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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필드-48화 (23/356)

< 낭만필드 - 048 (무료연재 마지막) >

‘제발, 제발!!’

호아킨을 막던 성배가 뚫렸고, 그런 성배를 도와주러 왔던 콤파니도 뚫렸다.

결과적으로 호아킨은 자유롭게 안더레흐트 진영을 헤집고 있었다.

팀의 중앙 수비에 구멍이 뚫려버린 것이었다.

원하는 상황을 만들어낸 호아킨은 뒤늦게 돌아온 성배의 태클을 무시했고, 안정적으로 크로스를 시도했다.

‘아... 놓쳐라. 놓쳐라!!’

성배의 바람이 무색하게, 호아킨의 크로스를 받은 올리베이라가 헤더로 안더레흐트의 골문을 열었다.

벨기에 무대에서 1군에 데뷔한 이후, 자신이 뚫린 것이 직접적인 이유가 되어 허용한 첫 실점이었다.

‘빌어먹을...’

빅 리그라 불리는 4대 리그로 지금 당장 이적하면 아직은 준수한 수준 이상의 풀백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호아킨은 그 4대 리그의 윙어들 중에서도 정상급이라 평가받는 선수였고, 그런 호아킨을 상대로 이 정도면 나름 선방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분은 더러웠다.

수비수의 힘든 점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점이었다.

공격수로 나가서 좋은 플레이를 펼치지 못하면 속상하고 자책감이 들었다.

‘방금 전 플레이할 때, 오른쪽으로 볼을 꺾지 말고 동료한테 패스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다음엔 그렇게 해봐야지.’

이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수비수로 나서서 공격수를 놓쳐 실점하게 되면 거기에 기분까지 더러워졌다.

말로 표현하기는 어려운 기분이지만 ‘할 수도 있었는데 못한 것’과 ‘그러면 안 되는 건데 그렇게 되어버린 것’의 차이라고 표현할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정이지만, 성배는 수비수보다 공격수로 뛸 때 마음이 더 편했다.

팬들의 기대감에 짓눌리는 주전 공격수가 아니라 기대받지 못한 공격수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정신 차리자. 현실도피 하지 말고...’

회귀 후 처음으로 완벽하게 당해버린 상황이라 살짝 정신 줄을 놓을 뻔했지만, 성배는 가까스로 다시 정신 줄을 붙잡을 수 있었다.

솔직히 상당히 성장했다고 생각하는 중에 상위권의 선수들과의 격차가 아직 상당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어 아팠다.

하지만 곧 자신이 자만했음을 인지하고 반성했다.

‘로번을 상대했을 때, 칭찬을 너무 많이 받아서 진짜 뭐라도 된 줄 알고 있었어. 고작 한 경기였을 뿐인데.’

첼시와 경기를 치른 이후, 성배를 칭찬하는 글들이 심심치 않게 올라오고 있었다.

물론 뜨거운 반응이 나오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서포트하는 팀이 성배를 영입하길 바라는 빅 클럽의 팬들.

성배의 가능성을 극찬하는 칼럼니스트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만들 수 있는 글들을 너무 많이 본 것 같았다.

‘정신 차리자. 벌써부터 만족하려고 하면 어쩌자는 거야.’

다시 새롭게 처음부터 시작하면서 이번에야말로 꼭대기에 올라가겠다고 다짐한 것이 몇 년 지나지도 않았는데 알량한 성과를 거두고 그것에 만족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났다.

비록 전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위치에 있는 선수들과 비교하면 아직 바닥이나 마찬가지였다.

부딪히고 깨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야 했다.

***

‘그래, 너 대단하다. 그래도 한 번은 제대로 막아준다.’

호아킨과 비교하면 자신은 이제 막 바닥을 딛고 일어선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은 인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부딪히고 깨져줄 생각은 없었다.

바닥을 구르고 유니폼을 잔디와 흙의 색으로 물들이면서 힘들게 막아왔지만, 경기 종료 전까지 한 번은 제대로 막아줄 생각이었다.

‘또 돌파냐!!’

측면 돌파가 호아킨의 성명 절기이고, 알아도 못 막는 플레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 경기 동안 보여준 플레이의 8할 이상이 돌파라는 것은 심했다.

이러한 호아킨의 플레이는 성배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다.

이번에도 돌파를 허용하면 도저히 자신을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자식이...’

옆으로 빠져나가려는 호아킨의 움직임을 따라간 순간, 성배는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체는 움직였는데 볼은 여전히 제자리에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어쩔 수 없었고, 호아킨은 앞에 나와 있던 오른발을 뒤로 빼내 라보나 킥 동작을 취했다.

그리고 상체 페인팅에 속아 벌어진 성배의 다리 사이 공간으로 볼을 빼낸 뒤, 돌파를 이어갔다.

‘윽!! 하필...’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성배도 호아킨을 따라잡기 위해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마음이 너무 앞섰고, 몸은 이미 한계였다.

로번 때와 마찬가지로 상대보다 먼저 지쳐버린 몸이 이상 신호를 보내왔고, 성배는 다리에 경련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쓰러져도 같이 쓰러진다.'

그래도 일단은 먼저 수비를 해야 했다.

다행히 반더헤그가 적절하게 백업을 잘 해줘서 호아킨의 크로스 타이밍이 살짝 늦어졌다.

덕분에 경련이 일어난 다리로 절뚝거리며 달려온 성배도 호아킨의 근처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나이스!!’

그리고 어느 정도 호아킨에게 붙었다고 생각했을 때, 성배는 다리를 뻗으며 그라운드 위로 미끄러졌다.

반더헤그와 성배의 압박에 호아킨도 어쨌든 볼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라 크로스를 시도했고, 볼은 성배의 발에 맞고 사이드라인 바깥으로 나갔다.

볼이 나가는 것까지 확인한 성배는 그제야 경련이 일어난 다리를 붙잡았다.

“왜 그래?”

“경련!! 크윽, 좀 꺾어줘!!”

성배가 그라운드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자, 반더헤그가 놀라서 달려왔다.

경련이 일어났다는 것을 확인한 반더헤그는 성배의 오른쪽 발을 잡고 안쪽으로 꺾어주면서 경련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더 뛸 수 있겠어?”

“뛸 수는 있을 것 같은데... 크으... 또 올라올 것 같다. 일단 벤치에 준비만 해놓으라고 전해.”

근육은 한 번 올라와 경련이 일어나면 한동안 반복적으로 올라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천천히 뛰는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상대가 호아킨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아무래도 힘들지 않을까.

성배는 이쯤에서 물러나야 함을 직감했다.

반더헤그의 처치 덕분에 일단 자리에서 일어난 성배는 다시 경기에 집중했다.

다시 근육이 올라오지 않게 조심해야 했기 때문에 간간이 보여주었던 날카로운 오버래핑은 삼갔다.

그저 수비에만 집중하는 중이었다.

‘윽! 안 되겠다.’

하지만 그렇게 조심해도 다시 근육이 올라오고 말았다.

이번에도 역시 호아킨 때문이었다.

성배의 다리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호아킨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스피드를 살린 것이었다.

단순하지만 위협적인 돌파를 시도한 호아킨을 따라가려다가 다시 근육이 올라온 성배는 결국 그라운드에 손을 짚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사이드라인 바깥으로 나갈 테니까 바로 교체해달라고 전해.”

“알았어. 천천히 나가. 괜찮으니까.”

다행히 호아킨의 돌파는 콤파니의 백업을 통해 막아낼 수 있었다.

0-1로 뒤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1분 1초가 아까웠고, 성배는 양손의 검지손가락을 겹쳐가며 번갈아 돌려 교체 요청 사인을 보냈다.

지금은 일어나서 교체 위치까지 걸어가는 시간도 아까웠기 때문에, 스트레처를 불러 함께 사이드라인 바깥으로 나갔다.

[IN - 5. 올리비에 데샤흐트 / OUT - 16. 주성배]

‘아무리 아직 어리다지만... 두 경기 연속으로 체력적인 문제를 보이면 안 좋은데. 이건 별로 좋지 않네.’

근육에서 경련이 일어난다는 것은 결국 체력이 바닥이 났다는 뜻이었다.

지난 첼시와의 경기에서도 로번을 막다가 마지막 20분 정도를 남기고 몸이 무거워지는 모습을 보였던 성배는 이번 베티스전에서는 아예 근육 경련이 일어나 교체되는 모습까지 보이고 말았다.

체력이 약하다는 선입견이 생겨도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첼시와의 경기에서 보여준 체력 저하는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한 수 위의 상대를 막아내면서 굉장히 많은 거리를 뛴 풀백이 70분 정도에 그 정도 체력이 떨어지는 건 일반적인 일.

성배를 교체해준 것은 당연한 행동으로, 체력이 떨어지면 로번을 막기 힘들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베티스와의 경기에서까지 두 번 연속으로 체력적인 문제를 보인 것은 그다지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유럽 무대에 거의 처음으로 모습을 보이는 대회였는데, 첫인상은 생각보다 꽤 오래가기 때문이었다.

‘남은 네 경기에서 어떻게든 만회해야겠네.’

다행히 그래도 아직은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네 경기가 남아있었다.

자신에게 체력적인 문제가 없다는 것을 증명할 기회가 네 번이나 남은 것이었다.

오늘 경기도 이제 15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고, 패색이 짙었지만, 어차피 안더레흐트의 탈락은 예상한 입장에서 놀랍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가치를 위해 체력에 대한 선입견을 지우는 것이었다.

'체력은 자신 있는 부분인데.'

성배의 체력은 강한 편이었다.

수비하는 것이 버거워 부지런히, 그리고 쓸데없는 행동이 많아져 이렇게 되었을 뿐, 체력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

결국 안더레흐트는 레알 베티스와의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2차전에서 0-1로 패배하고 말았다.

첼시와의 1차전 0-1 패배.

베티스와의 2차전 0-1 패배.

분명 두 경기 모두 일반적인 예상보다 더 좋은 경기를 보여주었다고 평가받았지만, 그래도 2패는 2패.

승점은 전혀 모으지 못했고, 당연히 리그 최하위로 떨어져 있었다.

그나마 안더레흐트가 승리를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팀이었던 베티스를 상대로 홈에서 0-1로 패배했다는 것은 결정적이었다.

이는 안더레흐트가 조 최하위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섰다는 것을 의미했다.

조 3위까지 주어지는 UEFA컵 출전권도 점점 멀어졌다.

하지만 성배에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성배의 손에, 드디어 그렇게 간절히 원해왔던 것이 전해져왔기 때문이었다.

[벨기에 국적 취득 허가서]

[벨기에 시민권]

원래부터 벨기에 축구협회에서 진행하고 있다가, 성배가 귀화 의사를 밝힌 이후 빠르게 추진된 벨기에 귀화 절차가 드디어 마무리되었다.

한국은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 국적은 사라졌다.

공식적으로 벨기에 국민이 된 성배는 이제 벨기에 국가대표로 뛸 수 있는 자격도 함께 갖추게 되었다.

‘막상 이렇게 국적이 나오고 보니까 싱숭생숭하네.’

그토록 바라던 벨기에 국적.

그것이 드디어 성배에게 주어졌고, 이제는 이 국적을 바탕으로 잉글랜드,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를 가리지 않고 모든 유럽 리그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국적 취득 허가서를 받아든 지금, 그렇게 기쁘지만은 않았다.

'참... 이상하지. 한국에 애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 살았던 시간이나 벨기에에서 살았던 시간이나 비슷한데.'

축구선수로서의 커리어를 위해 국적을 변경했고, 한국 국적을 포기한 뒤, 벨기에 국적을 따냈다.

하지만 뭔가 심란했다.

아무리 그 중요성이 많이 퇴색했고, 성배 역시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막상 겪어보니 자신의 정체성이 일부 포함된 무언가를 바꿔버린다는 것이 생각보다 무거웠다.

‘한국에서의 특별한 기억이 많은 것도 아닌데....’

물론, 전생에서는 평범한 사람들만큼 한국을 응원했었다.

월드컵 시즌이 되면 대한민국을 목놓아 외쳤고, 외국인 동료들이 한국에 대해 뭔가 부정적인 말을 하면 발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항상 기회만 되면 유럽 국적을 얻어 다른 리그로 옮겨가고 싶었고, 유럽 무대에서 조금 더 제대로 활약하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귀화를 해도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후회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고, 벨기에 국적을 따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더라도 무조건 귀화를 선택할 것이다.

그냥, 그냥 마음이 조금 싱숭생숭했다.

< 낭만필드 - 048 (무료연재 마지막)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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