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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필드-3화 (3/356)

< 낭만필드 - 003 >

“어이!! 여기다!!”

“아, 아저씨. 일찍 오셨네요?”

클럽으로부터 사실상의 방출 통보를 받고 며칠이나 방에 혼자 널부러져 있던 성배는 전화를 받고 시내의 한 펍으로 향했다.

이미 펍에 도착해있던 약속 상대는 밝은 얼굴로 성배를 향해 손을 흔들어보였다.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한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또 자신의 입으로 전하기 싫은 소식을 전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 녀석, 축하한다. 그렇게 로얄 앤트워프에서 1부 리그로 가겠다고 하더니, 결국 갔구나!!”

“아, 예... 로얄 앤트워프는 갔죠. 하하...”

역시나.

자신에게 축하를 건네는 상대의 밝은 표정에 성배는 또 씁쓸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항상 로얄 앤트워프와 함께 1부 리그로 올라가겠다고 말해왔던 자신이었고, 상대도 그것을 알고 있어서 축하를 건넨 것이었는데, 정작 로얄 앤트워프가 1부 리그로 승격한 지금, 성배의 마지막 꿈마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 무슨 소리야? 앤트워프는 갔다니? 너는 못 갔다는 이야기처럼 들리는데?”

“하, 하하... 그러게요. 왜 앤트워프는 갔는데 저는 못 가는 걸까요?”

지금 성배가 만나고 있는 사람은 처음 벨기에에 왔을 때부터 성배를 돌봐주었던 사람이었고, 지난 16년 동안 연고도 없는 타지에서 성배의 정신적 지주이자 멘토가 되어주었던 에이전트, 헤르만이었다.

성배에게는 두 번째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성배의 표정만 보고도 뭔가 심상치 않은 상황을 눈치 채고 표정을 싹 굳혔다.

“하아... 은퇴하라고 하네요. 코치 자리 하나 던져줄 테니까 은퇴하래요.”

“... 은퇴? 지금 이 시점에서?”

“네. 선수 생활을 계속하고 싶다면, 이적료 없이 놔주겠다고...  하지만 그렇게 하면 코치 자리는 날아가겠죠.”

클럽에서 내준다는 코치 자리.

이 코치 자리를 받아들이면 은퇴 이후의 생활이 가능해질 것이었다.

이 자리도 물론 절대로 안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초보 코치의 앞길은 언제나 바람 앞의 촛불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아니면 은퇴 이후에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만약 선수 생활을 조금 더 지속하겠다고 이적을 선택하게 되면, 최소한 초보 코치의 연봉보다는 많은 돈을 받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선수 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기간은 길어야 2년이었다.

지금 로얄 앤트워프에서 코치 자리를 제안한 것은, 16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로얄 앤트워프에서만 뛰어준 성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선수를 클럽에서 이렇게 대우해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만약 여기서 성배가 팀을 옮겨 선수 생활을 이어간다면, 결국, 그 코치 자리도 그대로 날아갈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알아봐 줄 테니까 에이전트로 한 번 일 해보는 건 어떠니? 너라면 에이전트 일도 잘 해낼 거야. 너는 축구를 보는 눈이 뛰어나니까.”

“에이전트라... 그것도 나쁘지는 않네요.”

지금은 은퇴했지만, 헤르만은 40년 가까이 에이전트로 일 해왔던 인물이었다.

비록, 그가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정상급으로 인정받았던 에이전트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적인 매력을 갖춘 그는 클럽과 선수들로부터 신뢰를 얻었다.

당연히 그를 좋아하는 인물들은 현장에 많이 남아있었다.

“어때? 선수 생활에 아직 미련이 남아있으면 다른 팀을 알아봐. 그리고 그 다음에 네 생각만 있다면 내가 에이전트로 길을 알아봐줄게.”

“아니요. 사실... 이미 결정은 했어요. 은퇴...하려고요.”

“역시... 그런가...”

지난 며칠 동안 집에서 혼자 폐인처럼 지냈지만, 아무 생각도 없는 진짜 폐인은 아니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깨어있는 시간에는 미래에 대한 고민이 성배의 머리를 가득 채웠었다.

그리고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나름대로 생각의 정리를 끝낼 수 있었고, 성배는 결국 은퇴를 결정했다.

“제가 더 뛰고 싶었던 건, 1부 리그의 그라운드를 밟아보고 싶다는 이유, 그 하나뿐이었어요.”

“그래... 역시 그렇구나. 하긴, 너도 이제 적지 않은 나이니까. 이제 와서 같은 2부 리그의 새로운 팀에서 새로운 환경에서 뛰는 건 의미가 없겠지.”

“그렇죠. 1부 리그가 아니라면... 다음 인생을 생각해야 할 때니까요.”

지금 성배가 미련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선수 생활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1부 리그의 그라운드에서 한 번 만이라도 뛰어보고 싶다는 것. 그것이 성배에게 남아있는 선수 생활에 대한 마지막 미련이었다.

로얄 앤트워프와 함께 1부 리그로 올라가는 것이 1부 리그에서 활약할 수 있는 사실상의 마지막 기회인데 그것이 좌절된 이상 이제 선수 생활에 대한 미련은 접어야 할 때였다.

“그 때 내가 너를 설득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로얄 앤트워프가 이렇게 냉정하게 결정을 내릴 줄은 몰랐다. 하아... 미안하다. 주. 내가 그 때 너를 괜히 설득했구나.”

“......”

성배의 원래 포지션은 스트라이커였다.

하지만 고작 두 시즌도 뛰지 못하고 피지컬적인 측면에서 문제를 드러낸 성배는 결국 측면으로 빠졌다.

그러면서도 백업 이상의 활약은 하지 못했는데, 28세, 풀백으로 포지션을 전환한 성배는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2부 리그에서나마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장점이었던 경기의 흐름을 파악하는 능력과 축구 지능을 바탕으로 풀백으로서 빠르게 성장했다.

공격수로 15년 넘게 활약했던 경험까지 더해지며 상대 공격수의 생각을 읽는 것이 가능했고, 미리 움직여 막아낼 수 있었다.

또한, 풀백 치고는 공격력이 좋다는 평가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영입을 제의한 여러 클럽들의 제안은 헤르만에게 설득당한 성배가 모두 거절했다.

헤르만은 에이전트로 일하고 있지만 클럽과도 사이가 좋았는데, 이는 의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헤르만의 성격 덕분이었다.

하지만, 결국 성배는 그로 인해 마지막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2부 리그로 강등된 지 15년을 막 넘어가고 있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그 때도 로얄 앤트워프의 주역으로 팀의 승격을 이끌 수 있다면 외적으로 상당한 보상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 당시에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그 자신도 로얄 앤트워프에 대한 의리와 충성심으로 가득했기 때문에 결국 헤르만의 말대로 영입 제안을 거절하고 더 낮은 연봉으로 로얄 앤트워프와 재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다섯 시즌을 더 2부 리그에서 활약했고, 드디어 승격을 이뤄낸 순간, 팀으로부터 전력 외 통보를 받은 것이었다.

“그 때 이적했다면... 지금까지 1부 리그에서 살아남으면서 훨씬 더 많은 연봉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미안하다.”

“...아저씨가 미안할 게 뭐 있나요. 다 제 선택이었는데요.”

그래도 헤르만을 원망할 수는 없었다.

헤르만은 성배가 축구 선수로 활약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사람이었다.

아버지와의 인연으로 성배를 알게 된 헤르만은 축구 선수라는 것을 알고 아버지에게 영상을 얻은 뒤, 성배의 상황을 알고 직접 한국으로 날아와 성배에게 기회를 준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K리그는 당연한 거고 대학 진학과 내셔널리그 진출마저도 좌절되어 선수 생활을 끝내려고 했던 성배에게 다시 용기를 주고 기회를 주었던 사람이 헤르만이었다.

그래서 헤르만은 성배에게 은인이었다.

쉽게 원망할 수 없는, 그런 존재인 것이 당연했다.

영입 제안을 받았을 때, 자신을 헤르만이 설득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있었지만 결국 선택은 자신이 한 것이고 그것 때문에 원망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에이전트로서 그 상황에서 선수에게 좋은 선택을 했어야 하는데... 에이전트 생활을 하면서 적지 않은 실수들을 했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 때 너의 이적을 말린 게 가장 큰 실수였구나, 싶다.”

“하아...”

헤르만을 원망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 사건에 대한 아쉬움은 분명히 있었다.

헤르만이 계속 그 일에 대해서 미안함을 표현하고 있는데, 성배도 그 앞에서 더 이상은 그를 위로할 수 없었다.

지금은 자신이 위로를 받고 싶은 순간이었고, 자책하는 헤르만을 위로할 정신은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이럴 땐 그냥 마시는 거예요. 아저씨도 그런 것 같고, 저야 벌써 며칠 째 기분 뭣 같으니까 그냥 마시고 다 날려버리자고요.”

“허, 허허... 자네 아버지도 자주 그랬지. 뭔가 괴로운 일만 있으면 술로 푸는 사람이었어. 한국인은 다 그렇다고 했었나... 그래, 그러자. 오늘은 신나게 마시고, 둘 다 괴로운 일은 다 잊어버리자.”

< 낭만필드 - 003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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