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179화 (179/651)

제179화: 여자(1)

파흐드 왕세자 측근을 치밀하게 조사했지만 의심스러운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각료 임명을 하는데 있어 후보자군 선정에 권총수는 사울란과 함께 상당히 관여를 했다.

색깔(정치적 소신)이 없는 사람은 안 된다.

알 살만 쪽 사람일지라도 분명한 자신의 색깔을 지니고 있다면 받아 들였다.

그런 부류는 오히려 소통이 된다.

의견충돌은 조금씩 줄여가면 될 일이다.

그렇게 데려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크게 의심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파흐드 왕세자 주변은 없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비행기 조종사가 떠올랐다.

조종사는 자신이 조종하는 비행기 탑승객 명단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추적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날 몰나르 왕자를 태워온 항공기 조종사 주위를 훑는 와중에 치열한 노조 선거가 있음을 확인했다.

조금 전 쪽지를 주고 간 사내도 에미레이트 조종사다.

그로부터 놀라운 정보 하나를 얻었다

아직 잡히지 않고 있는 사만다 루스웨이트의 동생이라는 소문이 있다는 것이었다.

케냐의 쇼핑몰 테러범 숫자는 10명에서 15명.

현장에서 테러범 5명이 사살 되었고 11명이 체포되었다.

문제는 이 사건의 배후에 한 명의 영국 여성이 개입해 있다는 것이었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은 2005년 런던 지하철 자살폭탄 테러사건 주범의 부인인 사만다 루스웨이트(29)가 이번 쇼핑몰 테러 사건의 주범이라고 했다.

물론 분명한 증거는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CIA와 MI6에서도 어느 정도 긍정적 신호를 보냈다.

런던 지하철 사고 이후 루스웨이트는 ‘화이트 위도우(하얀 미망인)’란 별명이 붙었다.

남편의 죽음에 대한 복수에 나선 것이다.

쇼핑몰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베일을 쓴 여자가 총을 들고서 여기저기 지시를 내리는 광경을 봤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그녀를 잡았다는 소식은 없었다.

얼마 전 파키스탄에서 영국군 드론에 의해 사망했다는 설이 돌았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설마 그녀가 그럼 이번 몰나르 왕자 납치 사건과 관련이 있단 말입니까?”

“본격적으로 뒤져 봐야죠.”

권총수는 유리잔에 성애가 낄 만큼 차가운 맥주를 단숨에 비웠다.

사흘에 한 번씩 카이로에서 런던을 왕복한다.

평균 5시간여 정도 걸리는데 긴 비행 시간은 아니지만 대서양의 난기류는 유난히 사납다.

어떤 날은 추락할 듯 비행기가 흔들리기도 하고, 수직으로 2,30미터 정도 떨어지는 건 예사다.

그만큼 경험했으면 면역이 됐을 법도 하지만 그때마다 항상 가슴은 놀란다.

특히 처음 경험하는 승객들은 공포에 빠지고 승무원들은 안정 시키느라 정신이 없다.

“알라후 아크바르.”

심한 동체 흔들림에 조종사 마테르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 거렸다.

고도를 조금 낮추면 기류변화가 적은 층을 날아가는데 관제탑의 지시 없이 고도를 마음대로 낮출 수는 없다.

잠시 흔들리던 비행기가 안정을 되찾자 기내방송을 통해 놀란 승객들을 위로했다.

그리고 오늘도 무사히 히드로 런던 공항 활주로에 착륙하는데 성공한다.

에미레이트 공항 사무실로 들어온 마테르는 사복으로 갈아입고 사무실을 나섰다.

직원용 주차장에 세워진 자신의 차를 끌고 공항을 떠났다.

그리고 30분 후 아담한 단독주택의 대문이 열리며 마테르의 차량이 들어섰고 대문이 닫힌다.

마테르의 생활은 런던에서도 큰 차이가 없었다.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면 간단한 비행 신고서를 제출한 뒤 회사가 마련한 숙소로 곧장 직행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면 런던 동물원을 구경하고 가끔은 템즈강을 따라 자전거 하이킹을 즐겼다.

친구들, 주로 비행 기장들이지만 그들을 만나 술도 하고 저녁도 같이 했으나 특별나게 눈에 거슬리거나 의심스런 행동은 없었다.

그렇게 마테르를 진드기처럼 따라 붙은지 20일이 지났다.

권총수는 유명한 내셔널 갤러리에 있었다.

미술작품을 좋아해서 들어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그림 한 점 한 점이 세계적인 명화들이지만 십 분도 되지 못해 하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젠장!”

아무리 구경을 해보려고 눈을 부릅떴지만 쏟아지는 졸음과 싸우느라 악전고투다.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미술관 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클래식음악이다.

나무와 새, 하늘 따위를 그린 풍경화는 그런대로 알겠는데 온통 물감으로 범벅을 해놓는 추상화라는 그림은 불쾌할 뿐이다.

클래식도 그러했다.

일단 가사가 없다는 것이 화가 난다.

온갖 악기들이 꽥꽥 소릴 질러대는 소음뿐인 것을 뭐가 좋다고 비싼 돈을 주며 구경을 가고 고가의 오디오를 구입해 듣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설마 날 엿 먹이려고?”

미행이 드러난 것은 아닐 것이다.

마테르의 그림 감상은 오래 이어지고 있었는데 그를 따라 어쩔 수 없이 들어 온 것이다.

2시간 가까이 지옥같은 시간을 보내고 밖으로 나오자 상쾌한 공기와 따뜻해진 햇볕이 눈부시다.

하루 종일 뒤를 쫓은 마테르는 숙소로 쏙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이럴 때가 제일 허망하다.

“빌어먹을!”

자신의 판단이 잘못됐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갈수록 짙어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모범생이다.

다니는 곳이 정해져 있었다.

비행이 끝나면 숙소와 집, 그리고 자전거를 타거나 미술관 구경을 하고, 동료들과 차나 식사를 하는 것이 20일간 지켜본 마테르의 삶이었다.

올해 마흔한 살인데 아직까지 미혼이다.

조종사라는 직업이 결코 블루칼라라고 할 수 없다.

결혼을 안 한 건지 못 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조종사라는 직업이 혼인 못할 위치는 아니다.

권총수는 커피를 마시며 눈을 감았다.

헛 일 일까.

호텔로 돌아 온 권총수는 깜짝 놀랐다.

로비에 진열된 신문을 펼쳐 보다 하나의 기사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사우디 새 정부 국민 화합차원에서 수감중이던 왕족들 전원 석방’

권총수는 눈을 빛내며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파흐드 왕세자는 결국 납치범들의 요구에 백기투항을 하고 말았다.

“음!”

파흐드 왕세자를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나 뿐인 자식이 테러범들에게 잡혔다.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부모로서의 감정일 뿐이다.

그는 부모이기도 하지만 혁명을 하여 사우디아라비아라는 큰 나라를 새롭게 개혁하려고 하고 있다.

군주는 상황에 따라 읍참마속(泣斬馬謖)의 행동이 필요하다.

상대가 설혹 가족이라도 어쩔 수 없다.

독하지 않으면 영웅이 아니라고 했다.

새로운 사우디의 통치자가 사사롭다면 사사로울 수 있는 핏줄의 위험 앞에 무릎을 꿇는 오늘의 모습은 향후 그의 정치 행보에 많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다시 카이로에 돌아왔다.

마테르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직원 주차장에 있는 자신의 차를 끌고 집으로 돌아갔다. 시내를 달리던 마테르 차가 신호등에 걸려 멈춰섰다. 편도 2차선 도로에서 바깥 차선을 달리다 멈추었는데 바로 그때였다.

팟!

담뱃불을 붙이려던 권총수의 눈이 빛났다.

한 사람이 마테르 차의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탄다.

‘여자’

지난 20일 동안 마테르가 만난 최초의 외부인이다.

권총수는 라이터로 불을 붙이며 유리를 내렸다.

부우웅!

앞차가 진행했고 권총수는 조심스럽게 마테르 차량을 뒤따랐다.

“어!”

10여분 따라가던 권총수는 마테르가 자신의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차는 카이로 엘 마이크로 들어섰다.

엘 마이크는 지하철 1호선 종점으로 근처에 나일강이 있다.

도시 외곽이기도 하지만 주로 아프리카 여러 국가에서 몰려든 이주민들이 사는 빈민촌이기도 했다.

차는 조그만 과일가게를 오른쪽으로 끼며 골목으로 들어섰다.

뻥!

골목에서 아이들이 공을 차고 있었다.

차량이 오는데도 비키거나 피하지 않고 부지런히 공 차는데만 열중하는 아이들 사이로 차는 조심스럽게 빠져 나갔다.

권총수는 이미 골목 밖에 차를 세워놓고 내렸다.

차량이 뜸한 곳에 또 하나의 차량이 나타난다면 누군가가 자신들을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릴 것이다.

스윽!

머리에 검정색 페즈를 쓰고 상하의는 일반인 복장이다.

뿔테 안경을 끼었는데 언듯 봐서는 서른 후반에서 마흔 초반으로 보이는 행색이었다.

차량은 허름한 건물로 들어갔다.

담벼락도 무너지고 대문은 반쯤 떨어져 나갔는데 권총수는 고물상임을 알아보았다.

마당 저쪽으로 버려진 장롱, 책상과 의자, 종이박스, 녹슨 쇠붙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권총수는 들어갈 방법을 고민했다.

고물을 가져온 사람들의 눈을 피하는 것이 일차 관문이다.

팟!

골목 위쪽에서 손수레 하나가 내려왔는데 박스와 버려진 자동차 타이어와 고장 난 자전거를 싣고 오고 있었다.

“앗 쌀라 말라이쿰(평화가 그대와 함께 하길).”

“앗 쌀라 말라이쿰!”

노인도 재빨리 합장하며 미소를 지었는데 앞 이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실례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지갑을 꺼내 백달러 지폐 두 장을 내밀었다.

“이걸 내게 팔지 않겠습니까?”

노인의 눈이 커졌다.

"이런 고물은 3달러도 되지 않는데..."

"손수레 까지 함께요."

“오오! 알라시여.”

손수레는 물론 실린 고물을 합해도 절대 20달러가 넘지 않는다.

노인은 권총수의 손에 들린 200달러를 재빨리 받아쥐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앗싸 말라이쿰, 앗싸 말라이쿰!”

연신 평화를 빌어주더니 미련 없이 돌아섰다.

권총수는 손수레를 끌고 고물상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기 위해 애썼다.

납작한 철판이 바닥에 깔렸는데 저울이다.

리어카까지 포함한 무게가 49킬로였다.

실린 무게가 사무실 컴퓨터에 자동으로 찍힐 것이다.

퍽!

퍼퍽!

고물을 모아온 세 명의 노인들이 수레에 실고 온 짐들을 종류대로 분류하며 내리고 있었다.

권총수도 슬며시 그들 사이로 들어가 수레를 놓고 짐을 내리면서 안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컨테이너 박스로 된 사무실이 있었는데 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조금전 들어온 마테르의 차량이 보인다.

권총수는 한쪽에 있는 화장실 건물을 발견하고 천천히 걸어갔다.

화장실로 들어선 권총수는 재빨리 뒷문으로 빠져나가 컨테이너박스로 접근했다.

사아아!

움직이는데 발자국이 없다.

컨테이너 박스 뒤로 돌아간 권총수의 눈이 빠르게 움직인다.

작은 창문이 하나 있었는데 닫혀 있었고 에어컨 실외기 돌아가는 소리가 우웅 거린다.

권총수는 내공을 끌어 올렸다.

에어컨 실외기 소리가 방해를 했지만 컨테이너 박스에서 흘러나온 얘기를 놓치지는 않았다.

‘넷’

호흡의 간격과 강도가 다른 네 개의 숨소리가 흘러 나온다는 건 방안에 네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두렵소?”

굵직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린다.

“알라를 위한 일이고, 우리의 신앙과 천국을 예비하기 위한 선택이오.”

“좋습니다. 하죠.”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

“알라후 아크바르.”

모두가 따라 말했다.

덜컹!

컨테이너 박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이 회의가 끝난 모양이었다.

권총수는 허리를 구부리고 밖을 보았는데 마테르가 탄 승용차가 막 떠나고 있었고, 뒤이어 벤츠가 떠났다.

‘벤츠에는 누가 탔지!’

마테르는 혼자 타고 간다.

그렇다면 마테르의 차에 동승했던 사람은 벤츠에 타고 있는 두 사람 중 한 명이다.

이곳 고물상 주인은 저들과 어떤 관계일까?

‘알라를 위한 일이고, 우리의 신앙과 천국을 예비하기 위한 선택이오.’

‘좋습니다. 하죠.’

그들이 주고받은 대화였다.

뭔가 일을 시작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알 수가 없다.

권총수는 고물상 주인을 잡아 취조를 해볼까 하다 그만두었다.

저들은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고 조금만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즉시 모든 걸 멈추고 숨어 버린다.

20여일 동안 카이로와 런던을 오가며 힘들게 얻어낸 실마리였다.

서두르면 안 된다.

권총수는 나일강 너머로 지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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