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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필드-47화 (22/356)

< 낭만필드 - 047 >

‘좋아. 일단 분위기는 괜찮네.’

챔피언스리그에서 펼쳐진 첼시와의 경기 이후, 축구팬들은 성배를 뛰어난 선수로 인정했다.

로번에게 경기 내내 고전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크게 밀리지도 않은 선수를 그저 유망주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 건 당연한 거지만, 내 플레이는 당연한 건 아니었지.'

비록 경기에서는 첼시에게 0-1로 패배하고 말았지만, 첼시보다 안더레흐트가 많은 것을 얻어낸 경기였다.

어차피 처음부터 첼시가 이길 것이라 예상되었던 경기였고, 첼시의 승리는 당연하고 얼마나 크게 이길지에 관심이 쏠렸던 경기였다.

그런 경기였으니 겨우 한 골만을 내주고 패배한 안더레흐트 쪽에 더 관대한 평가가 내려지는 것은 당연했다.

“성배야, 오늘은 만나는 사람마다 네 이야기 많이 하더라. 하긴, 내가 보기에도 첼시전에서는 정말 잘 뛰었으니까.”

“역시. 다리가 풀리고 입에서 피 맛이 날 때까지 열심히 뛴 보람이 있었네요.”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선수는 성배일 수밖에 없었다.

콤파니가 빠진 안더레흐트 수비진을 통제한 타이히넨.

램파드와 에시엔을 상대로 중원에서 필사적으로 뛰어다닌 드 망, 즐라코프.

그들도 인상적인 활약을 펼쳐주었지만, 첼시 공격의 핵심이나 다름없는 로번과 맞붙어 어떻게든 막아낸 성배만큼의 임팩트는 없었다.

"말만이 아니라 정말로 꽤 하는구나. 하하."

"인터넷에 나온 그대로죠."

경기 후 작성된 대부분의 기사나 칼럼들이 홈에서 생각보다 무기력했던 첼시와 부진했던 드록바, 더프 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안더레흐트와 성배에게 초점을 맞춘 칼럼들도 적지 않았다.

스탬포드 브릿지에서는 특히 강했던 첼시가 생각보다 부진했던 것도 좋은 기삿거리였지만, 무명에 가까운 상황에서 단 한 경기로 관심을 끌어들인 성배에게 집중한 기자들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주성배는 벨기에의 해답이 될 수 있을까?]

[벨기에가 주성배를 잡아야 하는 이유.]

그리고 그중에서는 어떻게든 벨기에가 성배를 끌어들여 국가대표로 차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았다.

현 벨기에 국가대표 레프트백에 가장 가까운 올리비에 데샤흐트를 밀어내고 주전 자리를 차지한, 벨기에에서 벌써 2년 반이 넘는 시간을 거주한 열여덟짜리 어린 선수.

프랑스계, 네덜란드계, 독일계가 국가를 이뤘기 때문에 자신들끼리는 싸우지만 다른 국가 출신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벨기에가 탐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정도 분위기면 U-19 유로대회 출전은 어렵지 않겠네요. 그 전에 국적 취득 허가만 나면요. 월드컵 예선은 아쉽게 그 전에 국적 취득 허가가 안 나와서 기대하는 것도 못했지만.”

“하나하나 이뤄지는구나. 자식, 언제 이렇게 컸나. 축구하고 싶다고 허락받으러 들어와서 혼자 울먹이던 게 엊그제 같은데.”

아직 국적 취득 허가가 나지는 않았지만, 벨기에 축구협회를 통해 알아본 결과 거의 마무리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월드컵 예선을 몰라도 U-19 대회에서는 성배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에 협회 측에서도 꽤나 힘을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절차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성배가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다는 것도 빠른 처리를 가능하게 해주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제 슬슬 한국에도 네 이름이 알려지는 것 같던데... 그건 어떻게 할 생각이니?”

“뭐,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그냥 알아서 떠들라고 두는 거죠, 뭐. 일단 아직까지는 그렇게 많이 알려진 것도 아니고, 아는 사람들만 아는 수준이니까요. 유명해지기 전에 확실히 여기서 자리를 잡아야죠.”

주필러 리그에서만 경기에 나설 때, 한국 축구팬들은 성배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주필러 리그 자체가 인기가 없었고, 그리 높은 평가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성배의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 자체가 없었던 것이었다.

기자들은 팬들이 관심 있어 할 만한 기사를 작성해야 했고, 주필러 리그에 관심이 많은 축구팬 개인이 올린 소식은 사람들이 많이 보지 않았다.

'확실히 별들의 전쟁...'

하지만 챔피언스리그 무대는 달랐다.

이번 시즌을 앞두고 2002 한일 월드컵의 영웅들, 박인진과 윤기표가 나란히 프리미어리그로 무대를 옮기면서 해외축구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귀화 결정이 조금만 더 늦었으면 큰일날 뻔했어.'

최고의 인기 구단이자 프리미어리그 최강을 자부하는 명문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한 박인진.

그리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비롯해 프리미어리그를 지배하는 4개의 강팀 뒤를 바짝 뒤쫓는 토트넘 핫스퍼에 입단한 윤기표.

그들의 영향으로 한국에서 프리미어리그의 인기가 급격히 높아지고 있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최근 가장 핫한 클럽인 첼시에 대한 관심도 높을 수밖에 없었다.

‘휴... 1, 2년만 더 지났으면 큰일 날 뻔했네. 2005년이라 다행이야.’

그래도 아직은 프리미어리그의 인기가 그렇게까지 높은 상황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1년만 더 지나면 박인진 선수의 영향으로 해외축구 경기를 시청하기 시작한 팬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었다.

만약 그때 첼시를 상대로 좋은 모습을 보였으면 자신도 엄청난 관심을 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귀화 이후 엄청나게 까였겠지. 나라 팔아먹은 사람처럼.’

귀화를 결정함으로써 한국 팬들에게 욕을 먹는 것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욕을 먹는 것이 기쁠 리 없었다.

조금이라도 덜 먹고 싶었고, 논란이 적기를 바랐다.

아직 한국 팬들의 자신에 대한 관심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이 정도에서 제발, 일단은 관심을 그쳐주길 바랄 뿐이었다.

‘제발... 백준호 이상의 관심은 가져주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일본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해 FC 바젤을 거쳐 분데스리가에 입성해서야 겨우 어느 정도의 인지도를 얻었던 백준호.

딱 그만큼의 관심만 자신에게 가져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FC 바젤 시절에 챔피언스리그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던 백준호지만, 그 관심이 오래가지는 않았고, 성배도 딱 그 정도의 관심을 바랐다. 그 이상이 되면 골치 아팠다.

'귀화의 임팩트가 크긴 하지만.'

하지만 그때보다 인터넷 활성화가 조금 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성배에게는 백준호에게 없었던 이슈거리가 있었다.

바로 벨기에로 귀화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성배의 귀화 소식을 쉽게 알 수 있다는 점도 변수였다.

벨기에 청소년 대표 유니폼을 입고 대회에 출전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성배의 귀화 소식을 모두가 알 수 있게 될 것이었고, 잠시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했을 성배에 대한 관심은 그 순간, 불이 붙을 것이었다.

게다가 그 후에도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일정이 네 경기나 더 남아있었기 때문에 일단은 욕먹을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최대한 빨리 잊혀지기를 바라야겠지.’

인터넷에서의 이슈들은 금방금방 지나간다.

하나의 이슈에 벌떼처럼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또 다른 이슈가 나타나면 또 한 번에 우르르 몰려가기 때문이었다.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챔피언스리그 탈락 후에는 자신에 대한 소식을 듣기 힘들 것이었다.

일단은 빨리 자신을 잊어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욕 먹는 건 당연해. 욕을 안 먹을 수는 없겠지. 그건 알고 있다고.'

물론, 자신이 욕을 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배도 사람인지라 어차피 욕을 먹을 거라면 잠깐, 조금 먹고 끝내고 싶었다.

***

첼시와의 경기 이후, 데샤흐트와의 주전 경쟁은 성배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고 말해도 무방했다.

첼시전에서 거의 다리가 풀릴 때까지 뛰었기 때문에 다음 5라운드 경기에서는 휴식을 취했지만, 6라운드 경기에 다시 성배가 선발로 나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2차전인 레알 베티스와의 홈경기에서도 성배가 선발이었다.

‘이건 진짜 너무한 거 아닌가?’

그리고 성배는 오늘도 그라운드 위를 열심히 구르는 중이었다.

레알 베티스는 같은 조에 속한 다른 클럽들, 첼시나 리버풀과 비교하면 그나마 안더레흐트가 해볼 만한 팀이었다.

지난 시즌에 돌풍을 일으키며 4위를 차지해 모두를 놀라게 했지만, 전문가들은 이번 시즌 베티스가 리그에서 10위권 바깥으로 밀려날 거라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즌 초반 모습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로번에 이어서 호아킨이라니. 나 참...’

하지만 성배는 고전하고 있었다.

바로 지금도 앞에서 부지런하게 움직이며 성배를 흔들려 하고 있는 한 선수 때문이었다.

호아킨.

풀네임은 호아킨 산체스 로드리게스.

스페인이 자랑하는 클래식 윙어이자 점점 사라져가는 클래식 윙어들의 마지막 희망인 바로 그 선수였다.

레알 마드리드 이적이 확실시되다가 데이비드 베컴의 레알 마드리드 이적과 맞물려 좌초되면서 부진에 빠지나 싶었던 호아킨은 지난 시즌, 완벽히 살아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리그 어시스트 1위.

중하위권 클럽인 레알 베티스의 챔피언스리그 진출.

모두 호아킨 혼자서 만들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2004/05시즌의 호아킨은 프리메라리가 MVP를 거론할 때 항상 세 손가락 안에 꼽혔던, 최고였다.

‘그래. 상대하는 선수가 뛰어난 선수일수록 나한테도 좋아. 막아만 내면 더 큰 주목을 받게 되니까.’

상대하는 선수가 뛰어나다는 것.

몸은 힘들지만, 성배에게 나쁠 일은 없었다.

어차피 지금의 성배에게 로번이나 호아킨을 완벽히 막아내라고 시키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어린 나이라는 것.

이것은 생각보다 큰 무기였고, 성배가 이를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선수들과 계속 상대하는 것이 좋았다.

‘그래도 몸은 너무 힘드네...’

드리블 돌파에 이은 크로스.

호아킨의 플레이는 사실 이것만 막으면 다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편이었다.

하지만 성배도 알고 호아킨도 알고 관중도 알고 해설자도 알고 모두 다 아는 그런 플레이지만, 이를 막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뛰어난 드리블 실력과 스피드, 볼 트래핑 능력을 활용한 돌파는 프리메라리가 1위에 랭크 될 정도로 뛰어났고, 크로스 역시 굉장히 정확했다.

호아킨이 드리블 돌파를 할 것이고, 크로스를 올릴 것이라고 예상은 할 수 있어도 그것을 막아내는 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이었다.

‘아오!!’

그리고 그것은 성배도 마찬가지였다.

볼을 잡고 가만히 서 있길래 조심스럽게 압박했는데, 호아킨은 단 한 번 볼을 건드린 것만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오른발에 두고 있던 볼은 왼발로 옮긴 뒤, 호아킨은 빠르게 가속했다.

흔히 말하는 치고 달리기, 볼을 길게 차면서 달리는 것만으로 성배는 물론이고 뒤에서 백업을 봐주고 있었던 콤파니까지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잡았다, 이 자식!!’

그래도 콤파니가 조금이나마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다시 호아킨의 앞을 막아설 수 있었다.

한 번은 놓쳤지만, 두 번은 놓칠 수 없었다.

하지만 성배의 다짐이 무색하게 호아킨은 뒷발로 볼의 진로를 바꿔 중앙으로 올라가 버렸다.

급하게 뒷발을 뻗어보았지만, 호아킨은 이미 대각선 방향으로 다시 볼을 치고 빠져나갔고, 성배가 할 수 있는 것은 또다시 호아킨의 뒤를 따라가는 것뿐이었다.

< 낭만필드 - 047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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