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325 >
[에이, 겸사겸사 하는 거지, 전화해놓고 안부도 안 묻고 본론만 대뜸 말하는 건 좀 그렇잖아.]
베일도 좀 컸다고 넉살이 많이 늘어 있었다.
주변만 빙빙 도는 대화에 지쳐 본론을 찔러 들어오는 성배의 말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넉살 좋게 웃어넘기고 있었다.
“그래, 그래. 알았어. 안부 인사 고맙고, 우승 축하도 고맙다. 그러니까 본론이 뭔데.”
[에이, 알면서. 내가 무슨 이야기 하려고 전화한 건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하하하.]
사실 지금 이 타이밍에 토트넘 소속의 베일이 성배에게 할 말은 뻔했다.
토트넘에게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었기 때문에 베일도 아마 그 이야기를 하려고 전화한 것일 터였다.
“뭐. 첼시 꼭 이겨달라고? 챔피언스리그 나가보고 싶다는 거 맞지?”
이번 시즌 프리미어리그 우승팀은 맨체스터 시티였고, 2위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3위는 아스날, 그리고 4위가 토트넘이었다.
맨유와 아스날이 자존심을 지키긴 했지만, 프리미어리그를 지배하던 빅4의 아성은 맨체스터 시티의 2년 연속 우승으로 무너졌고, 리버풀에 이어 첼시까지 극심한 부진에 빠지며 가루가 되었다.
맨유 역시 세대교체의 실패로 그 강력함이 심하게 무뎌져 있었다.
아스날은 벌써 몇 시즌째 챔피언스리그 진출 정도에 만족하는 상황이었고, 7년째 한 개의 우승컵도 들어 올리지 못하는 무관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 틈을 타서 치고 올라온 클럽이 바로 토트넘.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지상과제로 달려왔던 토트넘은 드디어 리그 4위를 차지하며 챔피언스리그 티켓을 시야에 두었지만, 마지막 고비가 남아 있었다.
[정답입니다! 똑똑한데? 하하하.]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한 클럽은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티켓을 자동으로 얻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유럽 최고의 클럽이 모여 경쟁하는 챔피언스리그 우승팀이 리그에서 챔피언스리그 티켓을 얻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이 주어지는 순위의 클럽은 거의 대부분 티켓을 얻어갔다.
“뭐, 네가 굳이 그렇게 부탁하지 않아도 무조건 이길 생각이었는데? 챔피언스리그 우승 기회가 아무 때나 오는 것도 아니고, 기회가 왔으면 잡아야지.”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좀 달랐다.
최악의 부진으로 리그 6위를 차지하며 챔피언스리그 티켓을 얻지 못한 첼시가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진출한 것이었다.
만약 첼시가 맨체스터 시티를 꺾고 빅 이어를 들어 올린다면, 토트넘은 졸지에 리그 4위를 차지하고도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을 잃어버리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렇지? 하하, 나도 그럴 줄 알았어.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그냥 응원하려고 전화한 거라고. 어쨌든 꼭 우승해. 너희도 좋고 우리도 좋고, 누이도 좋고 매부도 좋고. 안 그래?]
어쨌든 토트넘은 맨체스터 시티의 챔스 우승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도 꿈꿔왔던 챔피언스리그 진출이 눈앞까지 다가온 상황에서 이렇게 어이없게 유로파리그로 돌아가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을 것이었다.
‘챔피언스리그는 보내주지. 그런데 너도 거기서 챔피언스리그에 가게 될까? 그건 잘 모르겠는데.’
토트넘은 아마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가져갈 것이었다.
하지만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에 모습을 드러낼 토트넘 선수단에 가레스 베일이 계속 존재할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뭐, 어쩌면 다시 한 번 같이 뛸 수도 있겠지. 한 번 기대해보라고.’
아직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만치니 감독과 맨체스터 시티 영입 담당자는 팀의 주장이자 한때 베일의 팀 동료였던 성배에게 베일 영입 의사를 넌지시 밝혔다.
마리오 발로텔리 처분에 성공한다면 산체스를 쉐도우 스트라이커로 돌리고 베일을 오른쪽 윙포워드로 쓰거나 원톱 전술로 변경하고 베일-실바-산체스로 2선을 구성하겠다는 것이었다.
왼발잡이인 베일의 득점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오른쪽 윙포워드로서의 가능성을 확인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낭비인 것 같지만... 뭐 나야 상관없지.’
그렇게 되면 산체스, 아게로, 베일, 실바, 제코에 루카쿠까지 여섯 명의 월드클래스 공격수 중 한 명은 벤치에 앉아야 했다.
맨체스터 시티의 특성상 돌아가면서 빠지겠지만, 그것도 아깝긴 아까웠다.
본인들이 아닌 다른 동료들에겐 마냥 좋은 상황이었지만.
“그래. 우리를 위해 우승할 테니 너는 옆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이나 주워 먹어라.”
[알았어, 알았어. 콩고물이라도 꼭 떨어뜨려 달라고.]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는 그 무엇도 정해진 것은 없었다.
일단은 당장 눈앞에 닥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승리로 마무리하며 트레블을 완성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
“오셨어요? 어떻게, 어제는 잘 주무셨고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앞두고 독일, 뮌헨에 도착한 성배는 특급 호텔에서 누군가를 만났다.
“그럼 잘 잤지. 역시 독일은 특급 호텔 수준도 다르네. 객실이 정말 좋더라. 이렇게 좋은 호텔은 처음이야.”
“하하, 아들 잘 둬서 그렇지, 뭐. 우리 아들 아니었으면 우리가 언제 이런 곳 구경이나 해봤겠어?”
바로 성배의 부모님, 장석과 혜진이었다.
별들의 전쟁이라 불리는 유럽 최고의 클럽 대항전,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진출한 성배를 응원하기 위해 휴가를 내고 독일로 날아온 것이었다.
워낙 중요한 경기였고, 두 사람이 성배의 부모인 것도 유명했기 때문에 휴가를 받을 수 있었다.
“나중에는 딸 덕도 보게 해준다니까? 나도 완전 성공할 거야. 이거 서러워서 살겠나. 아아.”
유빈이도 지도 교수의 허락을 받아 독일에 와 있었다.
이제 학년 말이라서 곧 시험 기간이긴 했지만, 시험이 아무리 중요해도 성배의 첫 번째 챔피언스리그 결승전만큼 중요하지는 않았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며칠 동안 이어지는 것도 아니었기에 응원하고 돌아가서 열심히 공부할 생각이었다.
“그래. 당연히 성공해야지. 오빠가 너 공부시키려고 등골이 휘어요, 인마.”
“와, 웃긴다. 나한테는 맨날 그건 돈도 아니라고 자랑했으면서. 갑자기 엄마, 아빠 오셨다고 생색내는 거야?”
성배의 말에 유빈은 황당해하며 반박했다.
사실, 유빈이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대학교 학비가 비싸다고는 해도 성배의 수입이나 재산에 비하면 조금 비싼 껌값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 이유는 틀렸다.
“아니. 생색내는 거 아닌데? 그냥 너 놀리려고 하는 거야.”
부모님께 칭찬을 받겠다는 의도도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유빈이를 놀리기 위해서였다.
유빈이와 따로 살게 되면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 이렇게 놀릴 사람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최근에는 자신도 바쁘고 유빈이도 시험 때문에 바빠서 자주 만나지 못했기에 그동안의 한을 풀듯 열심히 놀려줄 예정이었다.
“너희는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러고 있니? 나이만 먹었지, 아직 아기들이라니까?”
핀잔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혜진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성배와 유빈이 모두 떠난 데다가 장석과 혜진도 직장 때문에 주말 부부로 살고 있어서 요즘 들어 외로움을 느꼈다.
오랜만에 만나도 여전히 같은 모습인 아이들을 보면서 오랜만에 예전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어허, 지금 누굴 혼내는 건지 알기나 해?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선수를 혼내는 거라고. 조심해야 해. 잘못하면 테러당해. 하하하.”
장석도 마찬가지였다.
사람 좋아하는 장석이라 동료들이나 친구들과 자주 만나 술 한잔 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아빠, 그렇게 농담으로 할 이야기가 아니에요. 잘못하면 진짜로 테러당한다니까요? 오빠 인기 엄청 많아요. 저도 오빠 동생이라는 게 알려지고 나서 고생했다니까요. 지금은 좀 낫지만, 며칠 동안은 진짜 엄청 고생했어요. 맨체스터에서는 거의 신앙이에요, 신앙.”
“뭐? 그 정도야? 나 진짜 조심해야 하는 건가? 잘못하면 테러당하는 거야?”
“아이고, 아버지. 민망하게 왜 그러세요. 하하하.”
가족들까지 자신을 응원하기 위해 알리안츠 아레나를 찾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들 앞에서 패배할 수는 없었다.
마지막 남아있는 힘까지 싹싹 긁어내기 위해서는 팬들의 응원이 필요했지만, 없던 힘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가족들의 응원이 필요했다.
‘첼시도 인터뷰하려고 와있는데, 그 앞에서 패배하는 모습을 보여줄 순 없지.’
거기에 연인인 첼시의 응원까지.
120%의 경기력을 발휘하기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빅 이어를 맨체스터 시티의 품으로, 자신의 품으로 가져오는 것뿐이었다.
전생에서는 꿈에서조차 상상해본 적 없는 그 그림, 유럽 클럽 챔피언의 주장으로서 빅 이어를 들어 올리는 그 그림을 만들기까지 이제 단 한 번의 승리만이 남아 있었다.
***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번 시즌 유럽 축구의 마지막 공식전 경기! 맨체스터 시티와 첼시, 첼시와 맨체스터 시티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곧 시작됩니다!”
2012년 5월 19일.
바이에른 뮌헨의 홈구장인 알리안츠 아레나는 하늘색과 파란색 물결로 가득 차 있었다.
바이에른의 연고지지만, 바이에른의 색깔인 빨간색은 아주 듬성듬성 보이는 수준이었다.
“독일 축구의 중심,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EPL의 두 클럽이 유럽 챔피언 자리를 놓고 부딪히게 되었네요. 정말 통쾌한 상황이에요. 웸블리 스타디움만 독일에게 넘겨주면 억울하죠. 알리안츠 아레나도 잉글랜드가 가져와야 하지 않겠어요?”
잉글랜드 축구계는 독일 축구계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월드컵이나 유로컵 등 메이저 대회에서 독일보다 못한 성적을 내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것만큼이나 중요한 문제가 더 있었다.
바로 웸블리 스타디움의 독일 홈구장화였다.
“독일 축구의 성지에서 EPL 클럽끼리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치른다는 건 굉장한 성과입니다. 정말 묵은 체증이 싹 쓸려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1975년 이후 지금까지, 37년 동안 잉글랜드는 잉글랜드 축구의 성지인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단 한 번도 독일을 이기지 못했다.
이기지 못한 것뿐 아니라 6전 1무 5패의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들었고, 저 1무조차 승부차기를 통해 독일이 승리한 경기였다.
“지금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TV 앞에 앉아계신 분들은 양 팀 중 한 팀을 응원하는 분들이시겠지만, 저희는 잉글랜드 축구를 대표하는 중계진으로서 어느 클럽이 우승하든 그냥 기쁠 것 같네요. 그 정도로 기분이 좋아요.”
원래 역사에서는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펼쳐졌고, 도르트문트와 바이에른 뮌헨이 결승전에 올라 명경기를 만들어내면서 잉글랜드 축구계에 비수를 꽂았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바뀐 지금은 잉글랜드의 두 팀이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치르며 독일 축구계를 향한 비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곧 경기가 시작됩니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이번 시즌 유럽 최강의 클럽이 곧 가려지게 됩니다. 이제 정말로 조금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맨체스터 시티는 시즌 전 경기 무패 트레블이라는 무시무시한 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첼시는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획득해 재정적 손해를 최소화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양 팀 모두 클럽 역사상 첫 번째 챔피언스리그 우승, 첫 번째 빅 이어 트로피를 노리고 있었다.
많은 것이 걸려있는 경기의 시작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 낭만필드 - 32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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