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
누가 밟는 사람인가(5)
리조트에서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후 두 커플은 하루하루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이제는 아예 연애하는 티를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 현주는 마스크도 쓰지 않은채 명진이와 당당히 이태원이나 청담동에 출몰해서 데이트를 즐겼다.
처음에는 ‘설마 임현주가 얼굴도 잘 모르는 일반인이랑 사귀는 걸까?’ 싶었는지 열댓번을 그렇게 데이트를 해도 기사 한번 나지 않았었다.
명진이도 기사가 날 거라며 평생 하지도 않는 비비크림까지 발라가며 신경을 썼는데 기사가 한 줄도 나지 않아 당황할 정도였다.
그래 이상하겠지.
임현주가 미치지 않는 이상 명진이와 데이트를 즐긴다는게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는 상황이던가?
그러니 기자들도 둘이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셔도 일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던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밖에서 대놓고 팔짱을 끼고 돌아다닐 수는 없기에 아직까지도 열애설이 터지지 않은 기묘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시간 문제일 뿐이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가 나올 거라고 다들 예상하는 중이었다.
반대로 동훈과 은정은 혹시나 기사가 터지면 어쩔까 싶어 밖에서는 둘만 따로 만나 식사하는 것도 가급적 피하고 차에서만 데이트를 즐겼다.
그렇게 한 달여의 시간이 흐르고 동훈이 연출한 ‘동네 아저씨’의 1차 예고편 동영상이 나갔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대표님! 대박! 지금 반응 장난 아니에요. 다들 개봉 언제 하냐고, 기다리다 죽겠다고 난리에요.”
“그래요?”
“예고편 동영상을 올린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조회수가 5백만을 넘었어요. 계속 오르는 추세구요.”
어지간하면 쉽게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유지은 팀장조차도 잔뜩 기대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본래 김영웅 감독이 있었던 곳에서도 19금 영화임에도 6백만 관객을 돌파했을 정도로 흥행했었던 영화였다.
그런데 당시 그 영화는 개봉 전부터 엄청난 주목을 받았던 영화는 아니었다.
이유는 하나, 바로 신인감독이 연출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개봉 이후 시간이 지나 충격적이고 압도적인 액션에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결국 꾸준히 관객몰이를 한 끝에 6백만 관객들 돌파하는 기염을 토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기본적으로 관객들에게 장동훈 감독은 일종의 흥행보증수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번 영화의 예고편 동영상을 다른 감독이 제작했다면 결코 이 정도로 초기부터 주목을 받지 못했을게 분명했다.
“다행이네요.”
예고편 동영상을 만들 때 연출진, 배급사 빛그림 직원들과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의견을 조율했었다.
예고편 동영상은 원본 풀영상이 어느 정도로 잘 나왔느냐에 따라 편집이 달라진다.
본 영화가 굉장히 잘 나오면 예고편은 오히려 힘을 좀 빼야 한다.
너무 많은 주요 장면, 속칭 액기스라 불리는 장면들을 예고편에 다 쑤셔 넣다 보면 막상 극장에서 본 관객들은 이미 봤던 장면을 다시 보는 것이기에 몰입도도 떨어지고 실제 영화를 보면서 받는 재미가 경감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힘을 너무 빼면 영화관에 찾아올 관객들의 흥미를 끌어오지 못한다는 것.
반대로 본 영화가 잘 나오지 않으면 예고편에 모든걸 때려 박아야 한다.
나중에 관객에게서 ‘예고편이 전부였다’는 말을 들을지라도 일단 개봉 초기에 관객을 끌어 모으는게 중요하니까.
요 줄타기를 잘하는 사람이 정말 좋은 편집자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동훈은 크게 참여하지 않았다.
편집자와 배급사 직원들의 의견을 존중하기 때문이며 이런 짧은 광고 영상의 전문가는 저들이라고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불안함을 느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동훈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는건 당연했다.
“2차 예고편 나가기로 하셨어요?”
“아니요. 2차 예고편을 염두해두긴 했는데 반응이 아주 안 좋을때를 대비한거라 그냥 드랍할 겁니다. A&P에는 보낼거구요. 거긴 그걸 가지고 영화를 팔아야 하니까요.”
“그럼 우리쪽에서 더 도와줘야 할게 있어요?”
“하하하, 할 일 만들어 드려요?”
“아니 모...”
어지간히 일이 없나 보다.
베트남 다낭 리조트 휴가를 즐기고 온 뒤부터 사실 직원들이 딱히 할 일이 많지 않았다.
하나의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그때부터 정신없이 일해야 하겠지만, 지금은 박광효 감독이 기획단계에 있는 작품 하나 뿐이라 직원들이 딱히 해줘야 할 것이 많지 않았다.
다른 제작사였다면 제작이 끝나고 나서도 장비 반납이나 스탭들에게 잔여보수 지급 같은 걸로 많은 업무를 처리해야 했겠지만 DH미디어는 이미 상당양의 촬영장비를 아예 구매해서 장비실에 비치해 놓고 있었다.
스탭들에게 잔여 보수를 지급할 필요도 없었고 후반부 작업이 많은 영화도 아니었기에 지금 회사에서 일이 많은 직원들은 현주나 은정, 윤종빈을 케어하는 매니지먼트 팀 뿐이었다.
나머지 사무 직원들은 틈틈이 들어오는 일 외에는 웹서핑을 하는 식으로 시간을 보냈고 현장 직원들은 휴가 아닌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이제 새 작품 들어갈거니까 그렇게 조급해할 것 없어요.”
“박광효 감독님이랑 이번 작품 어디까지 계획하고 계세요?”
작품에 관한 논의는 박 감독과 둘이서 하는 것이기에 스케일이 어느 정도일지는 유지은 팀장도 모르고 있었다.
“작게 하려구요.”
“작게? 어느 정도로요?”
“현장 많이 안 쓰고 CG로 깔아서 백억 조금 넘기는 선에서 끝내려고 생각 중입니다. 물론 생각일 뿐인거지 막상 제대로 들어가면 어느 정도까지 늘어날지는 확실치 않아요.”
“으흠... 애매하네요. 그럼 나중에 한번에 일 몰려들지 않게 미리 준비 가능한 부분은 말씀해주세요. 그럼 우리 애들이 천천히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요.”
유 팀장의 말이 일리가 있었던터라 동훈은 박광효 감독을 호출했다.
박 감독은 아침에 출근하면 작업실에 콕 틀어박혀 있다가 점심시간에 나와 직원들과 같이 식사를 하곤 저녁시간이 될 때까지 작업실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저녁을 먹고 나서도 퇴근하지 않고 거의 밤 10시가 넘어서야 사무실을 나서는 그를 보고 직원들이 저렇게 열정적인 사람인줄 몰랐다며 은근히 사람 다시 봤다는 말이 들릴 정도로 노력중이었다.
“불렀어?”
들어온 박 감독의 손에는 역시 한창 수정하고 있는 각본이 들려 있었다.
“네. 일단 저랑 상의하고 있는 부분은 수정 하셨어요?”
“어. 캐릭터를 조금 더 손보고 있는 중이었어. 여주인공이 살지 않아서 여기 직원들한테 도움을 좀 받고 있었고.”
“잘하셨어요. 음... 일단 우리가 일을 좀 줘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촬영때 문제없이 스케줄 잡을 수 있으니까.”
“아, 그렇지. 그럼 일단 가장 저렴하게 촬영이 가능한 야구장을 알아봐주셔야 하는데, 프로선수들이 경기하는 구장 말하는 거예요.”
유 팀장은 익숙하게 노트를 꺼내 받아적었다.
“네. 당연하겠죠.”
“그리고 아마추어들이 연습하는 구장도 확보해야 해요. 촬영기간은 최소 한 달 잡아야 하겠구요.”
“최소 한달이요? 흐음... 이게 좀 비싸겠네. 최소 한 달이라는 것 말고 더 정확한 기간은 언제 알 수 있을까요? 경기장 섭외는 미리부터 확실하게 해야지, 안 그러면 나중에 실제 그 경기장에서 경기 일정 잡힌 후에 저희가 추가로 촬영해야 하니까 경기 일정을 조정해 달라고 할 수가 없거든요.”
“음... 그건 일단 다음주까지 정리해서 말씀드릴게요. 지금 정확한 촬영날짜까지는...”
“일단 알았어요. 최소 한달 대여 가능한 곳으로 물색해볼게요. 또 다른건요?”
“현재 취미생활로 야구를 하고 있는 배우들 목록이 필요해요.”
“아하! 그것도 필요하겠네요.”
아무리 카메라 워크나 CG로 가려줄 수 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야구에 대한 실력이 없으면 영화가 완성도 있게 나올수 없다.
액션영화에서 배우들더러 액션스쿨가서 배우라고 하는 것처럼 배우보고 지금부터 야구를 배우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건 후순위다.
선순위는 일단 야구를 할 줄 아는, 그것도 잘하는 배우를 섭외하는게 좋았다.
연기 죽이고 인물 끝내주는 배우 섭외했는데 몸치라면 어쩌겠는가?
실제 프로선수와 같은 실력을 바라는게 아니다.
실제 프로선수와 비슷한 동작, 자세만 취해주면 이제는 공의 움직임 같은건 전부 CG로 처리 가능하다.
“새로운 구단을 만들게 아니라 기존 구단을 활용할거라 의상, 미술쪽은 지금 당장은 손댈게 없을 겁니다. 이 정도만 미리 준비하시면 될 것 같아요.”
“알겠어요. 알아볼게요.”
유지은 팀장은 일이 생겨서 좋은지 미소를 띠며 대표실을 나갔고 박 감독이 미소띤 얼굴로 축하를 건넸다.
“축하해. 예고편 반응 좋다고 해서 나도 봤는데 진짜 액션 죽이더라고. 국내에 이런 액션팀이 있다는 말을 못 들었는데 어디서 구했어?”
“헐리우드에서 일했던 사람이 한국 와서 차린 회사에요. 이름이 ‘싸움꾼’인데 실력도 좋고 팀원들도 액션 실력이 좋아서 현장에서 되게 스무스하게 촬영했어요.”
“처음 듣는 곳이네. 이제 여기 꽤 바빠지겠는데?”
“이번 영화 성적이 좋으면 아마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이번 동영상 때문에 유병세 그 새끼 바짝 쫄고 있겠다. 크크큭...”
박광효 감독은 통쾌한 표정으로 쪼갰다.
“나랑 정면으로 붙겠다고 했는데 이걸로 쫄려구요. 뭔가 한방이 있을 것 같긴 한데, 나도 그게 좀 궁금하네요.”
“별거 없어. 갠 그냥 자의식 과잉이야. 영화가 잘 될 때는 더 그렇지만 성적이 안 좋으면 자기 영화를 문제 삼지 않고 항상 남 탓만 했었거든. 그리고 이번에 촬영 기간 엄청 빨랐다고 하더라고. 들었어?”
“그래요?”
동훈은 금시초문이었다.
물론 유병세 감독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응, 제작비 때문에 압박을 많이 받았나봐. 원래 그 인간 촬영 엄청 길거든. 그런데 이번에는 빨리 끝내서 스탭들이 되게 좋아했다고 얘기를 하는 거야.”
“완성도는요?”
“그건 스탭들도 모르지. 스탭들 얘기가 돌아서 나한테 온 거라 나도 모르고.”
“하긴 스탭들이 완성도가 어느 정도까지 올라왔는지는 알 수 없겠죠.”
“그래도 좋지는 않을걸? 어쨌든 나와봐야 아는 거겠지만... 어쨌든 이번에 너랑 붙어서 개쪽 당할거다. 크크큭...”
박광효 감독도 제발 유병세 감독의 영화가 폭망하길 바랐으면 하는 마음이 보였다.
같이 있던 당시에는 갑과 을의 관계나 마찬가지였기에 항상 무시받았어도 제대로 반발을 못했는데 지금은 완전히 상황이 달라졌으니 이제 대놓고 악담을 퍼붓는 거였다.
“일단 예고편 나오는거 기다려봅시다.”
“그래, 기다려 보자고. 얼마나 기똥찬걸 만들었는지 말이야.”
*
“씨발...”
컴퓨터 앞에 앉은 유병세 감독은 주먹을 감싸쥐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가 보고 있는 건 바로 ‘동네 아저씨’의 2분짜리 짤막한 예고편 영상.
조회수는 천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천개 넘는 댓글 대부분이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설마 했었다.
입봉하고 나서 지금까지 계속 홈런만 때려 왔기에 설마 이번에도 홈런을 때릴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아직 예고편에 불과할 뿐이지만 느낌이라는게 있다.
예고편에서 아주 짧게 스쳐가는 액션 시퀀스는 지금까지 국내 액션영화와는 뭔가 달랐다.
목이 마르고 손에 땀이 차오르는게 느껴지는 순간 핸드폰에 불이 들었다.
[최종본 보냈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문자를 확인하곤 곧바로 메일함으로 들어가 확인했다.
‘트루 러브 예고편 수정_2차 수정_최종수정_진짜 최종수정’
몇 번의 수정작업을 마치고 나온 최종본이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재생을 시작했다.
3분 뒤...
“크흑...”
급기야 그는 울먹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