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02 >
[로얄 앤트워프!! 20년 만에 주필러 리그 복귀!!]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로얄 앤트워프는 1부 리그, 주필러 리그 승격에 성공했다.
줄테-바레헴의 마지막 슈팅은 사력을 다해 다시 몸을 날린 성배의 등에 막혔고, 앤트워프의 수비수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 볼을 멀리 걷어낸 순간, 경기 종료를 알리는 주심의 휘슬이 울렸다.
20년 만의 1부 리그 승격이 확정된 것이었다.
“해냈다... 드디어, 드디어 해냈다고!!”
승격이 확정되고 며칠이 지났지만, 성배는 아직도 그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지 16년, 16년 만에 1부 리그의 무대를 밟게 된 것이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이 흥분감, 기분 좋은 고양감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조금 더 오래 즐기고 싶었다.
‘선수 생활 말년에... 드디어 이런 날이 오는구나. 1부 리그 그라운드는 밟아보지도 못하고 은퇴할 줄 알았는데...’
성배의 시선이 자신의 방을 한 바퀴 훑었다.
16년이나 프로로 활약한 선수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초라한 방이었다.
일반적으로 프로 축구 선수의 방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언급하는 트로피도 고작 세 개가 전부였는데, 그 중 한 개는 한국에 있던 시절 받았던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프로 생활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프로 생활 16년 동안 받은 트로피는 두 개가 전부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나름 충실한 삶이었어. 너무 자학하지 말자.’
선수 생활의 마지막 꿈으로 삼았던 1부 리그 진출이 확정되자, 새삼스럽게 자신의 축구 인생을 천천히 돌아보게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당했던 심각한 부상과 항상 꼬리표처럼 자신을 따라붙었던 피지컬이 형편없다는 타이틀은 결국 K리그 진출도, 대학 진학도, 내셔널리그 진출도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좌절하고 축구 선수의 길을 포기하려는 순간,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 준 은인을 만나 벨기에 행 비행기에 올랐고,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벨기에 2부 리그, 로얄 앤트워프에서 지금까지 16년 동안 활약했다.
처음 벨기에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는 축구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고, 그 다음에는 로얄 앤트워프를 시작으로 빅 리그 무대를 밟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하하하, 그 때는 내가 여기에 이렇게 오래 있을 줄 몰랐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가.”
젊은 시절을 생각하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로얄 앤트워프의 입단테스트에 통과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여기서 잘만 하면 빅 리그 강등 권 팀이나 승격 팀 정도는 언젠가 이적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당장은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유럽 무대의 벽은 높았다.
유럽 무대에서 가장 몸싸움을 꺼리는, 얌전한 리그 중 하나인 벨기에 리그임에도 불구하고 성배는 그 정도 몸싸움마저도 버거웠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군대도 면제받을 수준의 큰 부상을 당했던 성배는 안 그래도 몸싸움을 꺼려했는데,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유럽 선수들에게 부딪히기 전에 이미 지고 들어갔으니 몸싸움을 버텨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이후로는 스트라이커에서 윙어로 포지션도 전향했지만 여전히 백업 선수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다.
대충 이 시기를 전후해서 성배는 빅 리그에 대한 꿈을 접고 벨기에의 최상위 리그, 주필러 리그를 꿈의 마지막 종착역으로 정했다.
현실에 순응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A new world!! This one thing, I want to ask of you, world. To say adieu, world!!]
“응? 무슨 일이지?”
자신의 선수 생활을 돌아보면서 감상에 빠져있던 성배는 휴대폰 벨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휴대폰 액정에는 로얄 앤트워프 계약 담장자의 번호가 찍혀있었다.
“여보세요?”
[아, 주!!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데, 내일 오후쯤에 방문할 수 있나?]
“뭐, 시간은 되는데요. 무슨 일이에요?”
[음... 그건 내일 오면 이야기해주지. 그럼 내일 보자고.]
“그래요, 그럼. 내일 두 시? 그 쯤 가면 되죠?”
성배가 처음 이 팀에 입단할 때부터 계약 담당자는 바뀌지 않았다.
즉, 성배가 처음 프로 계약을 맺을 때부터 클럽과 계약을 갱신할 때, 계약을 진행했던 담당자는 오직 이 한 사람 뿐이었다.
성배가 2부 리그의 다른 클럽들, 1부 리그 승격이 유력하다고 평가되었던 팀들의 영입 제안을 전부 물리치고 로얄 앤트워프와 재계약을 맺어왔던 덕분에 담당자와는 상당한 친분을 쌓게 되었다.
이제 와서는 두 사람과 함께 커리어 초반을 보냈던 사람들 대부분이 팀을 떠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욱 더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성배는 담당자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오늘 기분이 조금 안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
“... 은퇴... 말입니까?”
“그렇네. 은퇴. 이제 은퇴하고 로얄 앤트워프의 코치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 어떤가?”
다음 날, 클럽을 찾은 성배를 맞이한 것은 계약 담당자와 함께 앉아있는 감독과 단장이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1부 리그 승격에 의한 새로운 연봉 협상이라면 단장이 자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잔인했다.
재계약 제의라고 생각했던 성배의 생각은 옳았다.
그것이 선수로서의 재계약이 아니라 코치 계약이었을 뿐이었다.
“은퇴... 그러면 저는 1부 리그의 그라운드를 밟지 못하는 겁니까?”
“그럴 리가!! 다음 시즌, 우리는 1부 리그에 참가하게 될 것이고, 자네는 우리 로얄 앤트워프의 코치로서 당당히 그 그라운드 위에 서있을 것이네.”
“그 이야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저는... 선수로서 1부 리그의 그라운드에서 활약하기 위해 지금까지 버텨왔습니다!! 제 인생의 반을 바친 이 로얄 앤트워프와 함께요!!”
어제 성배와 통화를 나누었던 계약 담당자는 성배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겠는지, 눈을 감고 이를 악 문 채 앉아있을 뿐이었다.
어제의 통화에서 왜 그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는지,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오늘의 만남은 성배의 새로운 시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성배의 선수 생활을 끝내기 위한 만남이었던 것이었다.
“주.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리고 우리 코치진은 자네의 현재 기량이 1부 리그에서 통할 것이라 생각하지 못하겠어. 자네는 노련하지. 그리고 똑똑해. 그리고 킥도 정확한 편이라서 후방 빌드업을 맡아줄 수도 있지. 하지만 그게 전부야. 1부 리그의 선수들을 상대로 자네의 스피드와 피지컬이 통할까? 아니, 아니야. 힘들 거야.”
“하, 하지만!! 아직 백업으로는 충분히 활약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래, 그래요. 백업!! 저는 오른쪽, 왼쪽 풀백으로 다 뛸 수 있고, 수비형 미드필더로도 뛸 수 있지 않습니까? 잘 아시잖아요!!”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다음 무대에서는 통하지 않을 거야. 측면 수비수로 뛰기에 자네는 이제 너무 느리고, 상대와의 몸싸움에서 이겨낼 수도 없어. 그런데 수비형 미드필더로 뛴다고? 측면 공격수의 피지컬도 이겨낼 수 없는 선수가? 무리야.”
이제는 감독이 나섰다.
결국 감독의 말은 성배가 전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나이가 들어서 그나마 상위권이었던 스피드도 많이 떨어졌고, 원래 약했던 피지컬은 이제 최소한의 경쟁력도 잃었다는 것이 감독의 판단이었다.
성배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인정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그레고리의 체력 안배를 위해서 제가 필요할 겁니다!!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어요. 마지막 몇 분 정도 막아내는 것은 아직 충분히 할 능력이 있습니다!! 몸 관리도 잘 해왔어요, 아시잖아요?”
“주. 우리는 이미 백업 풀백을 찾고 있네. 왼쪽 백업 풀백은 자네도 알고 있는 그라함이 맡을 것이고, 오른쪽 백업은 이제 구하는 중일세.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자네의 자리는 이제 없어.”
18세의 뱅상 그라함.
그레고리의 뒤를 이어 또 한 번 로얄 앤트워프가 발굴한 수준급의 왼쪽 풀백 유망주였다.
전 세계적으로 왼발잡이 레프트 백을 찾기가 어려워지면서 희소성으로 인해 가치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또 한 번 유망주가 나타난 것이었다.
셀링 리그인 벨기에 리그의 로얄 앤트워프로서는 큰 이적료를 받을 수 있는 기회였기에 이를 놓칠 수 없었다.
“하아... 제 연봉이 너무 높습니까? 절반까지 깎아도 남겠습니다. 제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1부 리그에서 마무리할 수 있도록 기회만 주십시오.”
“... 미안하네. 우리도 그 정도 여유는 없어. 쓰지 않을 선수 때문에 수만 유로를 지출할 여유가 없네. 만약, 자네가 은퇴해서 코치가 되는 것이 싫고, 선수 생활을 이어나가고 싶다면 이적료는 받지 않겠네.”
사실 성배의 연봉은 꽤나 높은 편이었다.
아무리 프로의 세계라지만 한 팀에서 16년을 활약한, 몇 년 간은 부동의 왼쪽 풀백으로 활약한 성배에게 최소한의 대우를 해주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1부 리그에서 경쟁력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성배와 이제 더 이상 프로 계약을 이어나갈 마음은 없었고, 그래도 16년 동안 함께 해왔기 때문에 코치직을 제시했다.
로얄 앤트워프로서는 나름대로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대우를 내밀었지만, 성배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하, 하하하... 방출입니까? ... 16년 동안 이 클럽을 위해 뛰었습니다!! 두세 번은 1부 리그 승격이 유력한 클럽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지만!! 이 팀!! 로얄 앤트워프와 함께 1부 리그를 밟고 싶어서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고작 이겁니까?”
“흥분하지 말게. 우리는 자네에게 코치직을 약속했어. 우리로서는 자네에게 최대한의 대우를 해주고 있는 걸세. 더 이상 경쟁력이 보이지 않는 선수를 방출하는 것은 프로의 세계에서 당연한 일이네. 하지만, 우리는 지난 16년간 우리를 위해 뛰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코치 제안을 하고 있는 거야. 그래도 자네의 심정을 대충 이해할 수는 있으니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겠네.”
이제 와서 이적료 없이 풀어준다고 해서 1부 리그의 그라운드를 밟을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었다.
감독과 코치들이 말했던 것처럼 이제 더 이상 성배에게는 1부 리그에서 경쟁할 기량이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까지 활약해왔던 로얄 앤트워프와 함께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선수 생활을 이어나간다고 하더라도 다른 2부 리그 팀에 입단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으으...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일단, 생각할 시간을 조금만 주시겠습니까?”
“알겠네. 16년의 선수 생활을 정리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 하지만, 우리도 시간을 오래 줄 수는 없네. 코치진을 빨리 개편하고 선수단도 개편해야 돼. 이를 이해하고, 최대한 빨리 결정해주게.”
고개를 숙이고 나오는 성배의 표정이 흔들렸다.
안 그래도 비참한데, 자신을 더 비참하게 만들고 싶은 것인지 눈물이 흐르려는 것을 어떻게든 참아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배는 볼 수 없었지만, 계약 담당자도, 감독도 성배의 초라한 등을 더는 볼 수 없었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당황한 성배의 에이전트도 어찌 할 줄을 모르다가 인사를 건네고 성배를 따라 나왔다.
아직 초보 티가 물씬 풍기는 에이전트가 현재 성배의 위상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 낭만필드 - 002 > 끝
ⓒ 미에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