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언젠가 다가갈 그 날 (6)
[한국시리즈 올해 첫 케이블 TV 중계]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재미있는 기사 하나가 올라 왔다.
예전부터 한국시리즈는 방송 3사가 돌아가면서 중계를 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입지를 넓혀가는 케이블 TV의 영향력은 KBO도 무시할 수 없었고 올해부터 정식으로 케이블 TV 중계를 인정했다.
덕분에 박한우 - 이인호 위원 조합이 가능했던 것, 여론에서 뭐라고 해봤자 정해진 판을 뒤집을 순 없었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곳은 한국시리즈 1차전이 열리는 어반 UA 베어스 파크입니다. 저는 캐스터 이명한, 해설에는 박한우, 이인호 위원께서 도움을 주시겠습니다. 이인호 위원님.”
“예.”
“이번 한국시리즈의 전망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정해져 있던 질문이지만 이인호는 잠시 먼 곳을 바라봤다.
선수 시절 인터뷰는 많이 해봤지만 해설위원으로 마이크를 잡은 건 이번이 처음, 그래도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성운 라이온즈는 페넌트 레이스에서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팀입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시즌 최하위 기록이 없는 팀이죠. 이건 성운 라이온즈가 정규시즌에서 얼마나 강한 팀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만큼 많은 포스트 시즌을 치렀는데… 이상할 정도로 우승 복은 많지 않았거든요.”
옆에 있던 박한우 위원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아들이 출전하는 경기인데 친아버지라는 사람이 이렇게 불길한 서두를 열어도 되는 건가, 어차피 PD가 편파 해설로 가자고 했는데 성운 라이온즈가 시즌에 약했다 이런 말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인호는 해설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할 말은 하고 넘어갔다.
“성운 라이온즈가 역대 한국시리즈에서 가장 많은 패배를 당한 팀입니다. 특히 1982년부터 2001년까지 무려 7번이나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는데, 이 기간 중 준우승만 5번을 했습니다. 한국시리즈에서 유독 약한 징크스가 있었는데, 이번 시리즈에선 포스트 시즌의 기세를 잘 이어갈지 지켜봐야겠습니다.”
“박한우 위원님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뭐… 너무 부정적인 면만 봐도 좋지 않습니다. 성운 라이온즈가 한국시리즈에 약했던 건 사실이지만, 2008년 이후 2013년까지, 무려 6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했거든요. 그리고 이 기간 동안 2회 우승을 했습니다. 저력이 있는 팀이에요. 한국시리즈에 진출도 못하는 팀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 예… 그렇군요.”
극명하게 갈리는 양측 해설위원의 온도 차, 이명한 캐스터는 그 사이에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박한우 위원은 평생을 성운 라이온즈에 몸담았다.
성운의 역사라고 봐도 좋은 사람인데 그 앞에서 성운의 역사를 깎아내렸으니, 박한우 위원이 욱했던 것도 사실이겠지.
공교롭게도 이인영의 아버지 이인호는 오늘 라이온즈와 맞붙게 될 UA 베어스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이래저래 얽히고설킨 인연의 끈, 이명한 캐스터는 오늘 힘든 하루가 될 것 같다는 걸 예감했다.
“야, 오늘 네 아버지 해설위원으로 나오신다며?”
“네, 그런데요?”
이곳은 성운 라이온즈 벤치, 선수들은 이인영에게 아버지 앞에서 홈런 하나 쳐야 하지 않겠냐고 툭툭 찔렀다.
하지만 아버지는 UA 베어스에 은근 애정이 있는 편, 우리가 이기길 바라진 않을 거라는 답을 내놨다.
“야, 그래도 아들이 여기 있는데 우리가 이기길 바라시겠지.”
“제가 그 속을 어떻게 알겠어요. 어쨌든 저는 아버지 아군으로 생각 안 해요.”
아버지와 상관없이 내 할 일 하면 그만, 슈퍼스타는 팀의 우승 외엔 별 생각 없었다.
애국가 제창 이후 바로 시작된 경기, 선두 타자 임완수가 천천히 타석에 들어섰다.
“자!! 성운 라이온즈의 1회 초 공격으로 한국시리즈 1차전의 막이 오릅니다!! 선두 타자는 임완수 선수!! 이번 포스트 시즌에서 17타수 7안타, 맹타를 휘두르고 있습니다.”
“정규시즌에서도 나름 괜찮은 활약을 했는데, 포스트 시즌에서 완전히 눈을 뜬 것 같습니다. 특히 이인영 선수와의 협동 플레이가 좋기 때문에 되도록 많은 출루를 해줘야겠죠.”
박한우 위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임완수는 몸 쪽 공에 팔을 슬쩍 들이댔다.
몸 쪽 공에 약점이 있지만 그까짓 거 맞고 나가면 그만, 뒤에 이인영이 있으니 살아만 나가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건 좀 위험하다.’
베어스의 오건무 포수는 바로 바깥쪽을 요구했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치는 타자, 2루수 김환희가 단번에 캐치하지 못하면서 내야 안타가 나왔다.
시작부터 불길, 반면 성운 라이온즈 팬들은 그분이 오셨네를 열창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자, 이인영 선수가 바통을 이어 받습니다. 이번 포스트 시즌에서 타율 0.666, 홈런 4개, 10타점!! 존재감이 바로 이런 것이다라는 걸 성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루율이 0.857, 장타율은 0.914입니다. 정규시즌도 무시무시했는데, 포스트 시즌은 악마가 따로 없어요.”
“거기다 베어스 상대로 올 시즌 7홈런이 있거든요. 베어스 벤츠도 분명 경계를 할 겁니다.”
이인호는 이 틈에 깨알 같이 아들 자랑을 했다.
옛 소속팀에 애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역시 아들이 더 중요, 이번 타석에서도 뭔가 결과가 나오길 기다했다.
‘볼넷 주더라도 승부하지 마라.’
이재학 감독은 선발 바스케스에게 바깥쪽으로 가라는 지시를 내렸다.
지난 6월, 바스케스는 홈에서 이인영에게 시즌 23호 홈런포를 허용했다. 몸 쪽 승부를 걸었다가 벌어진 비극, 거기다 타격감이 한창 달아오른 녀석이라 정면승부는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그럴 줄 알았지.’
하지만 이 공을 노리고 있던 이인영은 풀스윙을 돌렸다.
예상 외로 초구부터 튀어나온 배트, 타구가 외야로 뻗어나가자 깜짝 놀란 오건무 포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꽤 높게 떠가는 타구, 베어스 팬의 시선도 불안에 떨며 타구를 따라갔다.
“내가 잡았어!!”
다행히 펜스 앞에서 잡힌 타구, 평소처럼 드라이브가 걸렸다면 넘어갔을 텐데, 타구가 너무 떠버렸다.
베어스 팬들은 일시에 격한 한숨을 뿜어냈고, 이인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아~ 힘이 부족했나.’
슈퍼스타는 보호 펜스를 잡고 팔굽혀 펴기 운동을 시작했다.
타자가 가슴 근육을 키우면 부드러운 스윙이 안 된다고 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과도한 펌핑이 원인, 상체에서 가장 큰 근육이 어디인가?
바로 가슴 근육, 아무리 상체의 힘을 잘 활용하는 타자라도 가슴 근육이 먼저 움직이면 타구가 안 뻗는다.
마지막까지 아껴두는 파워 배팅의 보조 장치, 그래서 틈이 날 때마다 팔굽혀 펴기를 해주는데 하필이면 이 장면이 중계카메라에 잡혔다.
“저러면 오히려 힘이 빠질 텐데요.”
이인호는 쓸데없는 짓이라며 경악했다.
한 두 번이 아니고 제법 많은 횟수를 하고 있는데, 원래 저랬던 녀석이었나. 여론의 관심 좀 받는다고 무리하게 쇼맨십을 하는 건 아닌지, 괜히 걱정이 됐다.
‘이번엔 다를 거다.’
경기는 돌고 돌아 3회 초 성운 라이온즈의 공격, 이인영은 팀이 1대 0으로 뒤진 상황에서 두 번째 타석을 맞이했다.
배터리는 이번에도 바깥쪽으로 던지겠지, 하지만 초구는 너무 먼 곳으로 빠졌다.
“2구도 바깥쪽입니다.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이인영 선수는 말 그대로 빗맞아도 홈런을 때릴 수 있는 파워를 지닌 선수거든요. 첫 타석에서 아웃은 됐지만 타구가 상당히 멀리 갔기 때문에 베어스도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카운트가 불리해지자 배터리의 사인 교환은 길어졌다.
이쯤에서 몸 쪽으로 하나 붙여볼까, 오건무는 곁눈질로 타자를 살폈다.
지금 이 자식은 분명 바깥쪽에 초점을 맞추고 있겠지, 몸 쪽으로 붙이면 파울이 나올 확률이 높다. 다만 바스케스의 제구력이 따라와 줄지는 의문, 이때 이재학 감독이 결단을 내렸다.
몸 쪽 승부, 사인을 받은 바스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지금 맞을 뻔 했다.’
공을 피한 이인영은 투수를 향해 헬멧을 툭툭 치는 경고를 보냈다.
여차하면 투수 쪽으로 타구를 날릴 수 있는 선수, 바스케스는 자기도 모르게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보내려다 흐트러진 캡을 바로 잡았다.
“야, 경기 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러냐.”
“네, 경기 하다보면 투수도 맞을 수 있는 거죠.”
오건무 포수는 상대를 다독였지만 돌아온 답은 차가웠다.
역시 말 빨 하나는 누구한테도 안 지는 녀석, 오건무는 바깥쪽으로 빠져 앉았다가 벤치 사인을 받고 다시 몸 쪽으로 붙었다.
승부를 하라는 지시, 바깥쪽으로 던져주면 진짜 투수 쪽으로 타구를 날릴 수 있다.
약간 흥분한 것 같은데 여기서 몸 쪽을 한 번 더 찔러주는 것도 방법, 파울이 되면서 카운트는 투 볼 투 스트라이크가 됐다.
오늘 바스케스의 몸쪽 제구는 나쁘지 않은 편, 그럼 한 번 더 던져볼까? 이재학 감독은 다시 몸 쪽 승부를 지시했다.
딱~!!
“다시 파울입니다. 예상 외로 몸 쪽 승부가 계속 되고 있네요.”
“제구만 제대로 된다면 치기 어려운 코스인 건 분명하죠. 그래도 파울 타구가 나오고 있다는 건, 이인영 선수의 컨디션이 그만큼 좋다는 뜻입니다.”
캐스터와 박한우 위원이 말을 주고받는 동안, 이인호는 혀로 바짝 마른입술을 다스렸다.
내가 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반면 자세를 고쳐 잡는 아들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냉정했다.
따아악~!!
“당긴 타구!! 배트를 멀리 던집니다!!!! 까마득하게 날아가는 타구!! 우측 상단 광고판 위를 넘어갑니다!!! 동점 솔로 홈런!! 이인영 선수의 활약은 한국시리즈에서도 계속 됩니다!!!!”
“가운데로 약간 몰렸는데 역시 용서가 없네요. 이렇게 되면 이인영 선수는 올 시즌 정규시즌까지 포함해서 60홈런을 때려냅니다.”
“올림픽도 추가하셔야죠. 다 합치면 65개입니다.”
이때 터진 대형 홈런, 이인호는 이번에도 아들 자랑을 추가했다.
아버지는 선수 생활 하면서 평생 동안 130홈런을 겨우 넘겼는데, 저 파워는 도대체 누구에게서 물려받은 걸까.
어쨌든 동점 홈런을 날린 이인영은 불룩 나온 이두박근을 과시하며 홈 플레이트를 밟았다.
“오오~ 오~”
이때, 성운 라이온즈 응원석에서 팬들의 감탄이 터져 나왔다.
프로야구 선수치고 작긴 하지만 임완수도 80kg이 넘는 건장한 성인, 이인영은 임완수를 팔에 매달고 유유히 걸어가는 세리머니를 했다.
도대체 힘이 얼마나 좋은 걸까, 규격 외의 파워를 지녔다는 건 분명, 승부를 걸었다가 KO 펀치를 맞은 베어스 배터리도 기가 막힌다는 반응을 보였다.
“야!! 야!! 너희들 그런 거 하지 마!!”
한편, 이성한 코치는 이인영 - 임완수에게 경고를 줬다.
무슨 야구 판이 차력 쇼도 아니고 저런 세리머니를 하나, 하지만 이인영은 상대 팀에게 위협을 주려면 이 정도는 해야 된다며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다음에도 홈런 치면 하겠다는 거냐?”
“홈런 때린 다음에 하면 문제없는 거 아닌가요?”
이성한 코치는 한 소리 더 하려다가 그만뒀다.
또 홈런 한 방 쳐준다면 누가 뭐라고 하겠나, 거기다 한 마디도 안 지는 자식이라 이 이상 말싸움을 해봤자 무의미했다.
따악~!!
한편, 이인영의 동점 홈런으로 기세가 오른 성운 라이온즈 타선은 베어스를 몰아세웠다.
KO 펀치를 맞고 일어나긴 했지만 바스케스는 여전히 비몽사몽, 원래 구위보다 제구를 앞세우는 스타일이긴 한데, 제구가 말을 안 들으면서 위기에 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