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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180화 (180/651)

제180화: 여자(2)

쉬지 않고 머릿속을 떠도는 말이 있었다.

‘좋습니다 하죠.’

약간 망설이는 듯 했지만 마테르는 분명하게 말했다.

그건 어떤 일에 대한 진행 의사를 묻는 질문이다.

뭘 하겠다는 것일까.

숙소로 돌아와서도 좀체 실마리를 풀지 못했다.

계속 담배만 피워대는 권총수를 보며 오민철이 다가왔다.

“얘기 들었냐?”

무슨 얘기냐는 듯 권총수가 돌아보았다.

“네가 그랬잖아. 왕족들을 풀어 주더래도 가택연금을 해야 한다고. 일체 외부와 전화 통화, 서신교환도 안되도록 막아야 한다고.”

“당연하지.”

“오늘 데자가 왕자와 칸자데흐 왕자가 국외로 빠져 나갔어.”

“정말?”

“에반 지사장님으로부터 전화 왔었어.”

“빌어먹을!”

권총수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두 사람은 왕족들 중에서도 병적일 만큼 근본주의자들이야. MI6의 얘기를 빌리면 해외에 빼돌린 재산이 자그마치 20억 달러 이상이라고.”

“20억 달러?”

테러의 생명은 자금이다.

성전에 참여하여 알라를 위해 한 목숨 버리겠다는 사람은 지천이다.

그들은 죽음으로 천국을 약속한다.

알라 이외에는 결코 신이 없다.

그러므로 알라를 믿지 않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이스라엘은 이교도이고 적이다.

알라를 믿지 않는 그들을 공격하는 건 무슬림으로서 당연한 일이며 의무라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알라의 전사라는 이름으로 모집한다.

석유가 나오지만 국민들은 가난하다.

가족을 위해 얼마정도 생활비가 보장되면 성전에 참여할 사람들은 차고 넘친다.

그래서 테러자금 차단을 위한 미국을 포함한 서방 정보국들의 감시와 추적도 필사적인 것이다.

“볼만하겠군.”

권총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20억 달러면 적은 돈이 아닌데 앞으로 온 세상이 여기서 뻥, 저기서 뻥 하겠어.”

권총수는 입 꼬리를 비틀었다.

비아냥이다.

오민철은 지금 권총수가 누구를 비아냥거리는지 알고 있다.

파흐드 왕세자였다.

“밥을 떠먹여 줘도 뱉어내면 방법이 없는데.”

권총수는 서랍에서 자신의 권총을 꺼내더니 분해하여 닦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총기를 손질하는 권총수의 모습은 신성한 의식이었다.

맥보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 번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리고 비서실장 사울란을 따라 파흐드 왕세자의 집무실로 걸어들어 갔다.

“안녕 하셨습니까. 왕세자 전하.”

“반갑습니다. 앉아요.”

파흐드 왕세자는 수니파 정통의 흰색 구트라를 쓰고서 맥보란을 맞이했다.

쿠데타 이후 몇 번 면담을 요청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했다.

처음에는 사우디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으나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어떤 논평도 내놓지 않았다.

미국은 이미 들어선 새 정부와 충돌해봤자 이득 될 것이 없다고 판단하며 기다린 것이다.

“시간이 없을테니 용건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때 여비서가 홍차 두 잔을 가져와 파흐드와 맥보란 앞에 놓고 물러나갔다.

“차 마시면서 얘기합시다.”

파흐드 왕세자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나머지 왕족들은 어찌할 계획이십니까?”

“당신 생각이오? 백악관의 질문이오?”

맥보란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한 나라의 국가 수반을 상대로 개인적인 얘기나 견해를 밝힐 수는 없다.

그걸 모를 리 없는데 묻는 건 분명히 짚겠다는 뜻이다.

나중문제가 생기면 백악관에서 사람을 보내 이런 요구를 하지 않았느냐고 따지려는 것이다.

맥보란은 어색하게 웃었다.

“왕세자 전하.”

“CIA뜻이오? 백악관이 아니라면 난 당신과 나눌 얘기가 없소.”

맥보란의 안색이 갈수록 굳어진다.

확실히 틀리다.

전 국왕이나 알 살만 경우 완전한 친미였고 미국의 의도를 저버리지 않았다.

미국이 어떤 의중을 갖고 있다 하면 반드시 거기에 맞춰준다.

하지만 파흐드는 다르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다.

“왕세자님의 이번 사면은 아주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 외국으로 탈출하거나 망명하는 왕족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우리 입장입니다.”

나가면 안 된다.

왕족들이 해외로 나가면 망명정부를 따로 세우지 않는다는 법도 없다.

어느 나라든 망명정부란 이름은 여론의 동정을 받는다.

대표적인 망명정부는 중국정부를 피해 인도에서 티벳의 독립을 외치는 달라이라마다.

파흐드 왕세자를 반대하는 왕족들이 중심이 되어 망명정부를 세우든 말든 미국은 관심없다.

문제는 망명정부가 세워지면 자연스럽게 기존 이슬람 무장 테러조직들과 연계가 된다는 것이다.

상대가 중동에서 가장 친미국가인 사우디이므로 반미를 외치며 그들은 쉽게 결속 될 것이다.

망명정부로 시작했지만 자칫 엄청난 테러세력으로 커질 위험이 크다.

미국이 우려하는 건 제 2의 IS가 탄생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였다.

IS가 커진 건 자금력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왕족들의 해외도피는 눈감아줘도 재산은 완전히 몰수조치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맥보란은 허리를 구부려 인사한 뒤 돌아서 나갔다.

파흐드 왕세자는 꼼짝 않고 있었다.

테러범들이 왕족들 석방 요구에는 그들의 재산도 같이 보존되어야 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그들의 속셈이 훤히 보인다.

알면서도 대책을 세울 수 없는 것이 지금 자신의 입장이었다.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핏줄이다.

아내가 죽고 20년이 지났지만 아직 재혼 따위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열 명의 부인을 거느린다고 해서 문제될 리 없는 사우디이다.

그러나 자신은 결코 죽은 아내 말고는 어떤 여자도 사랑할 자신이 없고 동물적인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여자를 끌어들이는 일은 더욱 싫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남기고 간 유일한 핏줄이기에 절대 잃고 싶지 않다.

아들을 버리고 권력을 쥐느냐.

아니면 모든 걸 버리고 아들과 함께 제3국으로 떠나느냐.

파흐드 왕세자를 만나고 나온 맥보란은 곧바로 대사관으로 향했다.

대사는 급히 들어서는 맥보란을 바라보았는데 마른침을 삼킨다.

“일은 어찌 됐나?”

“우리 입장은 분명히 전했습니다만.”

말끝을 흐리는 것이 기대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투다.

“쿠데타까지 일으킨 분이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야. 누군 자식 없나.”

맥보란이 투덜거렸다.

“권력을 잡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였으면서.”

“남의 자식과 내 자식은 다르지.”

맥보란이 놀란 표정을 했다.

“더욱이 아내가 일찍 죽는 바람에 엄마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자란 아들이라더군. 아마 애틋함이 더 남다를 거야.”

맥보란은 의자 뒤로 머리를 젖혔다.

‘그러고 보니 당신도 홀아비지. 아들 하나고.’

맥보란은 대사를 보며 빙긋 웃었다.

‘동병상련이라는 건가’

자신도 아들이 있다.

‘과연 나라면’

자신이 파흐드 왕세자 입장이었다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떠올려 보았다.

‘쿠데타를 일으켰다면 실패 했을 때 닥칠 죽음도 계산했을 터’

그때는 아마 비장했을 것이다.

패하면 자신은 물론 아들도 죽는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1957년 콩고의 투치족 추장 아만카는 견원지간인 사촐라족과 전쟁을 치르기에 앞서 아내와 두 딸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출전했다.

그러나 아만카 가슴속에는 자신이 죽인 것이 아니라 사촐라 족이 살해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지금 복수를 위해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다.

아내도 죽고 자식도 죽은 그에게 살아 있는다는 건 의미가 없었다.

선두에서 오른손으로는 총을 쏘고 왼손으로는 칼을 휘두르는 그의 용맹함에 부하들은 더욱 힘을 내어 100년간에 걸친 양 부족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아만카 추장은 아니어도 혁명을 꿈꾼 사람이라면 자식 목숨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납치범들에 대해 밝혀진 건 아직 없나?”

대사가 묻자 맥보란은 진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번 사건은 좀 특이하군요. 주요 테러집단을 집중 감시하고 있는데 평소와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몇 명을 끌어다 추궁을 했지만 그들도 오리무중이라는 표정이더군요.”

“숨기는 건가? 아니면.”

사고가 난 사우디 주재 미국대사이다.

대사가 모르고 있다는 건 정무적 감각이 부족한 것이고 서기관으로 위장한 맥보란에게 휘둘리는 것이다.

대사와 외교관으로 위장한 정보원의 관계는 그야말로 불가근 불가원이다.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로 대사는 정보원에게, 정보원은 대사에게 얻어 낼 것이 적지 않은 것이다.

같은 직원이라고 하여 모든 것을 오픈하고 소통하는 건 아니다.

숨길 건 숨기고, 알릴 건 알리며 각자의 위치를 절묘하게 닦아 내는 기술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서로에게 뭣 숨기고 있느냐고 물을 수는 없다.

지이잉!

맥보란은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보았다.

그러더니 흘긋 대사를 살피더니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복도로 나선 맥보란은 핸드폰에 대고 입을 열어 말했다.

“예!”

상대는 랭글리의 직속상관 M이다.

“위성에서 이상한 전화를 감청했네.”

“통화자가 누굽니까?”

“수신자가 있는 지역이 테헤란일세.”

테헤란이라는 말에 맥보란의 걸음걸이가 멈췄다.

“테헤란이라고 하셨습니까?”

“발신지는 카이로더군. 지금 우리쪽에서 발신자를 쫓고 있으니 무슨 일인지 드러나겠지. 급히 발신지로 가보게.”

“그러죠.”

전화를 끊은 맥보란은 곧바로 주차된 포드 익스플로러에 올랐다.

목적지는 카이로다.

고물상으로 두 대의 승용차가 들어섰다.

차문이 열리고 모두 다섯 명의 사내들이 내렸는데 하나 같이 정장차림이고 백인들이다.

산더미처럼 쌓인 고물을 바라보며 사내들은 사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사내들은 품속에 손을 집어넣은 뒤 권총을 뽑았는데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소음기를 돌려 끼운다.

두 명의 사내가 컨테이너 박스 사무실 좌우에 섰고, 호흡을 가다듬고 숫자를 셋 까지 센 뒤 문을 차고 들어갔다.

꽈아앙!

두 사내는 번개처럼 뛰어들어 사격자세를 취했다가 몸을 풀었다.

없다.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테헤란으로 날아간 전화 발신지가 바로 이곳 고물상이었다.

“수색해!”

우두머리가 나머지 사내들을 향해 소리쳤다.

사내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30여 분간에 걸쳐 고물상을 조사 했지만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테헤란으로 들어가는 유무선 전화는 전부 감청이 되고 있다.

고물상에서 흘러나온 통화 내용은 간단했다.

‘내일 뵙죠’

주인은 주나이디라는 인물로 올헤 서른여섯으로 아버지 때부터 이곳에서 고물상을 운영했었다.

그러나 감청된 번호는 등록되지 않은 전화, 이른바 대포폰이었다.

카이로 미국 대사관에 죽음 같은 정적이 감싼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대사관으로 달려온 맥보란은 카이로 정보팀장호지슨의 보고를 받고 입을 다물었다.

이런 현상을 레빗 작전이라고 한다.

거북이는 부지런히 걸어가는 반면 토끼는 껑충 뛴다.

즉 흔적을 남겼다 싶으면 토끼처럼 껑충 뛰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들도 자신들의 전화가 감청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더욱이 다른 곳도 아닌 테헤란으로 전화를 걸었으니 피해야 한다는 것쯤은 더 잘 알 것이다.

“프로야. 어중이떠중이 미국에 적대감정을 갖고 있는 무슬림이 아니야, 긴 시간동안 체계적으로 활동을 해오지 않으면 이런 행동을 보일 수 없지.”

맥보란이 내린 결론이었다.

“호지슨!”

이집트 팀장을 불렀다.

“예 서기관님!”

“그 사람 잘 지켜보고 있나? 권총수.”

호지슨이 움찔하더니 더듬거렸다.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맥보란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미행을 놓쳤다는 뜻이다.

“지금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는 것이군.”

맥보란은 일어났다.

권총수의 모든 것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절대 평범한 사내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난다 긴다 하는 CIA정보원들이 미행을 포기할 정도라면 어느 정도일까.

“KAS 카이로 본부는 알고 있나?”

“거긴 압니다.”

“가보자고!”

맥보란은 밖으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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