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12 >
“네가 차는 게 낫겠어.”
데푸르가 말했다.
“내가?”
평소 같았으면 데푸르가 처리했을 프리킥이었다.
자신보고 처리하라는 데푸르의 말에 성배가 반문했다.
“그래. 오늘 보니까 네 컨디션이 좋은 것 같은데, 네가 차. 네가 프리킥을 못 차는 것도 아니고. 확률 높은 사람이 차야지.”
허투루 날려서는 안 되는 프리킥이었다.
어떻게든 승점을 따내기 위해서는 꼭 살려야 할 기회였다.
“그래. 내가 차지.”
기회를 준다면 땡큐였다.
오늘은 뭘 해도 되는 날이었다.
욕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데푸르와 주가 뒤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각도로 봤을 때, 데푸르가 처리할 것으로 보이죠? 주가 왼발로 올려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데푸르의 오른발이 더 좋아 보이는데요.”
데푸르가 오른발 각도에서, 성배가 왼발 각도에서 준비 중이었다.
-삐-익!
그리고 주심의 휘슬이 울렸다.
“데푸르, 달려듭니다! 아! 그냥 넘어갑니다!”
주심의 휘슬이 울리고 데푸르가 볼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데푸르가 먼저 출발했을 때, 성배는 재빨리 데푸르가 서있던 위치로 옮겨갔다.
데푸르는 그대로 볼을 넘어갔고, 뒤따라 출발한 성배가 오른발을 들어 올렸다.
‘벽이 흔들렸어.’
데푸르가 처리할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벽을 구성했던 포르투갈 선수들이 움직였다.
하지만 데푸르는 미끼.
이어서 볼에 도착한 성배는 흔들린 벽을 침착히 바라보며 빈틈을 찾았다.
“주, 슈팅!”
성배의 프리킥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정석에 가까웠다.
무회전 프리킥을 비롯한 여러 가지 테크닉들도 가능은 했지만, 능숙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정확하게 감아서 때리는 프리킥은 정확한 편이었다.
‘지금 가장 좋은 선택은...’
정확한 킥은 성배의 큰 무기였다.
하지만 앞에서도 설명했듯, 그에 못지않은 또 하나의 무기가 경험과 노련함이었다.
노련한 성배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다른 선수들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그것까지 전부 반영해 프리킥을 처리했다.
“아! 낮게 깔아 찹니다! 히카르두!”
성배의 선택은 낮은 프리킥이었다.
데푸르의 움직임에 속은 포르투갈 벽은 이미 한 번 흔들렸고, 이어진 성배의 움직임에 당황했다.
그리고 감아서 반대편 골문을 노릴 거라 생각했다.
그 허를 찔러 깔아 찬 슈팅은 벽을 세운 포르투갈 선수들의 발밑을 지나서 골문을 향해 빠르게 굴러갔다.
“골! 골입니다! 주! 프리킥으로 득점을 만들어냅니다! A매치 데뷔골입니다!”
벽을 세운 선수들은 물론 나머지 포르투갈 선수들, 심지어 벨기에 동료들까지 모두 속인 성배의 프리킥이었다.
골키퍼인 히카르두 역시 마찬가지였다.
허를 찔리면서 한 박자 늦어버린 히카르두는 성배의 프리킥을 막지 못했고, 볼은 빠르게 포르투갈의 골문을 열었다.
“멋진 프리킥이었어요! 완벽하게 상대의 허를 찌른 멋진 프리킥! 역시 주성배 선수의 킥은 굉장하네요!”
성배의 득점에 경기장을 가득 메운 벨기에 홈팬들이 열광했다.
“오늘, 주성배만 축구하고 있습니다! 혼자서 축구합니다! 오늘의 주는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평소에도 성배의 플레이는 견실했다.
항상 안정적인 수비를 보여주었고, 오버래핑을 통한 공격 가담도 위력적이었다.
정확한 킥을 앞세워 좋은 장면도 많이 만들어 주었다.
기복이 없는 안정적인 플레이.
하지만 상대적으로 임팩트가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영리한 플레이가 주성배 선수의 장점이었지만, 다른 말로 하면 조금 조심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이 선수가 적극적으로 움직이면 이런 장면들을 만들어낼 수 있어요!”
평소와는 분명 다른 플레이였다.
평소였다면 미구엘과의 맞대결이 그렇게 많이 나왔을 리 없었다.
그리고 맞대결을 펼친다고 하더라도 정면으로 붙기보다는 동료와의 패스를 통해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성배는 적극적으로 맞대결을 주도했고, 굉장히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확실히 많이 좋아졌어.’
자신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보여주는 홈팬들 앞에서 세리머니를 마친 성배는 자신의 플레이를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많이 좋아졌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 조금 더 적극적이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생겼다.
‘아무리 오늘의 감각이 특별하다고는 하지만.’
오늘이 특별한 날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특별한 날이라도 기본적인 기량이 갖춰져 있지 않다면 이런 활약을 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미구엘을 이 정도로 털어버릴 수 있는 기량이라면, 평소에도 충분히 적극적일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감이 붙네. 조금 더 욕심을 내도 되지 않을까.’
오늘의 맹활약이 성배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고 있었다.
점점 더 자신에 대한 확신이 생기는 상황에서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준 것이었다.
오늘의 활약이 성배의 선수생활에 의미 있는 분기점이 될 것은 분명했다.
***
포르투갈과의 경기는 2-2 무승부로 끝났다.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한 성배는 당연히 벨기에 팬들이 꼽은 최고의 선수로 뽑혔다.
그리고 Man Of the Match 역시 성배의 차지였다.
UEFA는 물론이고 FIFA 역시 공식 홈페이지에 성배의 활약상을 메인으로 다루었다.
당연히 유럽 내 빅클럽들도 성배에 대한 관심의 정도를 높였다.
이제 곧 이적시장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성배에게 관심을 표하는 클럽들이 늘어나면서 에이전트인 버크만과 소속팀 아약스도 바빠졌다.
“지난 경기부터 폭발하고 있는 주, 오늘도 굉장합니다! 파사넨을 밀어내며 돌파 시도!”
그런 상황 속에서 성배는 핀란드로 날아와 핀란드와의 A조 8차전에 참여했다.
핀란드에는 포르투갈전을 통해 자신감을 충전한 성배를 막아낼 선수가 없었다.
‘나와!’
정당한 어깨 싸움과 파울과 몸싸움의 경계선에 걸칠 정도의 팔 사용으로 파사넨을 밀어낸 성배는 측면 깊숙이 파고들었다.
상대가 핀란드라고 해서 벨기에 공격수들의 제공권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말의 기대감은 있었다.
“중앙으로 길게! 크로스!”
성배의 크로스가 중앙으로 투입되었다.
‘헤딩은 바라지도 않아. 발에만 맞춰라.’
애초에 헤딩 슈팅을 바라고 넣어준 크로스가 아니었다.
평소보다 높은 궤적을 그린 성배의 크로스는 중앙에 모여있는 양 팀 선수들의 머리 위를 지나 반대편에서 쇄도하던 데 뮬에게 이어졌다.
“발리 슈팅! 아! 너무 높이 뜨고 맙니다! 어이없이 빗나가는 데 뮬의 슈팅! 아쉽습니다!”
처리하기 쉬운 볼은 아니었다.
반대편에서 길게 넘어온 볼을 논스톱 발리로 연결하는 것은 분명 어려운 플레이였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어이없이 빗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아... 케빈이라도 빨리 합류해라.’
지금 벨기에 대표팀의 공격에는 답이 보이지 않았다.
미랄라스와 아자르, 데 브라위너 등이 합류하는 몇 년 뒤를 노리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 보였다.
‘어쩔 수 없지. 알고 있었던 거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었다.
당장은 답답하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세계를 호령할 팀이 만들어질 것이었다.
그때까지는 자신의 입지만을 생각하면서 플레이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좋았다.
‘할 수 있는 것만 하자. 내 포지션과 역량으로는 그것까지가 한계야.’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파악해야 했다.
자신은 메시도, 호날두도 아니었다.
혼자서 팀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릴 실력도 없었고, 포지션도 그런 포지션이 아니었다.
“주의 멋진 돌파가 이렇게 마무리되네요. 아쉽습니다.”
중계진의 반응처럼 성배의 플레이는 나쁘지 않았다.
지금은 여기까지가 성배의 한계였다.
‘나는 지금 좋아. 지난 경기에서부터 뭔가 달라진 게 느껴진다.’
지난 포르투갈과의 경기가 성배에게 남겨준 것이 많았다.
플레이에 자신감이 생겨 적극적인 플레이를 꺼리지 않게 되었고, 자신감이 부족해 한 박자 늦었던 몸싸움도 반 박자 정도는 빨라진 것 같았다.
이미 완성된 기량을 가지고 있어 나이에 따른 피지컬의 상승 외에는 성장의 여지가 크지 않았던 성배에게는 의미가 컸다.
***
‘하하, 콤파니도 그립네.’
열심히 뛰어왔지만, 실점을 막을 수 없었다.
핀란드의 알렉세이 에르멘코에게 두 번째 실점을 하면서 0-2의 리드를 허용하고 말았다.
성배가 아무리 분전해도 소용이 없었다.
아무리 기회를 줘도 잡지 못했던 이유를 보여주듯 한 수 아래라 평가되는 핀란드 공격수들에게 고전하는 클레멘트.
아약스와 브레멘, 명문 클럽에 합류했지만,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5년 만에 주필러 리그로 복귀한 옐레 반 담.
‘토마스도 아직 완벽하진 않아.’
그리고 그런 동료들 사이에서 자신의 플레이마저 흔들리는 베르마엘렌.
수비형 미드필더로 나섰지만 센터백과 수비형 미드필더의 중간쯤 되는 플레이로 이도 저도 아닌 모습을 보여주는 드 망까지.
오늘의 벨기에 수비는 그야말로 형편없었다.
“포르투갈전의 피로가 풀리지 않은 겁니까? 아니면 북유럽 원정이 부담스러운 겁니까? 오늘 벨기에 대표팀의 상태는 정말 좋지 못합니다.”
중계진마저도 자국 대표팀을 향해 쓴소리를 내뱉을 정도였다.
벨기에 축구가 왜 암흑기에 빠졌는가를 알 수 있는 경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뭐라고 한 번 할까.’
자신은 충분히 다른 선수들에게 아쉬움을 토로할 자격이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한 번쯤 쓴소리를 할 필요성도 있었다.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접었다.
‘어차피 여기까지인 선수들인데. 굳이 내가 뭐라 할 필요는 없지.’
가능성이 있는 선수들이라거나 앞으로도 벨기에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활약할 선수들이라면 뭐라고 한마디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베르마엘렌을 제외하면 곧 대표팀에서 사라질 선수들이었다.
‘굳이 얼굴 붉힐 필요 없지.’
생각을 마친 성배는 베르마엘렌을 향해 걸어갔다.
다른 선수들이라면 몰라도 베르마엘렌은 조금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토마스. 지금 뭐하는 거야.”
이미 풀이 죽어있는 베르마엘렌이었다.
플레이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도 프로라면 경기 중에 이런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된다는 것이 성배의 생각이었다.
풀이 죽고 자책하는 것은 경기 끝난 뒤에 해도 충분했다.
“아, 미안. 오늘 영 이상하네.”
베르마엘렌도 오늘 자신의 플레이가 좋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 너 오늘 형편없어.”
성배는 직설적으로 베르마엘렌을 질책했다.
“주변 동료들이 다 흔들리고 있지.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너까지 흔들리면 어쩌자는 거야. 다른 선수들이야 저 정도가 한계라고 해도 너는 아니잖아.”
동료라고 해도 봐주지 않는 성배의 혹평에 놀란 듯했다.
놀라든 말든 성배는 말을 이어갔다.
“너는 평소대로만 해도 핀란드 정도는 가볍게 막을 수 있잖아. 능력이 없는 건 불쌍할 뿐, 욕먹을 일이 아니지만, 능력이 있어도 그걸 보여주지 못하는 건 욕 좀 먹어야지.”
능력이 없었던 전생의 자신은 항상 열심이었고, 사력을 다했다.
당연히 욕먹을 이유는 없었다. 불쌍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능력이 있음에도 다른 요인으로 인해 흔들려서 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베르마엘렌이 못마땅했다.
“미안. 이제부터는 제대로 해볼게.”
베르마엘렌도 본인의 플레이가 별로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다.
오늘 경기는 원정인 데다가 이미 기세까지 완전히 빼앗겼기 때문에 승점을 따내기 힘들었다.
본 게임은 어차피 2008 올림픽 세대가 대표팀에 합류하는 시점 이후였다.
그전까지는 황금세대가 합류하는 시점에서 베테랑이 되는 80년대 후반생들의 발전만 이루어진다면 성공이었다.
< 낭만필드 - 11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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