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65 >
“전방으로 길게 찔러줍니다! 베일, 계속 달립니다! 역전! 먼저 볼 따내고 바로 슈팅! 쇼크로스가 가까스로 걷어냅니다!”
“베일이 돌아왔어요! 주가 복귀하면서 베일의 위력까지 함께 살아났네요!”
성배와 베일의 왼쪽 측면은 계속해서 스토크 시티를 괴롭혔다.
델랍과 윌킨슨은 자신의 포지션에서 수비력이 좋은 편이었지만, 일단 상대를 마주해야 수비를 하든 말든 하는 것인데, 아예 만나질 못했다.
두 선수의 느린 스피드로는 동급 최고 수준인 베일, 성배의 스피드를 따라오지 못했다.
두 선수가 하는 일이라고는 이미 지나친 성배와 베일의 뒤를 따라가는 것뿐이었다.
“스토크, 무기력합니다! 거친 플레이로 상대의 의욕을 꺾는 스토크의 플레이가 전혀 먹히지 않습니다.”
남자의 팀, 숫놈 축구.
스토크 시티를 설명하는 거친 수식어들이었다.
부상을 불사하는 피지컬 깡패들이 모인 스토크 시티지만, 토트넘 측면의 파괴력을 감당하는 건 무리였다.
이번 시즌 승격팀으로 전력이 불안정해 19위에 머물러 있지만, 남자의 거친 향기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스토크답지 않은 경기였다.
“주와 함께 베일이 살아나면서 덩달아 레넌과 촐루카의 오른쪽 라인 역시 힘을 받고 있어요. 베일이 부진한 동안 그나마 힘을 내주었던 레넌인데, 반대편에서 제 몫을 해주고 수비진을 흔들어주니 오랜만에 편하게 뛰는 모습이네요.”
레드냅 감독 부임 후 탄력을 받았을 때, 토트넘의 약진을 이끌었던 양 날개가 오랜만에 그때의 위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윌킨슨 못지않게 느린 왼쪽의 히긴보텀도 레넌을 감당해내지 못했다.
“쇠렌센의 골킥! 허들스톤이 머리로! 모드리치가 한발 앞서 따냅니다!”
피지컬을 앞세워 거칠고 투박한 플레이를 통해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것이 스토크 시티의 전술이었다.
하지만 토트넘 선수들은 피지컬에서 밀리지 않았다.
중앙에서 펼쳐지는 치열한 피지컬 싸움에서 190cm에 육박하는 도슨과 우드게이트, 허들스톤은 스토크의 선수들을 상대로 밀리지 않았고, 피지컬이 약한 모드리치는 특유의 엄청난 탈압박 능력을 통해 스토크의 압박을 무력화시켰다.
“양 사이드의 토트넘 선수들, 출발합니다!”
그리고 측면의 스피드 스타들은 정면 대결을 펼치지 않았다.
스토크 시티로서는 상성 상 최악의 상대를 만난 것이었다.
“모드리치, 반대편으로 길게 넘겨줍니다! 다시 한 번 왼쪽으로!”
중원에서 피지컬과 테크닉, 탈압박 등을 통해 볼을 따내면 바로 측면으로 전개한다.
오늘 토트넘의 공격 루트는 단순했다.
하지만 이 단순한 공격에 스토크 시티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흔들렸다.
“주, 가볍게 트래핑! 그리고 바로 전방으로!”
단순한 공격이 잘 통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기량 차이가 있다는 뜻이었다.
확연한 기량 차이와 상성 상의 우위를 앞세운 토트넘은 스토크 시티를 유린하며 오랜만에 홈팬들에게 시원한 경기를 보여주었다.
“베일, 또 한 번 달립니다!”
베일이 오늘 하는 일이라고는 성배의 패스에 맞춰 달리는 것, 하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최근 한 달 사이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는 중이었다.
“논스톱 크로스! 중앙에!!”
베일이 윌킨슨을 따돌리고 파고드는 사이, 중앙의 데포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발이 느린 쇼크로스를 뚫고 파고들었고, 그나마 발이 빠른 파예는 파블류첸코의 블로킹에 막혔다.
그리고 그런 데포를 향해 베일의 크로스가 연결되었다.
‘들어갔다.’
뒤에서 보고 있던 성배는 득점을 확신했다.
쇼크로스가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따라붙었지만, 이미 앞을 내준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성배와 동갑인 쇼크로스는 이번 시즌이 프리미어리그 데뷔 시즌이었고, 나중에 악명을 떨치면서도 전성기를 열게 해주었던 거친 플레이를 몸에 익히지 않은 시기였다.
뒤로 밀렸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데포, 슬라이딩! 골! 골입니다! 쇠렌센이 최선을 다했지만, 막을 수 없었습니다!”
발을 쭉 찢으면서 최선을 다한 쇠렌센의 노력이 무색하게 데포의 슈팅은 그대로 골망을 흔들었다.
토트넘의 두 번째 골이었다.
선취 골 이후 겨우 5분 만에 다시 두 번째 득점이 터졌다.
“스토크,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있어요! 그리고 토트넘이 그렇게 만들고 있죠? 토트넘이 정말 오랜만에 좋은 경기력을 선보이면서 화끈한 경기를 보여줍니다.”
화이트 하트 레인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자신의 팀이 오랜만에 보여주는 화끈한 경기력에 토트넘 서포터들은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봤어? 어시스트라고, 어시스트!”
어시스트를 기록한 베일은 데포에게 달려가 포옹한 뒤, 곧바로 성배를 향해 달려왔다.
“그래, 알았다고. 잘했어. 뭐, 무슨 말이 듣고 싶은데.”
베일 정도면 굉장한 인맥이었지만, 자신이 깔고 들어가지 않은 첫 인맥이었다.
콤파니나 베르마엘렌, 베르통헨, 박인진, 윤기표 등은 성배가 먼저 낮추고 들어가거나 동등한 입장에서 시작한 관계였지, 상대 쪽에서 성배를 높여주는 관계는 없었다.
하지만 베일이 유망주일 때, 성배는 이미 정상권에 자리를 잡았고, 윙어로 전향 후에는 시작부터 성배가 뒤를 봐준 관계였다.
이런 낯선 관계는 성배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아니, 뭐. 그냥 칭찬 한마디 해주면 되지, 왜 이렇게 엄격해! 그냥 잘했다고 한마디, 진심이 느껴지게 하면 된다니까?”
그래도 베일의 성격이 낙천적이고 밝아서 다행이었다.
다른 관계들은 성배가 계산적으로 접근했기에 이뤄진 것들이었는데, 이 관계도 그런 식으로 유지되었다면 이렇게까지 가까워질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래, 그래. 잘했다. 잘했어. 그러니까 겁먹지 말라고. 너는 그 스피드 하나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는데 왜 자꾸 겁을 먹어.”
성배의 칭찬 한마디에 급격히 표정이 밝아진 베일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야말로 재능 덩어리.
상대 수비수가 아무리 2부 리그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선수라고 하더라도 단순히 달리는 것 하나만으로 이렇게까지 초토화해버리는 그의 재능이 참 부러웠다.
***
‘경기는 이미 기울었고...’
아직 전반전도 채 끝나기 전이었지만, 이미 경기는 토트넘 쪽으로 완벽히 기울었다.
스토크 시티가 할 수 있는 플레이는 모두 막혔다.
킹과 비교하면 모자랄 수밖에 없는 도슨이었지만, 수비하는 데 있어서 세밀한 계산이 필요 없는 스토크 시티의 공격은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다.
스토크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필요한 것은 오로지 피지컬.
도슨의 피지컬은 나쁘지 않았다.
“델랍의 롱 스로인! 도슨이 먼저 걷어냅니다!”
스토크의 유니크한 공격 루트, 델랍의 스로인도 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경기 분위기가 기울어서 그런지 허들스톤, 도슨, 우드게이트와 신장 차이가 거의 없는 스토크의 스트라이커 비틀과 크레스웰은 제공권 다툼에서도 힘을 쓰지 못했다.
“주가 달려와서 볼 잡아냅니다! 델랍이 달려듭니다!”
도슨이 머리로 걷어낸 볼은 왼쪽 측면으로 향했다.
헤딩이 이루어지자마자 바로 달려든 성배가 한발 앞서서 볼을 따냈고, 스로인을 마친 델랍이 성배를 향해 달려왔다.
‘스로인 빼면 평범해.’
그의 유니크한 스타일과 장점을 갈고 닦아 자신의 입지를 구축한 그 노력은 인정했지만, 그뿐이었다.
델랍의 기량으로는 성배를 위협할 수 없었다.
“간단히 제쳐내고, 전방으로! 토트넘, 역습 찬스!”
성배는 볼을 간단히 옆으로 치우는 것만으로 델랍의 압박을 해소했다.
그리고 빈공간을 타고 달려나갔다.
‘가레스? 아론?’
일단 가장 먼저 살핀 것은 베일과 레넌, 토트넘의 공격을 이끄는 양쪽 날개였다.
역습 상황이었고, 두 선수 역시 지금까지처럼 마크맨들을 가볍게 떨쳐낸 상황이었다.
‘아니야. 너무 뻔해.’
하지만 계속 당해온 만큼 스토크 선수들의 이목이 두 선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물론, 알고도 못 막는 스피드를 가진 선수들이었지만, 부상의 위험도 있고 해서 일단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전방으로 빠르게 찔러줍니다! 모드리치에게!”
성배의 패스는 모드리치에게 이어졌다.
그라운드에 멋진 포물선을 그리는 평소의 패스가 아니었고, 잔디가 날릴 정도로 낮고 빠르게 깔린 패스였다.
“웰란의 압박을 등으로 버텨냅니다! 가볍게 돌아서는 모드리치, 태클! 걸려 넘어집니다!”
모드리치의 부드러운 턴 동작에 속아 돌파를 허용한 웰란은 다급히 태클을 시도했다.
파울로 끊지 않았다면 모드리치에게 편히 패스할 기회를 주는 상황이었다.
모드리치의 날카로운 패스와 데포의 순간적인 움직임.
이에 위협을 느낀 웰란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프리킥이 주어집니다. 좋은 위치에서의 프리킥입니다.”
“거리는 대충 25m 정도 될 것 같고, 오른쪽으로 아주 살짝 치우친 위치네요. 조금 더 측면으로 빠지면 좋았겠지만, 충분히 좋은 기회에요.”
모드리치가 프리킥을 얻어낸 위치는 왼발 키커가 편하게 슈팅할 수 있는 위치였다.
조금만 더 빠졌다면 완벽했겠지만, 이 정도 위치에서의 프리킥 기회도 그리 많지 않았다.
“주가 올라옵니다. 이런 위치에서의 프리킥이라면 주의 왼발에 기대를 걸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당연히 이런 프리킥은 성배의 몫이었다.
성배는 천천히 프리킥 위치로 올라오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쇠렌센은 공중볼에 약점이 있으니까 위쪽으로 때릴까.’
스토크 시티의 주전 골키퍼이자 덴마크 국가대표 NO.1 골키퍼인 토마스 쇠렌센.
전설적인 골키퍼 고든 뱅크스 이후 은근히 골키퍼 운이 좋은 스토크 시티의 골키퍼답게 좋은 선수였지만, 약점은 있었다.
공중볼 처리가 미숙하고 펀칭 빈도가 지나치게 높으며 예측력이 좀 떨어진다는 평가였다.
‘낮게 깔아서 펀칭 이후 세컨 볼까지 노리는 게 나으려나. 아니면 역시 공중으로 차는 게 나은가.’
감아차는 빈도가 높은 성배의 프리킥 특성을 감안하면 직접 슈팅의 위력이 반감되는 위치였다.
세컨 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반사신경이 뛰어난 쇠렌센이었기에 낮게 차는 프리킥도 그리 위협적일 것 같지는 않았다.
“동료 선수들에게 신호를 줍니다. 주의 손짓에 따라 토트넘 선수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생각을 마친 성배는 동료 선수들에게 전술 패턴을 알렸다.
그리고 선수들은 약속한대로의 움직임을 가져갔다.
‘잘 움직여 달라고.’
성배가 선택한 세트피스 전술은 동료들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쇠렌센의 약점을 강제로 끌어낼 수 있는 전술이었다.
“주의 왼발! 반대편으로!”
슈팅이 아니었다.
성배의 킥은 높이 떠서 반대편 골라인 쪽으로 향했고, 특유의 스피드를 살려 뒤에서부터 빠르게 파고든 베일이 볼을 따라갔다.
그리고 쇠렌센은 볼을 처리하기 위해 앞으로 튀어나왔다.
“골키퍼 나오는데, 처리하지 못하고 베일!!”
쇠렌센 자신도 공중볼에 약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부담을 가진 채 골대를 버리고 뛰쳐나왔다.
하지만 성배의 신호를 받은 토트넘 선수들이 이미 중앙 쪽에 밀집해 있었고, 쇠렌센의 움직임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쇠렌센은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왼발로 밀어 넣는 베일, 골! 들어갑니다! 토트넘, 30분에 세 번째 득점을 기록합니다!”
윌킨슨은 이번에도 베일을 놓쳤다.
그리고 쇠렌센이 볼을 처리하지 못한 이상, 베일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기 내내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베일이 드디어 골을 기록합니다! 오늘 1골 1어시스트의 베일! 대단합니다!”
“주 역시 복귀전에서부터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네요. 리그 6호 어시스트죠? 이걸로 시즌 열 번째 공격 포인트를 기록한 주성배 선수입니다.”
UEFA컵과 칼링컵에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한 성배는 리그에서 2골 6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네 시즌 연속 두 자릿수 공격포인트를 기록했다.
수비수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기록이 계속되었다.
“주와 베일의 무서운 콤비가 부활합니다! 이 두 선수의 왼쪽 라인이 살아나 주기만 한다면, 토트넘의 남은 일정이 손쉬워지지 않습니까?”
“이번 시즌 토트넘이 가장 좋았을 때, 이 두 선수가 팀을 이끌었었거든요? 오늘 활약을 보니까 기대가 되네요!”
성배와 베일.
왼쪽 측면의 완벽한 부활이었다.
복귀 후 첫 경기에 불과했지만, 그래서 더욱 기대가 되었다.
‘남은 반년 동안 최대한 몸값을 올려볼까.’
토트넘에 남기로 했다지만, 이적의 시기를 미룬 것뿐이었다.
남은 반 시즌.
성배는 자신의 몸값을 최대한 올릴 생각이었다.
< 낭만필드 - 165 > 끝
ⓒ 미에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