 분위기라면 오늘은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약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이제 경기는 4회 초 성운 라이온즈의 공격, 오늘 팀의 유일한 안타를 때려낸 이인영이 타석에 들어섰다.
‘제대로 한 번 붙어보자.’
여유도 있겠다, 베어스 배터리는 과감한 승부를 택했다.
오늘 경기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시리즈를 위해서도 반드시 기를 꺾어놔야 되는 녀석, 일단 몸 쪽 빠른 볼로 카운트를 잡았다.
그 다음은 바깥쪽 체인지업, 뻔한 패턴이라 방망이는 반응하지 않았다.
“너 왜 이거 안 치냐? 아까는 쳤잖아?”
“속셈이 너무 뻔히 보여서요.”
오건무는 도발을 걸었지만 본전도 못 찾았다.
다른 타자들은 알고도 못 치는데 이 녀석은 차원이 다른 수준, 적이지만 역시 대단한 놈이라는 건 인정했다.
“그럼 다음 공이 뭔지도 알고 있냐?”
“결과로 말해드릴게요.”
마지막까지 자신감이 넘치는 녀석, 오건무는 다시 몸 쪽 빠른 볼을 요구했다.
따아악~!!
“잡아당긴 타구가!!! 오른 쪼옥~!!! 멀리!!!! 담장을 넘어 갑니다!!!! 이인영 선수의 솔로 홈런!! 어제에 이어 오늘도 홈런을 기록합니다!! 이번 포스트 시즌에서 6번째 홈런!!!! 누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말이 안 나오네요… 알고 있었다는 듯이 풀스윙을 돌리는데, 그렇다고 쳐도 이걸 이렇게 넘기는 선수가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박한우 위원이 아들을 칭찬하는 동안 이인호는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알아서 칭찬을 해주시는데 내가 굳이 끼어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내가 낳아놨지만 정말 잘난 녀석, 마음속으로 나마 박수를 보냈다.
“어때요? 맞췄죠?”
그 사이, 이인영은 홈을 밟으면서 오건무를 도발했다.
이 좁은 반도 땅에서 어떻게 이런 녀석이 튀어나온 건지, 하긴 올림픽에서 일본 투수들을 어린애처럼 가지고 놀았던 괴물 아닌가.
그 활약을 눈앞에서 지켜봤던 오건무는 이제 그러려니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만두자. 싸워서 이길 상대가 아니다.’
베어스는 이인영과의 승부를 포기했다.
타이밍을 흔들어도 때려버리는데 뭘 어쩌겠나, 그렇다고 김세경이 타자를 윽박지를 수 있을 정도로 구위가 좋은 것도 아니고, 피하는 게 답이라고 판단했다.
어쨌든 2차전은 베어스의 승리로 종료, 6대 2 패배를 당한 성운 라이온즈 선수단은 무거운 얼굴로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적지에서 1승을 거뒀지만 뚝뚝 끊어지는 타선과 무너진 불펜이 숙제로 남은 원정 게임, 코치진의 얼굴도 밝지 않았다.
“저기요!! 저기요!!”
이때, 한 어린 팬이 빠르게 지나가는 라이온즈 선수단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베어스 유니폼을 입고 있는 걸 보니 라이온즈 팬은 아닌데, 우리가 멈춰 서야 하나. 마침 패배해서 기분도 안 좋고, 날 부른다는 증거도 없지 않은가. 선수들은 어린 팬의 요청을 외면했다.
“웅이 형!! 웅이 형!! 여기요!! 여기!!”
다급해진 어린 팬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마침 경기 전, 임완수에게 웹툰을 스포 당한 이인영은 가던 길을 멈췄고 어린 팬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너 지금 나 부른 거냐?”
“네!! 사인 좀 해 주세요.”
“너 라이온즈 팬 아니잖아.”
“형은 좋아해요.”
그렇다는데 뭘 어쩌겠나, 이인영은 어린 팬이 넘긴 공위에 사인을 끄적거렸다.
“형은 우리 팀에 왔어야 했는데… 형 곰이잖아요.”
“인생은 원래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어?!! 그거 웹툰 봤어요?!!”
“몰라 인마.”
이인영은 어린 팬이 쓰고 있던 베어스 캡을 툭 치고 버스로 향했다.
그래도 좋다고 손을 흔들어 대는 녀석, 이인영도 버스 안에서 잘 가라는 손짓을 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