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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필드-46화 (21/356)

< 낭만필드 - 046 >

‘이... 사기다!!’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던 성배는 볼을 빼앗는 수비를 포기했다.

안전하게 따라붙으며 마음 놓고 다음 플레이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지금도 로번과 같은 방향으로 달리며 상체만 돌린 채 바짝 붙어 달리고 있었는데, 안쪽으로 급격히 방향을 틀어버린 로번을 놓치고 말았다.

'일단 보내준다.'

평소였다면 충분히 따라붙어 수비해낼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지금의 성배는 체력 소모가 심했고, 당연히 민첩성이나 반응 속도 등이 떨어져 있었다.

로번을 막느라 공격 가담은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지만, 수비하는 것만으로도 성배의 체력을 바닥나게 만들 수 있는 선수가 로번이었다.

일방적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입장인 성배의 체력은 훨씬 더 빠르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냥은 못 보내주지!’

타이밍을 빼앗겼다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막을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로번이 위험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조금이라도 늦출 필요가 있었다.

'주심은 어디에...'

가까이 붙은 상황에서 방향을 꺾었기 때문에 로번은 성배의 오른쪽을 스치며 지나갔다.

팔이 닿는 거리였다.

성배는 오른손을 몸쪽으로 가까이 붙인 상태에서 손목만 움직여 로번의 유니폼을 1초 정도 잡아당겼다.

큰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속도를 늦출 수 있었다.

아직 스포츠 과학이 발전하지 않아 촌스러운 헐렁한 유니폼을 입어야 한다는 것에 정말 처음으로 감사했다.

‘일단 통과.’

아무래도 로번이 중앙 쪽으로 몸을 돌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성배가 유니폼을 잡아당기는 모습을 주심과 부심 모두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 잠깐이었고, 큰 영향이 없었으며, 로번이 플레이에 대한 의지를 보여서 때문에 휘슬을 불지 않았다.

로번도 정말 미세하게 흐름을 끊긴 것 때문에 프리킥을 얻어내기는 아쉬웠을 것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시간을 끌어.’

로번과의 거리는 이미 상당히 벌어졌다.

워낙에 로번이 빠르기도 했고, 예상치 못한 방향 전환에 안 그래도 민첩성과 체력이 떨어진 성배의 반응이 늦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느새 중앙 쪽으로 꽤 깊숙이 침투한 로번은 즐라코프를 상대했고, 성배는 즐라코프가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주길 바라며 로번을 쫓아 올라갔다.

‘좋아!! 확실히 쓸모가 있어.’

즐라코프는 성배의 기대에 부응해주었다.

시간을 끌어주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니 기대에 부응했다고 해줘도 무방했다.

다만, 정말로 ‘조금’ 끌어주었다는 것이 문제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잘하면 슈팅하기 전에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나이스, 드 망!!’

드 망이 몸을 날리면서 로번의 슈팅 타이밍을 한 번 빼앗았다.

비록 로번은 슈팅 페이크로 드 망을 따돌렸고, 여전히 볼을 잡고 있었지만, 방금 전에는 분명 슈팅 타이밍이었다.

드 망이 몸을 날려 일단 슈팅 타이밍을 한 템포 늦춰준 것이었다.

'이 정도면 됐어.'

이제 자신의 차례였다.

로번은 자신과 매치업된 선수였고, 자신이 막고 있었던 오른쪽 측면에서 공격을 시작해 실점하게 된다면 결국 자신의 수비에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아직 기량이 부족하다는 것은 인정해도 실점은 할 수 없었다.

이 무대는 자신이 빅클럽들에게 모습을 보이는 첫 번째 무대이고, 첫인상의 중요성은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없었다.

‘좋았어!!’

로번이 슈팅 자세를 취했을 때, 성배는 가까스로 로번을 태클 사정권 안에 둘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성배는 거의 날다시피 몸을 날렸다.

로번은 뒤에서 달려오는 성배를 확인하지 못하고 정말로 슈팅을 날렸다.

‘걸렸어!!’

다행히 한껏 뻗은 발끝에 볼이 걸리는 것이 느껴졌다.

일단 목표했던 대로 슈팅을 방해하는 것까지는 성공했고, 이제 굴절되어서 볼이 골대로 빨려 들어가는 불운한 일만 일어나지 않으면 상황종료였다.

‘다행이다...’

“잘했어!! 나이스 태클!!”

“오늘따라 악에 받쳐있는 것 같은데? 첼시에 무슨 원수진 거라도 있냐?”

오늘 성배의 수비는 상대의 수준을 감안하지 않고 절대적인 점수로 보면 그다지 높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적인 수준에서 평가하면 합격점을 줄 수 있었다.

데미안 더프와 함께 좌더프 우로번 라인을 형성하며 프리미어리그를 폭격 중인 로번을 상대로 자주 뚫리기는 했어도 어쨌든 결정적인 크로스나 슈팅은 전부 막아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 막은 것도 잘한 거야.'

현재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고 있는 수비수들도 로번을 이 정도로 막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아무리 돌파를 당해도 결국 결정적인 크로스나 슈팅만 막아내면 수비수 입장에서는 성공이었다.

로번을 완벽하게 막아내지는 못했지만, 목표했던 대로 빅클럽들 눈에 눈도장을 찍는 것 정도는 해냈다고 봐도 될 것 같았다.

“이럴 때가 아니지!! 빨리 자리 잡아!!”

“아아, 알았어. 어련히 알아서 할까.”

로번의 슈팅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이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성배의 발에 맞은 슈팅은 골라인을 넘어갔고, 첼시의 코너킥이 선언되었기 때문이었다.

존 테리, 윌리엄 갈라스, 디디에 드록바 등이 포진해있는 첼시의 코너킥은 굉장히 위력적이었기 때문에 아직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여기까지인가.'

하지만 결과적으로 성배가 굳이 나설 필요는 없는 상황이 되었다.

주심의 사인을 받은 대기심이 성배의 교체 아웃을 알렸기 때문이었다.

[IN - 5. 올리비에 데샤흐트 / OUT - 16. 주성배]

33번이었던 성배의 등번호는 이번 시즌이 시작되면서 16번으로 당겨졌다.

팀 내에서의 위상이 올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앞에 위치한 번호를 달게 된 것이었다.

‘휴우... 다행이다. 조금 더 뛰었으면 분명 뚫렸을 거야.’

대기심이 자신의 교체 아웃을 알렸을 때, 성배는 일단 안심했다.

솔직히 말해 이제는 한계였다.

대결을 주도하지 못하고 따라가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로번보다는 자신의 체력이 더 많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이제는 진짜로 조금만 더 뛰면 다리에 경련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다.

90분을 통으로 뛰면서 로번과 상대하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일단 지금은 이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괴물... 하아, 아직 빅클럽 행은 무리인가.’

오늘 성배가 보여준 플레이는 충분히 합격점을 받을 만했다.

교체되어 벤치로 들어가는 성배에게 안더레흐트의 원정 팬들이 보내주는 박수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로번은 화려한 플레이를 보여주었지만 결국 실속을 챙기지는 못했고, 이는 다른 건 다 허용해도 마지막 마무리만은 어떻게든 막아낸 성배의 공로였다.

'아직은 부족해. 조금 더 빨리 성장해야 해.'

하지만 성배 자신은 만족할 수 없었다.

16년을 2부 리그에서 활약했고, 여기에 2년의 벨기에 생활이 더 추가되었다. 18년이나 기다려왔으니 조급할 수밖에.

누군가는 18년이나 기다려왔는데 고작 몇 년 못 기다리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18년간 이루지 못했던 꿈을 이룰 가능성이 이제 슬슬 보이기 시작하는데 느긋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성배의 생각에 그런 사람은 세속적인 일에 휘둘리지 않는 생불이었다.

'천천히 때를 기다리기엔 시간이 없어. 때를 만들어야지.'

조금이라도 더 빨리 빅클럽에서 활약하고 싶은데, 오늘 경기의 결과만 놓고 보자면 빅리그 중하위권까지는 어떻게 비벼볼 수 있어도 빅클럽은 무리였다.

그래도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었다.

다소 역부족이기는 했으나 어렵사리 상대해낼 수 있었고, 지금의 자신은 서른여섯의 노장이 아닌 겨우 열여덟 살, 유망주였다.

‘앞으로 겪을 경험들은 전부 다 새로운 경험들이지. 몸도 싱싱하고. 이 정도는 금방 따라잡고 만다.’

분명 자신은 경험이 많은 선수였다.

하지만 프로무대에서 16년을 뛴 자신은 더 이상 경험으로 성장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음껏 비웃어줄 것이었다.

경험이 아무리 많아 봤자 전부 2부 리그에서의 것.

이제부터 하는 경험들은 전부 새로운 경험이었고, 사람은 누구나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조금씩 성장하는 법이었다.

‘언젠가... 다시 이 무대에 서게 된다면, 이렇게 물러나지는 말아야지.’

지금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집착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오늘을 잊지도 않는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결국 중간에 그로기 상태가 되어 물러났으니 엄밀히 따지면 패배한 것이었다.

계획한 대로 이번 시즌을 마치고 이적하게 되면 언제 또 이 챔피언스리그 무대, 별들의 전쟁에 참가할 수 있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가 되면 절대로 이렇게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잘했다. 생각보다 잘해줬어.”

“감사합니다.”

벤치로 돌아오자, 베르스만테른 감독이 성배의 머리를 두들겨주며 플레이에 대한 만족감을 드러냈다.

감독은 콤파니도 빼고 미드필더들을 전부 수비형 미드필더로 배치할 정도로 이 경기에서 승점을 획득하겠다는 마음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막상 성배를 위시한 수비수들의 맹활약과 텐백 수비를 앞세워 후반전 종반까지 0-1로 팽팽한 경기를 이어가니 욕심이 나는 것 같았다.

‘솔직히 여기서 한 골 넣겠다고 나서면... 오히려 더 대량 실점할 위험성이 높아 보이지만... 나 빠지고 대량 실점하면 나쁠 것 없으니까.’

성배가 빠진 뒤, 안더레흐트가 대량 실점이라도 하게 된다면 성배에게는 오히려 더 좋은 일이었다.

사실과는 다르지만, 겉으로 보면 성배가 수비진에서 빠짐으로써 안더레흐트의 수비진이 무너지는 것처럼 보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반작용으로 성배에 대한 평가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위치가 감독의 전술에 참견할 수 있을 정도도 아니니까. 난 어쩔 수 없다고.’

행여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성배는 감독의 전술에 태클을 걸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팀에서 공을 들이고 있는 선수인 것은 맞지만, 그래 봤자 유망주 수준.

경기의 흐름을 읽을 눈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유망주의 말에 자신의 결정을 재고할 감독은 없었다.

‘뭐, 이제 내 역할은 끝났으니까. 무엇보다 힘드니까 좀 쉬자.’

벤치로 돌아온 성배에게 오늘 경기에 출전하지 않은 후보 선수들이 물병을 내밀었다.

안 그래도 목이 말랐던 성배는 목을 축인 뒤, 자리에 앉아 수건을 덮고 숨을 골랐다.

처음 경험한 챔피언스리그 무대, 처음 상대한 월드클래스의 선수들은 정말로 대단했다.

‘큰일 났네. 이러다 중독되겠어. 올해 이후로는 이 무대에 다시 설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은데...’

겉모습과 달리 속이 이미 닳고 닳은 노장에게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심장이 굉장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미 설렘이라는 것을 잃어버렸고, 성공을 위해서만 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아니었나 보다.

< 낭만필드 - 046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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