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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필드-125화 (100/356)

< 낭만필드 - 125(5권 끝) >

가장 부담스러운 경기였던 아스날과의 북런던 더비에서 2-0 완승을 거둔 토트넘이었지만, 아직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다음 상대는 첼시.

현재 리그에서 3위를 차지하고 있는 강팀이었다.

“첼시랑 붙어보는 건 처음인가?”

스탬포드 브릿지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도 성배의 옆에는 윤기표가 앉아 있었다.

“아뇨. 벨기에 있을 때 챔피언스리그에서 붙어봤어요.”

2005/06시즌, 안더레흐트에서 활약하며 풀타임 데뷔 시즌을 치를 때, 첼시와 두 번 상대한 적이 있었다.

갓 데뷔한 신인이었던 성배가 처음으로 유럽 무대에 이름을 알린 경기이기도 했다.

“아, 그렇지! 프리미어리그에서 처음으로 네 이름을 알게 되었던 경기인데, 그걸 잊어버리다니. 나도 늙었어.”

첼시 공격의 핵심이었던 로번을 상대로 압도하지는 못했지만, 로번도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게 막아냈던 그 경기.

그 경기는 성배에게 유명세를 선물해주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도 더 지난 지금.

성배는 다시 한 번 첼시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때에 비하면 첼시가 좀 많이 바뀌었지?”

성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번, 더프, 델 오르노, 갈라스, 크레스포 등 많은 선수들이 떠났고, 그 자리를 말루다, 칼루, 콜, 라이트-필립스 등의 선수들이 채웠다.

특히 이번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발락과 셰브첸코라는 엄청난 선수들을 영입하는 등 선수단을 확 뒤엎어버렸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어떤 것 같아요? 첼시는.”

2년 전의 첼시와 지금의 첼시는 완전히 다른 팀이었다.

선수단 구성도 확 바뀌었고, 무엇보다 첼시라는 팀의 컬러를 만들어냈던 무리뉴 감독이 아브라모비치 구단주와의 불화로 팀을 떠났다.

당연히 팀 컬러 자체가 바뀔 수밖에 없었다.

“공격수들의 컨디션이 안 좋아. 그래서 아마 수비하기에는 어렵지 않을 거야.”

무리뉴 감독의 경질, 혹은 해임의 이유는 아브라모비치 구단주의 바람과는 달리 수비적인 축구를 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후임 그랜트 감독은 공격적인 축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수비적인 축구를 하기 위해 모아놓은 무리뉴 감독의 선수단으로 공격적인 축구를 해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렇긴 하더라고요. 공격진이 생각보다 힘을 못 쓰는 느낌이던데.”

드록바는 부상으로 빠졌고, 로번과 더프는 떠났다.

이들을 대신해 주전 윙어로 나서는 말루다와 라이트-필립스는 아무래도 약했다.

탄탄한 수비를 바탕으로 하고 어떻게든 한두 골 정도를 지켜 승리를 따내는 전술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조심할 건 미드필드야. 램파드가 부상으로 빠졌지만, 발락도 무섭지. 콜의 오버래핑도 무시할 수는 없고.”

공격진이 부진한 가운데 첼시의 공격을 이끄는 선수는 램파드와 발락이었다.

공격적인 축구를 위해 무리뉴를 해임했지만, 결과적으로 무리뉴가 만들어놓은 수비진에 의존하는 경기를 하고 있었다.

‘라이트-필립스는 좀 골치 아플 것 같은데.’

숀 라이트-필립스는 굉장한 스피드와 드리블 능력을 갖춘 선수였다.

단순 스피드는 월콧보다 살짝 느리지만, 조금 더 다듬어진 선수였고, 크로스와 패스 정확도 역시 더 뛰어났다.

‘쉽지는 않겠어.’

아직 유망주에 불과한 월콧보다는 훨씬 까다로운 선수였다.

‘공격에서도 한몫해야 하는데...’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풀백이라는 콜과 비교하면 벨레티의 기량이 한 수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토트넘의 공격 루트는 왼쪽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또 벨레티의 공격력만큼은 콜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

할 일이 생각보다 많았다.

***

“첼시의 분위기가 좋습니다. 무섭게 몰아치는 첼시의 공격에 토트넘은 수비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스탬포드 브리지 홈팬들의 응원과 조금 더 나은 팀 분위기를 앞세운 첼시가 경기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스탬포드 브리지에서 80경기 이상 무패 행진을 달리고 있는 첼시였기에 토트넘도 이런 상황을 예상했고, 역습을 노리는 전술을 들고 나왔다.

“콜의 컨디션이 좋아 보이네요. 오하라로는 무리인 것 같은데요.”

첼시에는 애슐리 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상에서 복귀한 조 콜 역시 뛰어난 선수였고, 부상으로 지난 시즌을 통으로 날린 것이 아쉬운 듯 그 한을 풀고 있었다.

“콜의 절묘한 패스! 오른쪽으로! 라이트-필립스에게 볼 이어집니다.”

왼쪽에 치우친 위치에서 볼을 잡은 조 콜은 한 번에 길게 오른쪽으로 벌려주었다.

‘콜한테 너무 휘둘리는데.’

4-2-3-1 포메이션의 첼시에게 4-4-2 포메이션의 토트넘이 중원을 내주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발락과 콜, 두 명의 미드필더를 모두 놓치는 것, 공격 작업을 맡아주어야 할 보아텡이 마켈렐레에게 완전히 막혀버린 것은 타격이 너무 컸다.

“라이트-필립스, 출발했습니다! 주, 급히 그 뒤를 따라갑니다!”

경기 상황에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성배의 발은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월콧보다는 느리다고 하지만, 그 차이는 극히 미세한 차이였고, 조 콜은 디아비가 아니었다.

패스의 질이 달랐기에 패스를 받은 선수가 보여주는 플레이의 질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더럽게 빠르네, 진짜.’

알아주는 스피드 스타에게 좋은 패스가 공급되면 어떻게 되는지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월콧도 빠르긴 무지하게 빨랐었다.

하지만 월콧은 스피드가 제대로 붙기 전에 막을 수 있었는데, 라이트-필립스는 성배가 도착하기도 전에 최고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저 속도를 따라갑니다! 대단한 스피드입니다!”

성배도 그냥 넋놓고 놓치지는 않았다.

라이트-필립스만큼은 아니지만, 성배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스피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 선수의 움직임을 파악해 최단 거리로 따라갈 수 있는 눈이 있었다.

“따라잡았습니다! 일대일!”

결국, 성배는 라이트-필립스의 앞을 잡아냈다.

성배가 자신을 추월하자, 라이트-필립스도 잠시 돌파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 자식이!’

하지만 정말 잠시 멈춘 것이었다.

라이트-필립스가 돌파를 멈췄으니, 성배도 멈춰 서서 자세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성배가 달리기를 멈추고 자세를 잡으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라이트-필립스는 다시 앞으로 치고 나갔다.

간단한 스톱&고 테크닉이었지만, 상황상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치열한 경합! 중앙으로 크로스!”

성배가 다시 따라붙기 전에 라이트-필립스는 중앙으로 크로스를 투입했다.

‘여기까지인가.’

마지막 순간, 몸을 날리기는 했지만, 크로스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불편함을 주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도슨의 클리어! 오하라가 멀리 걷어냅니다!”

성배의 방해가 신경 쓰였는지, 라이트-필립스는 평소 그답지 않게 부정확한 크로스를 올렸다.

도슨이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라이트-필립스의 돌파도 좋았고, 이를 막는 주성배의 수비도 좋았어요. 볼을 건드리는 것만 좋은 수비는 아니거든요? 적절한 방해로 편하게 크로스를 올리지 못하게 해주는 수비가 좋았네요.”

분명 나쁘지 않은 수비였지만, 성배는 만족할 수 없었다.

숀 라이트-필립스는 좋은 선수가 분명했지만, 탑클래스는 아니었다.

이제 겨우 이적 후 두 번째 경기인데 라이트-필립스를 막아내려 하는 것은 욕심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뚫리는 게 기분 좋을 리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지. 이 정도라도 된다는 건.’

양손으로 뺨을 친 성배는 생각을 바꿨다.

언제부터인가 욕심이 너무 커진 느낌이었다.

자신은 절대 최고의 선수가 아니었고,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이 정도면 잘하는 거다. 너무 욕심 가지지 말자, 주성배.’

탑클래스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프리미어리그의 윙어 중 라이트-필립스보다 확실히 낫다고 평가할 수 있는 선수는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라이트-필립스는 잉글랜드 국가대표 선수였다.

‘천천히. 천천히 가자. 아직 어린 나이니까.’

가끔 선수생활이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욕심을 내는 자신을 느꼈다.

욕심은 좋지만, 조급해하는 것은 절대로 피해야 했다.

‘지금 이 무대에 있는 것만으로 내 두 번째 인생은 성공했어.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지만, 최소한 조급해하지는 말자.’

성공하면 할수록 더 큰 성공을 위해 조급해하는 자신을 달랬다.

사람들의 욕심이 왜 끝이 없는 것인지, 요즘에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발락의 압박에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오하라, 볼을 급하게 뒤로 뺍니다.”

토트넘은 첼시를 맞아서 계속 고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중원을 완벽히 장악당했기에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주전 미드필더인 제나스와 조코라가 출전해도 상대가 될까 말까인데, 이 두 선수가 전부 빠진 상황에서 스무 살의 오하라-보아텡 라인으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여기!”

그렇다면 토트넘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단 두 가지.

역습, 아니면 최후방에서의 롱패스였다.

그리고 토트넘에는 프리미어리그 최고 수준의 롱패스 정확도를 자랑하는 성배가 있었다.

“킹, 측면의 주에게!”

“주성배의 롱패스를 한 번 기대해봐야죠!”

성배에게 볼이 도착하니 첼시 선수들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잠시 긴장을 풀고 있었던 수비수들은 자신들이 마크해야 할 선수에게 달라붙었고, 라이트-필립스는 성배에게 압박을 가했다.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성배의 롱패스가 뛰어나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다.

‘롱패스만 있는 건 아니라고.’

포르투갈전에서 한 단계 높은 세계를 체험한 이후, 성배의 기량은 확실히 물이 올라 있었다.

그리고 물오른 기량은 성배에게 자신감을 선물해주었다.

전에는 개인 돌파를 극히 자제했지만, 이제는 기회가 오면 피하지 않았다.

“라이트-필립스를 제치고 돌파합니다! 발락이 달려듭니다!”

패스할 것처럼 오른발을 뒤로 뺐더니 라이트-필립스가 발을 들며 달려왔다.

한 발을 들고 있는 사람이 빠르게 반응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라이트-필립스를 속여낸 성배는 살짝 옆으로 빠져 그를 제쳐냈고, 발락이 언제 도착할지를 재면서 전방을 살폈다.

‘역시 오늘은 왼쪽을 노려야겠지.’

벨레티 쪽으로 파고드는 말브랑크와 중앙에서 왼쪽으로 빠지는 킨이 성배의 시야에 잡혔다.

발이 빠른 편이 아니고 뒷공간을 자주 내주는 벨레티였다.

말브랑크도 발이 빠르지 않아서 크게 위력적이지는 못하겠지만, 노려볼 가치는 있었다.

킨까지 가세한다면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전방으로 길게 내지릅니다!”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성배에게 발락의 압박은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심적인 압박을 주려고 했겠지만, 킥 예비동작에 군살이 없는 성배였기 때문에 이 정도 시간이면 압박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한 건 해달라고.’

벨레티와 알렉스 사이에 성배의 패스가 투입되었다.

알렉스와 벨레티 모두 발이 빠르지 않았기 때문에 킨은 어렵지 않게 라인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킨이 헤딩으로 말브랑크에게! 말브랑크! 중앙으로 이동합니다!”

킨이 성배의 패스를 받으러 움직였을 때, 순간적으로 벨레티와 알렉스의 시선이 킨에게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탄 말브랑크는 왼쪽에서 중앙으로 이동했고, 킨의 패스가 말브랑크에게 연결되었다.

“말브랑크, 중앙으로 이동하면서 슈팅! 아! 아쉽게 빗나가고 마는 말브랑크의 슈팅!”

“하지만 지금의 공격은 위협적이었어요. 중원에서 첼시를 상대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토트넘에는 주가 있거든요? 주의 롱패스를 조금 더 활용할 필요가 있어 보이네요.”

첼시에게 주도권을 완전히 내줘버린 토트넘이었지만, 지금의 공격은 토트넘이 남은 시간 동안 보여주어야 할 플레이의 좋은 예시였다.

확실히 확 가라앉아 있었던 토트넘의 팀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살아나고 있었다.

< 낭만필드 - 125(5권 끝)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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