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24 >
“잘 부탁한다고.”
프리킥을 얻어낸 제나스가 성배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성배는 토트넘에서도 프리키커 역할을 맡게 되었고, 입단 후 첫 번째 프리킥 기회를 맞이했다.
“주성배 선수가 프리킥을 준비합니다. 이번에 스퍼스에 합류한 선수인데, 프리킥까지 도맡아서 차려는 것 같습니다.”
토트넘의 기존 프리키커는 스티드 말브랑크였다.
그의 킥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다른 팀의 키커들과 비교했을 때는 평범한 수준이었다.
“주는 아약스에서 활약했던 전반기 동안에만 무려 네 골을 프리킥으로 기록했거든요? 굉장히 킥이 좋은 선수예요. 기대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번 시즌 프리킥으로만 네 골을 기록한 성배가 합류했으니, 프리키커 역할을 맡기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후우. 프리미어리그 첫 프리킥인데.’
성배는 볼을 주워든 채로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가볍게 입을 맞춘 뒤, 마음에 드는 모양이 나오도록 땅에 내려놓았다.
딱 ‘이 모양이다!’하는 루틴은 없었지만, 그날 기분에 따라 마음에 드는 모양을 찾는 것이 성배의 프리킥 루틴이었다.
‘하던 대로 하자고.’
오른발로 감아서 반대편 골포스트를 노리기 좋은 위치였다.
기존의 키커인 말브랑크가 오른발잡이였고 자신은 왼발잡이임에도 자신에게 기회를 내준 상황.
자신을 밀어주는 이 상황을 단기적이 아닌 장기적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는 확실한 결과가 필요했다.
‘아닌가? 허를 찔러볼까?’
첫 경기인 만큼 상대 선수들은 평범한 프리킥이 날아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또 허를 찌르는 것이 효과가 좋을 수 있었다.
-삐-익!
성배는 마지막까지 시선을 흔들며 자신의 생각이 읽히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때, 주심의 휘슬이 울렸고, 성배는 볼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달려들었다.
“주성배, 프리킥! 슈-웃!”
주심의 휘슬이 울렸을 때, 오른발로 처리하는 각도에 서 있었던 성배가 옆으로 크게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오른발 각도였던 위치는 왼발 각도로 바뀌었다.
벽을 만들고 있었던 아스날 선수들은 당황해서 뛰쳐나왔지만, 성배의 킥이 먼저였다.
“아!! 왼발이에요!!”
성배의 선택은 왼발 프리킥이었다.
왼발 인프런트로 감아서 가까운 쪽 포스트를 노렸다.
골대를 벗어나 골라인을 나갈 것처럼 날아가던 볼은 점점 골대 방향으로 휘어졌다.
“파비안스키!! 막지 못합니다! 들어갔습니다!! 주성배! 토트넘 데뷔 골입니다!!”
당연히 먼 쪽 포스트를 노릴 것이라 생각했던 파비안스키는 첫 스텝을 반대쪽으로 밟고 말았다.
그 한 스텝 때문에 결과가 바뀐 것이었다.
역동작에 걸린 파비안스키는 차마 몸을 날리지도 못했다.
“골이에요! 선취 득점 상황에서도 멋진 패스로 큰 역할을 해주었던 주성배 선수가 두 번째 득점은 직접 넣어버렸어요!”
파비안스키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는 사이, 성배의 프리킥은 절묘하게 감겨서 골라인을 통과했다.
토트넘 유니폼을 입고 기록한 첫 번째 득점이었다.
“좋아! 아자!”
이번 시즌 전까지는 기회가 거의 없어서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번 시즌을 통해 성배는 재미없는 골 세리머니로 유명해졌다.
잉글랜드 데뷔 골을 기록한 지금도 그 명성에 걸맞게 제자리에서 주먹을 쥐고 몇 번 흔드는 것으로 세리머니를 끝내 버렸다.
“뭐 그렇게 세리머니가 맥이 없어?”
“조금 더 화끈하게 해보라고!”
말브랑크와 제나스가 양옆에서 달려들어 성배를 덮쳐왔다.
그리고 그 위로 토트넘 동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올라탔다.
성배는 골을 넣은 것이 죽을 죄인지 잠깐 고민했다.
‘프리킥 감이 좋은데? 타이밍도 좋고.’
이번 시즌부터 맡게 된 프리킥이 정말 중요한 시기마다 치고 올라갈 계기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포르투갈전에서의 프리킥은 성장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에레디비지에 개막전에서의 프리킥은 환상적인 시즌을 만들어주었다.
‘이번 프리킥도 뭔가 큰 걸 가져다주려나?’
잉글랜드 데뷔전에서도 프리킥 득점이 터지고 나니, 성배의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프리미어리그 입성에 대한 부담으로 불편했던 마음까지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
“전반전에는 아주 좋았어! 남은 시간에도 이렇게만 해!”
전반전이 끝난 뒤, 토트넘의 라커룸에서 흥분한 남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스날과의 북런던 더비.
그것도 에미레이트 스타디움 원정 경기에서 전반전을 2-0으로 마친 토트넘 라모스 감독의 목소리였다.
“전반전에 아주 잘했고, 남은 시간에도 이렇게 해달라고 하십니다.”
다만 선수들은 한 다리 거친 뒤에야 그 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라모스 감독은 영어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어로 한 번 말한 뒤, 통역사가 그것을 듣고 통역해준 뒤에야 선수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저것들이 건방졌던 거지! 어딜 감히 북런던 더비에 2군을 내보내? 칼링컵이라고 해서 북런던 더비가 아닌 줄 알았나? 하하하.”
통역을 거쳐 귀에 들어온 라모스 감독의 말에 선수들도 웃으며 동의했다.
무대가 어떤 무대인지, 어떤 대회인지, 그런 것과 상관없이 아스날과의 맞대결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항상 기분 좋은 일이었다.
“후반전에는 조금 더 안정적이고 수비적인 전술로 바꿉시다. 포백 라인은 전진을 좀 자제하고, 미드필더 라인도 침투보다는 패스 위주로 하고. 어차피 원정이니까 마음 편히 가자고.”
홈 & 어웨이 방식으로 치러지는 칼링컵 준결승전이었기 때문에 원정에서 먼저 두 골을 넣은 토트넘은 전혀 급할 이유가 없었다.
원정에서 2-0으로 리드를 잡았다는 것은 결승 진출의 7부 능선을 넘었다는 말과 같았다.
“추가 골을 넣는 것보다는 실점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뛰어. 어차피 급한 건 저놈들이지, 우리가 아니니까.”
이제부터는 급하게 달려들 수밖에 없는 아스날의 공격을 카운터치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성배의 맹활약으로 인해 두 골을 뽑아냈고, 이 두 골은 토트넘이 확실하게 분위기를 제압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원정에서 두 골이면 완벽한 결과였고, 이제는 이 두 골을 지킬 타이밍이었다.
‘후우,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뛰어본 것이 얼마 만인지.’
프로 데뷔 이후, 자신감 하나만 믿고 뛴 적이 있었던가?
성배는 그런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경기가 더욱 특별했다.
머리 아프게 플레이 하나하나를 계산하지 않아도 충분히 할만하다는 것을 증명한 경기였다.
‘그럼 이제 진짜 내 장기를 보여줄 차례인가.’
하지만 자신의 장점은 이런 경기가 아니었다.
오늘 자신의 상대가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은 선수들이었기 때문에 이런 플레이가 통했지만, 자신의 장기는 어디까지나 지능적이고 영리한, 얄밉기까지 한 플레이였다.
후반전, 성배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다.
***
“아오, 이 자식. 짜증나!”
후반전이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월콧의 입에서 짜증 섞인 비명이 튀어나왔다.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성배 때문이었다.
‘스피드 하나만 믿고 사는 선수에게는 이게 정답이지.’
월콧에게 가속할 공간과 시간이 주어지는 상황이라면 자신도 수비하는 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공간과 시간을 내줄 리 없었다.
‘확실히 투박해.’
후반전이 시작하자마자 성배는 월콧에게 바짝 달라붙어 괴롭혀주는 중이었다.
공격적인 모습은 전반전에 충분히 보여주었고, 라모스 감독 역시 후반전에는 수비에 집중해달라 주문했다.
그렇게 시작된 밀착 수비는 월콧이 제대로 숨도 쉴 수 없도록 만들었다.
‘달릴 공간이 없는데,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밀착해서 달라붙은 성배 때문에 월콧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장기인 스피드를 살리려고 해도 공간이 없었다.
조금만 달리면 성배의 등이 앞을 가로막았고, 성배의 손이 유니폼을 잡아당겼다.
스피드를 장기로 하는 선수가 달리지 못하면 당연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월콧! 이번에도 주에게 볼을 빼앗깁니다.”
월콧에게 연결된 볼은 자연스럽게 성배의 발밑으로 옮겨갔다.
후반 초반인데도 벌써 세 번째 나오는 장면이었다.
월콧에게 볼을 연결하면 다음 순간 아무런 위화감도 없이 성배의 소유가 되어 있었다.
“잉글랜드의 미래라는 월콧인데, 주를 상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네요. 주가 한 수 위의 기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수준 차이가 날 줄은 몰랐는데요.”
이러한 수비에도 단점은 있었다.
월콧에게 볼이 이어질 것 같으면 바로 달라붙었기 때문에 상대가 조금만 정교하게 드리블을 가져가거나 생각보다 빠르게 튀어 나가면 뚫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투박한 월콧의 테크닉으로는 성배를 뚫어낼 수 없었다.
어쩌다 한 번 뚫어내더라도...
“킹이 먼저 따냅니다. 등으로 버텨내고, 골라인 아웃! 골킥이 선언되었습니다.”
뒤이어 들어오는 킹과 오하라의 백업에 속수무책으로 볼을 빼앗길 뿐이었다.
“아스날, 답이 없는 상황입니다. 두 골을 먼저 득점하고 수비에 집중하는 스퍼스의 수비를 뚫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상대가 백업 선수 위주로 나섰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스날이거든요? 그런데 토트넘의 수비가 굉장히 단단하네요. 전반기에 보여준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요!”
성배라는 한 명의 선수가 추가되었을 뿐인데, 토트넘 수비의 안정감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건강하면 국가대표라는 킹이 영리하게 수비라인을 조율하고 있었고, 성배는 상대 공격의 한 루트를 완벽히 막아 세웠다.
이번 시즌 들어서 불안해진 심봉다를 반 페르시가 그나마 괴롭혀주고 있었지만, 혼자 힘으로 경기를 뒤집는 것은 무리였다.
“아스날, 빠르게 밀고 올라옵니다! 아스날의 역습! 디아비, 앞으로 길게!”
토트넘의 볼을 빼앗은 아스날이 빠르게 역습을 시도했다.
중앙의 디아비에게 볼이 연결되었고, 디아비는 앞으로 길게 볼을 찔러주었다.
“오랜만에 월콧이 달립니다! 정말 빠릅니다!”
그리고 수비라인을 맞추기 위해 오른쪽으로 이동했던 성배가 잠시 떨어진 사이, 월콧이 달렸다.
오랜만에 달릴 공간이 생긴 월콧은 꽁꽁 막혀있었던 울분을 풀기라도 하려는 듯 사력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공간이 생긴 월콧의 침투는 정말이지 대단했다.
“어! 주! 주가 머리로 걷어냅니다!”
하지만 성배는 그것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어느새 월콧을 따라잡은 성배는 앞에서 먼저 뛰어올라 사이드라인 바깥으로 볼을 걷어냈다.
“정말 빠르네요! 원래 빠른 선수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월콧을 따라잡을 정도였나요? 놀랍네요!!”
스피드가 붙은 월콧을 보며 역습을 기대했던 아스날 팬들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중계진도 성배의 스피드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 스피드만으로 막아낸 것은 아니었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지.’
성배는 라인을 유지하기 위해 움직이면서도 월콧의 움직임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간이 생기면 월콧이 달려들 것을 알고 있었다.
월콧이 출발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성배도 출발했고, 성배가 조금 더 앞에 있었기 때문에 눈치만 챈다면 볼을 걷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뒷공간 침투는 수비수 몰래 해야 하는 거야.’
스피드만 빠르다고 뒷공간을 헤집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수비수의 시야를 벗어날 수 있는 움직임이 있어야 했고, 수비수의 예측을 벗어나는 변칙성 또한 있어야 했다.
아무리 세계 최고 수준의 스피드가 있더라도 지나치게 단순한 플레이로는 어려웠다.
“정말 오늘 월콧은 한 게 없어요! 주성배에게 완전히 막혀버렸거든요? 아직 유망주 레벨의 선수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정말 대단하네요!!”
잉글랜드 데뷔전에서부터 팬들에게 자신을 제대로 어필한 성배였다.
성배는 단 한 경기로 에레디비지에에서 프리미어리그로의 연착륙에 성공했다.
< 낭만필드 - 12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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