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26 >
“반대편으로 길게 내준 주성배의 패스가 정말 좋았어요. 패스 자체도 좋았지만, 레넌이 스피드를 뽐낼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기까지 했다는 점이 정말 대단한 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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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전방으로 길게! 베르바토프에게 이어집니다! 중앙의 킨에게, 킨의 슈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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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의 중간 차단! 바로 왼쪽의 주에게! 지체하지 않고 전방으로 때려줍니다! 킨과 베르바토프가 달립니다!”
한 번의 플레이로 토트넘 선수들은 자신들이 해야 하는 플레이를 깨달았다.
그 이후부터는 성배의 발이 바빠졌다.
토트넘에게 볼 소유권이 넘어온 순간, 거의 절반 가까이 되는 플레이에서 성배에게 볼이 연결되었던 것이었다.
‘이제 좀 빡센데.’
하지만 롱패스 시도가 잦아지다 보니, 점점 패스를 연결할 만한 공간이 없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의 롱패스가 위력적이라고 하더라도 첼시는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클럽 중 하나였다.
그런 곳에서 뛰고 있는 수비수들이 호락호락한 선수일 리 없었다.
어느새 패스를 내줄만한 공간은 점점 줄어들었고, 라이트-필립스의 압박도 부담스러워졌다.
“다시 한 번 주에게 볼이 이어집니다. 토트넘은 주의 발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 듯 보입니다.”
“너무 공격 루트가 제한되어 있어요. 주성배의 킥은 분명 위력적이지만, 예상하고 있으면 그 위력이 반감되거든요? 체공 시간이 길 수밖에 없어서 수비수들이 충분히 대처할 수 있어요.”
성배의 롱패스로 그나마 숨통이 트였던 토트넘이지만, 너무 잦은 롱패스 시도에 첼시 수비진이 적응해가면서 숨통이 다시 막혀가는 중이었다.
‘수비 잘 하네.’
그리고 성배는 라이트-필립스의 압박 속에서 볼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맨체스터 시티 시절, 윙백으로 활약했던 라이트-필립스는 윙어치고 나쁘지 않은 수비력을 보유한 선수였다.
성배의 테크닉도 그리 뛰어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 정도 압박에도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놈의 발.’
성배 자신이 수비수였기 때문에 라이트-필립스의 움직임에서 빈틈은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빈틈을 발견하는 것과 그 틈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오래전부터 자신을 괴롭혀왔던 무딘 발끝 감각은 여전했다.
‘지금이다!’
하지만 회귀 이후, 어린 시절부터 기본기를 닦은 보람은 분명 있었다.
예전보다는 훨씬 더 정교해졌고,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최소한의 감각은 있었다.
그리고 발락이 라이트-필립스를 도우러 온 순간, 성배는 라이트-필립스의 빈틈을 발견했다.
“아! 이번에는 직접 돌파입니다! 절묘하게 빠져나간 주의 돌파!”
발락이 오는 것을 보고 마음을 놓은 것인지 라이트-필립스의 압박이 잠깐 허술해졌고, 성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발락이 도착하면 어떻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뭔가 선택을 해야 했다.
아직 협력 수비가 완성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라이트-필립스의 주의력이 흐트러진 상황에서는 역시 두 선수 사이의 공간만큼 노리기 좋은 공간이 없었다.
“두 선수 사이로 빠져나와서 빠르게 올라갑니다! 빠릅니다!”
예상대로 라이트-필립스와 발락은 제대로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았고, 서로에게 미루다가 성배를 놓쳤다.
두 선수의 협력 수비가 완성되기 직전에 빠져나온 성배는 왼쪽 측면을 빠르게 돌파했다.
발락이 잠시 빠지면서 토트넘 미드필더들의 숨통도 트였다.
‘이대로 끝까지 돌파하는 건 무리야.’
성배의 스피드는 분명 프리미어리그에서도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스피드와 드리블 스피드는 별개였다.
윙어보다 빠른 발을 가지고 있어도 정교함이 떨어지기 때문에 성배의 드리블 스피드는 순수 스피드에 비하면 약간 아쉬운 편이었다.
“반대편!! 빨리 넘겨!!”
끝까지 돌파할 것이 아니라면 최대한 빨리 선택을 내려야 했다.
사람보다 볼이 빠른 것은 당연했다.
‘내가 공격에까지 신경을 써야 하나.’
보아텡-오하라 라인의 약점은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은 유망주라는 것도 있었지만, 경험이 적어 판단이 느리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약점이었다.
그래서 성배는 보아텡에게 볼을 빼주면서 다음 플레이에 대한 지시까지 내려주어야 했다.
평소라면 그럴 능력도, 이유도 없었겠지만, 지금은 일초가 아쉬운 역습 상황이었다.
“레넌에게 연결됩니다! 토트넘의 역습 기회!”
후반전이 중반까지 흐르는 동안 돌파와 짧은 패스, 공간 패스로 만들어낸 역습 기회는 거의 처음이었다.
첼시 수비진도 당황했는지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첼시도 완벽하지는 않아.’
카르발류와 알렉스는 분명 좋은 선수들이지만, 두 선수 모두 파이터형 수비수에 가까웠다.
파이터형 수비수치고는 영리한 플레이에 재능이 있는 선수들이었지만, 그래도 틈이 아예 없을 수는 없었다.
“레넌! 오른쪽에서 크로스!”
콜이 아무리 좋은 선수라지만, 모든 돌파를 막아내고 모든 크로스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빠르게 측면을 돌파한 레넌은 무사히 크로스를 올렸다.
‘뒤로 흘러라.’
그리고 성배는 선수들의 시선이 레넌에게, 그리고 박스 안의 공격수들에게 몰린 틈을 타서 한 박자 늦게 박스 안으로 침투했다.
베르바토프, 킨, 보아텡이 첼시 수비수들의 시선을 끌어주었고, 성배는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았다.
“아, 반대편으로 흐르고, 앗!”
레넌은 스피드와 돌파력에 비해 크로스와 슈팅이 부정확한 편이었다.
이번에도 레넌의 크로스가 생각보다 길었는데, 이번만큼은 그것이 복이 되었다.
‘됐다!’
레넌의 크로스가 시선에 들어온 순간, 성배는 자신에게 볼이 올 것임을 확신했다.
너무 골라인 쪽으로 붙어 있었지만, 가속이 붙어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었다.
“주, 슬라이딩!”
‘닿아라!’
왼발을 길게 뻗으면서 몸을 날렸다.
중앙 쪽의 선수들에게 집중하던 체흐가 급하게 달려왔다.
‘닿았다!’
볼과의 거리는 다이빙 헤더를 시도하기에는 너무 멀었고, 높이는 슬라이딩을 하기에는 너무 높았다.
결국, 성배는 앞으로 날아오르면서 발을 뻗었다.
다행히 왼발 인사이드에 볼이 닿았다.
그리고 강하지는 않았지만, 정확히 골대 안쪽으로 향했다.
‘이걸?’
하지만 어느새 나타난 체흐가 손끝으로 볼을 걷어냈다.
당황스러웠지만, 다행히도 다시 성배를 향해 굴러왔고, 성배는 누운 채로 사력을 다해 오른발을 휘둘렀다.
“슈팅! 아! 막았고, 다시! 골! 골입니다!”
체흐도 이번에는 막아내지 못했다.
회전하는 몸과의 마찰에 잔디가 벗겨질 정도로 오른발을 휘두른 덕분에 첫 번째 슈팅을 막기 위해 그라운드 위에 누워버린 체흐는 막을 수 없었다.
“동점! 동점입니다! 토트넘이 동점을 만들어냈습니다!”
“토트넘 선수 중 가장 눈에 띄었던 선수가 주성배 선수거든요? 제대로 한 건 해주네요!”
골 세리머니가 얌전하기로 유명한 성배라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득점이었다.
2군이 상대였고, 중요성이 덜한 칼링컵에서의 득점이 아니라 프리미어리그 데뷔골이었고, 상대는 첼시, 장소는 스탬포드 브리지였다.
득점까지 이어지는 과정 역시 쉽지 않았다.
“프리미어리그 데뷔골입니다! 토트넘 합류 이후 칼링컵에 이어 두 경기 연속골을 기록합니다!”
“이 선수가 수비수가 맞나요? 이적 후 첫 경기에서 잉글랜드 무대 데뷔골을, 리그 첫 경기에서 리그 데뷔골을 기록했어요!”
데뷔 이후 정확히 세 시즌 동안 기록한 득점이 겨우 열한 골에 불과한 성배였지만, 토트넘 이적 후 두 경기에서 두 골을 넣었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득점이 터지고 있었다.
‘확실히 이번 생에서는 운도 따라주고 있어.’
2년이 채 되기도 전에 상위 리그에 진출하는 것도,
중요한 순간마다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고 있는 것도.
마치 세상이 자신을 밀어주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 정도면 완벽한 연착륙이지.’
아스날과 첼시.
런던 라이벌 두 팀을 상대로 연속 골을 기록했으니,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었다.
***
첼시와의 경기는 성배의 활약으로 1-1 무승부로 끝났다.
첼시와의 원정 경기, 그리고 현재 양 팀의 분위기 등을 감안했을 때, 당연히 패배할 것이라 여겼던 팬들은 이 결과에 만족을 표시했다.
경기 내내 토트넘 공격의 시발점 역할을 해주었고, 득점까지 기록한 성배가 이들에게 환영받았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쩐 일로 연락을 주셨습니까?]
“알랭, 부탁할 게 있습니다.”
아스날, 첼시와의 2연전만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성배는 버크만에게 전화를 걸었다.
토트넘에 합류한 이유 중 한 가지 일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윤은 아마 이번 이적시장에서 팀을 떠나게 될 겁니다.”
윤기표는 이미 라모스 감독에게 신임을 잃은 상황이었다.
이번 이적시장에서 성배를 영입하지 않았다면, 레인저스의 라이트백 유망주, 앨런 허튼과의 스왑딜을 추진할 계획까지 가지고 있었다.
일단 이번 이적시장에서는 팀에 남았지만, 다음 이적시장에서는 팀을 떠날 것이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탁하시려는 건 뭡니까?]
“윤의 에이전트와 협의해서 이적설을 뿌릴 때 도움을 주던지, 이적할 클럽을 고를 때 연결을 시켜주던지, 기자들과 연결을 시켜주던지 도움을 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전에도 말했듯, 한 선수가 이적할 때는 그 선수의 에이전트 못지않게 다른 에이전트들의 역할도 중요했다.
성배는 버크만에게 그것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음...]
“바쁘신 건 아는데, 죄송하지만 좀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시즌이 끝나면 독립을 준비하고 있는 버크만이었다.
성배를 포함해 이미 확보한 세 명의 선수 외에 한두 명의 선수들을 더 확보하고, 사무실과 직원들을 알아보는 등 일이 많았다.
하지만 성배는 꼭 이 일을 해야만 했다.
[그걸로 얻어내고 싶으신 게 뭡니까?]
버크만은 성배를 잘 알고 있었다.
만난 지 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함께 일하면서 성배가 얻어낼 것이 없는 일에 투자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도움을 주는 대신,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 쪽 정보를 받아내고, 친분이 있는 기자들을 소개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에서의 활동에 대해 미련은 없지만, 한국에서의 이미지를 개선 시킬 생각은 있었다.
한국 시장에서 활동만 할 수 있다면 들어오는 수익도 두 배 가까이 늘어날 것이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몇 년 남지 않은 가족들의 한국 생활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늦습니다.”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박인진과 윤기표는 한국에서 스포츠 영웅 대접을 받는 선수들이었다.
그들과 주기적으로 만나는 것이 한국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윤기표와 같은 팀에서 활약하게 되면서 한국 내 여론이 좋아지는 중이었다.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면 확실히 인식을 바꿀 수 있었다.
‘지금은 잘 풀리고 있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이제 곧 올림픽이 치러질 것이었다.
올림픽이 다가오면 선수들의 군 면제 여부가 수면 위로 올라올 것이었고, 그러면 자신에게 불똥이 튈지도 몰랐다.
대비할 필요는 있었다.
[역시. 한국 시장을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포기하기엔 아깝죠. 알겠습니다. 한 번 해보겠습니다.]
에이전트 입장에서도 충분히 뚫어낼 수 있는 시장을 그대로 포기하기에는 아쉬웠다.
최근 한국 내에서 성배의 인기가 생각보다 빠르게 올라가면서 버크만도 슬슬 욕심을 내는 중이었다.
마침 윤기표와 같은 팀에 속하게 되면서 기회도 생겼고, 버크만은 이 기회를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헤르만이 아닌 버크만을 에이전트로 선택한 것이 신의 한 수로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그럼 알랭만 믿겠습니다.”
성배는 버크만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잘만 되면... 당신 회사에 투자해주겠습니다.’
연봉 및 기타 수익, 그리고 투자를 통한 수익으로 어느새 수십억의 재산을 모으게 된 성배였다.
돈이 돈을 부르는 세상에서 미래도 알고 있었으니 점점 돈이 불어나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었다.
버크만의 회사보다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투자처는 많았지만, 그의 회사도 어쨌든 업계 최고 수준으로 성장할 것이었기에 투자 가치는 충분했다.
‘나만 좋자고 하는 건 아니니까.’
에이전시 내에서의 입지와 위상, 버크만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었다.
버크만에게 생색도 낼 수 있었다.
벤제마, 나스리 등이 버크만과 함께 하기로 결정한 이상, 그들과 차별화되는 무언가가 필요하기도 했다.
< 낭만필드 - 12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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