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11 >
“프리킥 올립니다! 중앙으로!”
성배는 제공권에서 벨기에가 앞선다고 확신했다.
‘제공권에 자신이 있다면, 평범하게 올리는 게 나아.’
평범하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선수들이 선택하는 방법이라는 뜻이었다.
많은 선수가 선택하는 이유는 그것이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이었다.
“펠라이니, 헤더!”
193cm의 마루앙 펠라이니.
그가 페널티박스 안에서 솟구쳐올랐다.
포르투갈의 센터백 안드라데가 함께 뛰어올랐지만, 펠라이니의 높이가 머리 반 개 이상 높았다.
“골! 골입니다! 펠라이니! 골문 구석으로 슈팅, 선취 골을 뽑아냅니다!”
역시 펠라이니의 제공권은 굉장했다.
장신 숲에서도 눈에 띄는 나무였던 펠라이니는 볼에 머리를 가져다 대면서 멋지게 방향을 바꿔놓았다.
“포르투갈에게 밀리고 있었던 벨기에가 먼저 득점합니다.”
“이건 매우 좋은 결과네요! 한 골을 미리 득점했으니,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경기를 운영할 수 있겠어요.”
공격의 날카로움이 부족해 그 반작용으로 수비까지 밀려버렸던 벨기에였다.
하지만 선취 골을 넣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공격에 대한 부담감을 조금 덜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의 킥은 정말 대단합니다. 이번에도 정확하지 않았습니까?”
“정확하게 펠라이니의 머리를 노렸죠. 저런 킥을 흔히 택배라고 하지 않습니까? 주성배 선수에게서 택배 기사의 자질이 보여요.”
선취 골로 조금은 편하게 경기를 이끌어갈 수 있게 된 벨기에였다.
호날두가 없었기 때문에 어쩌면 승점 3점을 추가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
‘빌어먹을 녀석. 도대체가 도움이 안 돼.’
속에서부터 치밀어오르는 욕설을 가까스로 삼켜낸 성배였다.
골대 안에서 볼이 구르고 있었다.
이번에는 벨기에의 골대였다.
“아, 호프킨스. 이런 실점은 내주면 안 되죠. 상대가 잘해서 실점하는 거야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실수는 줄여야 하는데요.”
쁘띠의 롱패스가 벨기에 진영 깊숙이 투입되었고, 포스티가가 헤딩으로 볼을 흘렸다.
그런데 그 볼을 막아내야 했던 호프킨스가 정신과 함께 나니를 놓쳐버렸고, 나니의 슈팅이 골문을 갈랐다.
19세의 나이에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데뷔했던 시망을 4순위로 밀어내고 윙어 3순위를 차지한 선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연결이 되고 있는 나니는 분명 위력적인 선수였다.
하지만.
호프킨스가 이렇게 어이없이 놓칠 선수는 아니었다.
“전력에서 밀리는 벨기에이기 때문에 실수 하나하나가 치명적일 수 있거든요. 이번에 나타난 것처럼 말이죠.”
챔피언십에 속해있는 스토크 시티의 주전 라이트백 호프킨스.
하지만 자신의 역량을 넘어서는 기량을 갖춘 선수들을 상대할 때는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오른쪽이 계속 이렇게 뚫려서야. 저런 선수한테 밀려난 반덴 보레는 도대체 어디까지 망가진 건지.’
콤파니와 함께 벨기에의 미래라 불리며 화려하게 데뷔한 반덴 보레.
열일곱 살이었던 2004년에 A매치에 데뷔했던 그는 3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풀타임 선발로 활약하지 못했다.
이번 시즌 20경기에, 그것도 선발과 교체를 오가며 출전한 것이 커리어에서 가장 많은 경기를 소화한 기록이었다.
화려했던 유망주 시절이 그의 전성기였다.
‘쯧. 어쩔 수 없지.’
벨기에 대표팀에 그다지 충성심이 없는 성배가 이 정도였으니, 다른 선수들의 기분이 어떨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는 암흑기에 빠져버린 벨기에였다.
‘빨리 커서 올라와라. 아무리 관심이 없다지만, 이렇게 무기력한 건 짜증나니까.’
유스 대표팀에서 열심히 구르고 있을 황금세대의 일원들을 간절히 기다릴 뿐이었다.
전반 종료 직전에 만회 골을 허용한 벨기에는 이후 포르투갈에게 완전히 기세를 내주고 말았다.
후반 시작과 동시에 포르투갈의 공격이 불을 뿜었다.
“왼쪽 측면이 또 뚫립니다!”
자신의 실수로 만회 골을 내주고도 호프킨스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호프킨스가 계속 나니에게 돌파를 허용하는데 포르투갈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포르투갈은 성배에게 꽁꽁 막혀있는 콰레스마를 포기하고 나니를 중심으로 활용하며 공격을 전개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나니! 호프킨스가 따라가질 못합니다!”
나니의 돌파를 방해할 수 있는 선수가 없었다.
호프킨스가 해줬어야 했지만 실패했고, 펠라이니의 백업도 늦었다.
‘하필이면 또 안 어울리게 측면을 뚫어서...’
호날두보다도 심한 것이 나니의 개인 플레이였다.
하지만 신이 나면 호날두에 빙의하는 것도 나니였다.
호프킨스가 제대로 수비해주지 못하면서 나니의 기세를 올려주었고, 기세가 오른 나니는 무슨 플레이를 해도 벨기에에 위협이 되고 있었다.
“중앙으로 크로스! 중앙에 포스티가!”
호프킨스가 워낙 무력하게 뚫려버린 덕분에 벨기에 수비진의 전열이 갖춰지지 못했다.
게다가 벨기에 센터백들은 모두 어린 선수들이었고, 베르마엘렌은 몰라도 베르통헨은 데뷔전이었다.
당연히 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헤더! 아... 골입니다. 벨기에, 결국 리드를 지켜내지 못합니다.”
포르투갈이 만성적인 스트라이커 부재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유럽 무대에서 나름의 위치를 차지한 선수들은 꾸준히 나왔다.
포스티가 역시 어느 정도 능력이 있는 선수였다.
자유로운 상황에서의 헤더를 놓칠 리 없었다.
“이렇게 되면 벨기에가 골치 아플 수밖에 없는데요. 전력에서도 밀리고 분위기까지 내줬는데 리드까지 내주면 답이 없죠.”
또 한 번의 패배가 눈앞에 다가왔다.
3승 1무 3패의 벨기에는 폴란드와 포르투갈, 세르비아에 이어 4위에 머물러 있었다.
유로 2008 본선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승리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본선을 노리기에는 힘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
‘오늘은 최소한 무승부라도 따내야지.’
다행히 벨기에와는 별개로 성배의 상황은 좋았다.
전반전 초반에 몇 번 성배에게 막힌 뒤로 콰레스마는 자멸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안 풀리는 날의 콰레스마였다.
콰레스마의 플레이가 좋지 않으니 성배가 살아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다시 한 번 콰레스마의 볼을 빼내는 주! 빠르게 역습을 전개합니다!”
콰레스마는 적어도 오늘만큼은 성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성배는 오랜만에 볼을 건네받은 콰레스마를 또다시 좌절하게 만들고 빠르게 전방으로 올라갔다.
‘이번에 뭐라도 해야 하는데.’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었다.
벨기에는 점점 더 포르투갈의 페이스에 말려가는 중이었고, 지금은 분위기를 전환할 수 있는 플레이가 필요했다.
“오늘 주성배 선수가 정말 좋거든요? 뭐라도 해줬으면 좋겠네요!”
성배의 전진에 중계진도 흥분하기 시작했다.
답답한 경기 상황에서 유일하게 시원한 플레이를 보여주는 성배였다.
중계진은 물론 벨기에의 팬들도 공수에서 모두 완벽한 경기를 펼치고 있는 성배에게 기대를 걸었다.
‘오늘은 뭘해도 될 것 같다.’
빠르게 달리는 성배의 앞을 티아구가 막아섰다.
벨기에 선수 중 가장 포르투갈을 긴장하게 하는 선수가 성배였다.
그것을 증명하듯 앞을 막아선 티아구의 표정이 비장했다.
‘미안. 붙어줄 생각 없어.’
그렇게까지 긴장하고 있으면 무서워서 붙어볼 생각도 못 하겠잖아.
티아구와 굳이 일대일 승부를 할 필요는 없었다.
제대로 필을 받아서 평소 잘 하지 않던 개인 돌파도 많이 시도했지만, 역시 자신은 다른 선수들을 이용해 돌파하는 쪽이 어울리고 마음도 편했다.
“무딩가이와의 2대1 패스! 간단히 티아구를 제쳐냅니다!”
다리에 힘을 주고 성배의 돌파에 대비했던 티아구는 2대1패스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그 사이 옆으로 돌아서 가볍게 티아구를 제쳐낸 성배는 무딩가이에게 볼을 돌려받고 계속 측면을 달렸다.
‘기분 좋다.’
알베스나 마이콘, 카를로스 등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뭘 해도 다 통하니 뭔가에 취한 기분이었다.
선수들에게 가끔 찾아온다는 그날.
오늘이 성배의 그날이었다.
‘뚫을 수 있을 것 같다.’
콰레스마가 볼을 빼앗기고 티아구까지 간단히 돌파당한 지금, 미구엘이 마지막으로 성배의 돌파를 저지하러 나섰다.
하지만 경기 내내 성배에게 농락당하고 있는 미구엘이었다.
성배도 자신감이 넘쳤다.
‘나도 치명적인 척 좀 해보자.’
측면 돌파의 로망은 역시 치고 달리기였다.
성배에게도 그런 로망이 있었다.
전생에서는 스피드가 죽고 피지컬마저 받쳐주지 않아 시도해본 적도, 성공해본 적도 손에 꼽혔다.
하지만 지금은 스피드도 있었고, 피지컬도 많이 발전했기 때문에 시도해봄 직했다.
“멀리 차 놓고 돌파 시도! 빠릅니다!”
생각을 끝내자마자 볼을 길게 때려 넣었다.
그리고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볼을 따라 달려 들어갔다.
‘오늘은 나한테 양보해!’
스피드에는 자신이 있었다.
미구엘도 굉장히 빠른 선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성배가 미묘하게나마 조금 더 빨랐다.
그리고 자리 잡고 있다가 뒤돌아 출발해야 하는 미구엘보다 이미 가속이 붙어있었던 성배가 스피드 싸움에서 유리한 것이 당연했다.
‘나 이제 꽤 괜찮다고.’
그리고 또 한 번 팔을 뻗어 피지컬 싸움을 유도했다.
물론, 직접적으로 비교하면 미구엘보다 성배의 피지컬이 꽤 부족했다.
하지만 스피드를 이용해 좋은 자리를 선점하고 미리 어깨를 집어넣은 성배였다.
어깨 싸움에서 스피드 못지않게 중요한 경험은 성배의 가장 큰 무기였다.
“미구엘이 먼저 떨어져 나갑니다! 주, 텅 빈 측면을 지배합니다!”
미구엘마저 떨쳐낸 지금, 성배를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중앙에서 과연 받아줄 수 있나.’
하지만 여기까지 돌파하고 나서부터가 고민의 시작이었다.
중앙으로 크로스를 올려줘도 받아줄 선수가 없었다.
에밀 음펜자와 무사 뎀벨레의 기량은 상대 수비수들을 이겨내기 벅찬 수준이었다.
벨기에의 헤딩머신, 펠라이니가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좀 필요했다.
‘지금은 차라리...’
생각을 마친 성배가 중앙으로 볼을 투입했다.
평소와 같은, 평범한 크로스처럼 페널티박스 쪽으로 투입한 크로스는 아니었다.
대각선 방향 뒤쪽으로 빼준 성배의 패스는 페널티박스 바깥에서 자리를 잡던 데푸르를 향했다.
‘차라리 중거리 슈팅이 확률이 더 높아.’
물론 득점 확률은 페널티박스 안에서 더 높았다.
하지만 지금 벨기에의 상황을 보면 차라리 데푸르의 중거리 슈팅에 기대하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데푸르, 한 번 접고! 그대로 슈--”
상대의 슈팅 페인트로 상대의 태클을 피한 데푸르가 다시 슈팅 자세를 잡았을 때, 티아구의 태클이 뒤쪽 대각선 방향에서 들어왔다.
데푸르는 슈팅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삐-익!
“파울! 파울이 선언됩니다! 좋은 위치에서 벨기에가 프리킥을 얻어냅니다!”
굉장히 좋은 위치에서의 프리킥이었다.
벨기에로서는 선취 골 이후 최고의 기회를 맞이했다.
데푸르도 별일 없다는 듯 바로 일어났다.
‘공격수 좀 나와라.’
이번에도 믿음직한 공격수 한 명만 있었으면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 있었다.
벨기에 국가대표 공격수 음펜자는샬케에서 데뷔해 데뷔 시즌 15경기 6골, 두 번째 시즌 27경기 13골 1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큰 기대를 받았던 2년 차 시즌이 커리어 하이였다.
이후로는 커리어 로우를 갱신하는 중이었다.
뎀벨레는 아직 제대로 성장하지도 못했고, 스트라이커지만 득점 빼고 다 잘하는 선수였다.
“오른발잡이라면 직접 슈팅이 가능한 위치입니다. 벨기에의 오른발 키커라면 역시 데푸르가 처리할까요?”
중앙으로 올려주는 프리킥이라면 무조건 성배가 처리했지만, 슈팅으로 이어질 때는 달랐다.
왼발 각도라면 성배도 종종 처리했지만, 역시 직접 슈팅은 데푸르가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왼발잡이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주성배 선수의 오른발도 어지간한 선수보다 좋거든요? 누가 시도할지는 때리는 그 순간까지 몰라요.”
프리킥 위치에 볼이 놓였다.
그리고 뒤에서 성배와 데푸르가 나란히 대기했다.
< 낭만필드 - 11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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