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누가 밟는 사람인가(4)
유병세 감독은 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옆에 긴장한채 서있는 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몸매가 잘 드러나도록 쫙 달라붙은 원피스는 보기에도 아찔할 만큼 짧았고 가슴도 많이 드러나 있었다.
본래 신세연을 밀어보려고 했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말을 듣자마자 혐오감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쏘아보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었다.
어쩔 수 없이 한참을 고민하다 선택한 여자는 이번 자신이 연출한 작품에 조연으로 참여한 김아진이라는 신인 연기자였다.
이제 막 충무로에 발을 들인 그녀였기에 굉장히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었는데 반응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었다.
“그분이 정말 그렇게 돈이 많아요?”
자신의 제안에 그녀가 던진 첫 질문이었다.
이후 자연스럽게 계약조건을 이야기해주고 이 자리에 데리고 나오기까지 큰 문제는 없었다.
“항상 말 조심하고. 여기서 들은 말 어디 가서 흘리지도 말고. 알지?”
“네. 명심하고 있어요.”
그녀의 대답을 받아낸 후 유 감독은 룸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어, 왔어?”
미리 도착해서 양주를 마시고 있던 김강우 대표가 유병세 감독에게 손을 흔들었다.
물론 그의 시선은 유병세 감독을 지나쳐 그 뒤에 따라 들어오는 김아진의 얼굴과 몸매를 훑었다.
“여기는 신인배우 김아진이라고 합니다. 옆에 가서 인사드려.”
“네. 안녕하세요. 김아진입니다.”
그녀는 김강우의 옆자리에 앉으며 조신하게 인사한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김강우는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유병세 감독에게 말했다.
“앉아. 뭘 그렇게 멀뚱멀뚱 서 있어?”
“네. 저희가 좀 늦었죠?”
“내가 일찍왔지. 우리 유 감독 보려니까 회사에 엉덩이 붙이고 있을수가 없더라고.”
그는 그러면서 김아진의 얼굴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예쁘네. 나이가 몇이야?”
“스물넷이요.”
“나이 참 좋다. 술은 할 줄 알고?”
“네. 조금요.”
그는 김아진이 너무 어려워하지 않고 장단을 맞춰주는게 더욱 마음에 드는지 유병세 감독에게 흐믓한 미소를 보였다.
“우리 유 감독이 항상 고생이 많아.”
“아닙니다. 고생은요.”
“그건 그렇고 들어보니까 개봉 시기 잡혔다며? 하필 DH미디어에서 제작하는 영화랑 붙는다는데 괜찮겠어?”
김강우 대표는 김아진의 허리를 한 손으로 끌어안으며 물었다.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거 잘 돼야 해. 그래야 나도 유 감독한테 도움을 줄 수 있지. 이 영화 안 되면 나도 고민이 많아진다고. 내가 전에도 말했지? 50억 적은 돈 아니야.”
“그럼요. 알고 있습니다.”
김강우 대표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유 감독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씨익 웃었다.
“그래도 내가 누구야? 아주 망하지 않는 이상 우리 인연을 매정하게 끊을 내가 아니지. 우리 사이가 그 정도로 냉정한 사이는 아니잖아.”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감사할 뿐입니다.”
유병세 감독은 김아진을 선택한게 참으로 잘한 일이었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럼 이제 가 봐.”
김강우는 이제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지 유병세 감독에게 그만 가라는 듯 손을 휘젓고는 나가는 것도 보지 않고 시선을 김아진에게 돌렸다.
*
자정이 지난 늦은 밤, 다낭의 한 리조트 룸에는 불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늦은 밤까지 다 같이 술을 마시던 이들 중 아직 정신을 차리고 있는 이들은 몇 되지 않았다.
평소에 술을 워낙 좋아해 대낮에도 막걸리를 즐겨 마시던 동훈과 본래 술을 좋아하지 않아 오늘도 몇 모금 마시지 않은 은정, 그리고 타고나기를 술이 세게 타고 났다는 현주와 그런 그녀를 보필(?)하기 위해 평소보다 술을 적게 마셨던 명진만이 살아났아 있었다.
그래도 다들 얼큰하게 취한 상태였던 건 맞았기에 이제 자신들의 방에 돌아가 자려는데 현주가 말했다.
“우리 팥빙수 먹어요. 나 시원한게 먹고 싶어.”
그녀의 시선에 명진이 얼른 나섰다.
“감독님, 시원하게 팥빙수 어떠세요?”
이건 뭐 하인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현주의 눈빛 한번에 저렇게 말 잘 듣는 아이처럼 행동하는 명진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라. 아직 문 연 곳이 있기는해?”
현주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내가 아까 사다 놓고 냉동실에 둔 게 있지요.”
“내가 가지고 올게요.”
명진이 비틀거리는 현주를 앉히고 후다닥 냉장고에서 팥빙수를 가지고 나왔다.
현주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꽁꽁 얼려진 팥빙수를 쇠 숟가락으로 열심히 깨부쉈다.
명진이 도와준다고 했지만 술이 취해서 그런지 자기가 해보겠다며 열심히 용을 써댔다.
다른 사람들 방에서 자고 있으니 조용히 하라고 했지만 이 정도는 들리지도 않는다며 한참 용을 써대더니 결국 명진이와 한참 씨름한 끝에 적당히 먹기 좋게 만들어놓았다.
“음... 역시, 술 마시고 난 다음엔 팥빙수야.”
현주는 한 숟가락 입에 넣더니 만족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은정이 동훈에게 귓속말로 현주가 의외로 귀여운 모습이 있다고 말했다.
현주는 은정이 귓말하는걸 흘깃 보다가 말했다.
“거 눈에 거슬리네. 둘이 연애 할거면 나가서 하던가.”
“아, 아니에요.”
은정이 흠칫 놀라며 손을 저었지만, 현주는 심통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다 아는데 아닌 척하긴.”
“아직 아닌데...”
“아직 아니야? 에헤... 장 감독님이 눈치가 없으신가? 그런 스타일은 아니신거 같은데. 둘만의 시간이 필요하겠구나?”
이야기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자 동훈이 서둘러 나섰다.
“현주 씨, 그게 아니고...”
“그래요, 그 얘긴 그만해요. 애 민망하겠다.”
“맞아요.”
“그러지말고 우리 둘이 할 이야기 있으니까 자리 좀 피해주실래요? 팥빙수를 들고 나가긴 그렇잖아요.”
현주가 팥빙수 통을 흔들며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어쩔 수 없이 자리를 피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아, 네 뭐...”
“저도 마침 바람 좀 쐬고 싶었어요.”
은정은 카디건을 챙겨서 일어났고 동훈도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오셔도 됩니다.”
현주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가는 동훈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명진은 현주에게 물었다.
“거의 쫓아낸 것 같은 느낌은 나만 받는게 아니죠?”
“쫓아낸거 맞아요.”
“왜요?”
“눈치가 없어 보여서요. 남자들 다 그렇잖아요. 돌려 말하면 잘 못알아 듣는거. 그래서 그냥 나가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왜 쫓아냈냐구요.”
현주는 숟가락을 입에 넣고 빤히 명진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감독님도 참 눈치 없으시네. 내가 괜히 내보냈겠어요? 은정이 도와주려고 했죠. 은정이가 많이 좋아하는 것 같은데 장 감독님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시는 것 같잖아요.”
“아... 그런데 막상 둘이서 별 얘기 없이 들어올 수도 있잖아요?”
“그럼 지네 팔자지 뭐.”
“아...”
명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팥빙수를 한숟갈 퍼서 입에 넣다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은정이를 도와주려고 했어요?”
현주는 취해서 약간 풀린 눈으로 피식 웃었다.
“나랑 감독님 이어주려고 은정이가 여우짓한거 내가 모를줄 알았어요?”
“그랬나?”
“진짜 몰라요?”
“그런 적이 있어요?”
“아... 정말 남자들이란...”
현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다시 홱 돌리곤 말했다.
“그런데 언제 말 놓을 거예요? 나이도 나보다 두 살 많잖아. 난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해서도 예의 있게 ‘이랬어요, 저랬어요’ 하는거 싫은데.”
“아직 손도 안 잡았는데 결혼까지 생각했습니까? 그렇게 안 봤는데 여지껏 외로워서 어떻게 살았어요?”
“말이 그렇다는거지. 그래서? 나랑 결혼 생각 안 해봤어요?”
안 해봤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이미 결혼해서 애 둘에 자식들 결혼시키며 노년에 여행다니는 것까지 그려보지 않았던가?
“아니, 그런건 아니고... 크흠...”
명진은 시선을 피하다 슬쩍 현주의 손을 잡았다.
나름 마음을 굳게 먹고 행동한 것이었지만 현주의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
“에게? 이게 끝이야?”
“그럼?”
현주는 게슴츠레 풀린 눈으로 명진과 시선을 맞추다 그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
“현주 언니가 눈치가 빠르긴 해요. 그쵸?”
“그런가보다.”
“헤헤...”
은정은 바짝 다가와 동훈의 팔을 껴안았다.
팔에서 느껴지는 폭신한 촉감에 화들짝 놀랐지만, 동훈은 팔딱팔딱 뛰는 가슴을 가까스로 달래며 아무렇지도 않은척 나무랐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러냐?”
“다들 자고 있어요. 내가 다 체크했어. 지금 깨어있는 사람은 네 명 밖에 없어요.”
“다른 한국 관광객이 보면 어쩌려고?”
“아이고 걱정도 많으셔라. 지금 깜깜해서 잘 보이지도 않아요.”
은정의 말처럼 리조트에서 조금만 벗어나니 확실히 멀리있는 사람의 얼굴을 분간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옮길 때 은정이 말했다.
“유병세 감독 있죠.”
“어.”
“그 인간이 언니한테 스폰서 제의했대요.”
“응?”
동훈이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자 은정은 별거 아니라는 듯 동훈의 팔을 세게 잡고 걸음을 옮겼다.
동훈은 그녀를 따라 다시 걸음을 옮기며 이야기를 들었다.
“별일 없었어요. 그냥 유 감독한테 그런 소리할거면 꺼지라고 했대요. 유 감독 본인이 해주겠다는건 아니었고 누군 소개시켜 준다고 했대나? 하여튼 그랬대요.”
“미친놈이네. 그 정도까지는 안 봤는데.”
“언니가 처음 감독님을 만나고 와서 승무원이 아닌 다른 인생을 살려고 했을 때가 기억이 나요. 그때부터 난 감독님이 되게 궁금했어요. 어떤 사람일까. 언니한테 흑심이 있는건 아닐까. 실력은 있는 사람일까.”
“그래서 막상 보니까 어땠는데?”
은정은 배시시 웃었다.
“생각보다 멋있었어요. 매너있고 자상하고... 그래서 언니가 감독님을 떠나서 언니 전 남친 말을 듣고 이상한 회사로 간다고 했을 때 엄청 반대하긴 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어요.”
“왜 마음이 놓여?”
“감독님이 언니 좋아하면 어떡하나 생각했거든요.”
“내가? 진짜 그렇게 생각했어?”
“안 좋아하면 어떻게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을 보고 단박에 캐스팅해서 ‘넌 미래에 최고 여배우가 될거야’라는 포스를 팍팍 풍겨가면서 키워주려고 했을까 생각했죠. 솔직히 말해봐요. 내가 다 이해할게. 언니 마음에 있었어요?”
은정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아니. 매력 있는 친구고 여배우가 딱이라고 생각은 했었어. 그런데 ‘내 여자로 만들고 싶다’ 뭐 이런 생각은 해본적 없었어. 진짜로.”
은정이 손가락을 튕겼다.
“흐음... 백점짜리는 아니지만 나름 나쁘지 않은 대답이었어요. 오케이. 합격.”
“하하, 합격한거야? 다행이네.”
“그래서 지금은 언니한테 괜히 미안하기도 해요. 조금 이상한가?”
“그 이유가 혹시 나 때문이면 절대 미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언니는 나에 대해서 아무 생각도 없을텐데?”
“흐음... 그럴까요?”
은정은 미묘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동훈은 은정의 발걸음을 맞춰 걸었다.
산책 코스를 절반을 돌아 저 멀리 리조트가 다시 보이기 시작할 때 은정이 말했다.
“감독님 나 좋아하죠?”
“어? 어, 그럼.”
“요즘은 여자가 먼저 대쉬하는게 이상한게 아니래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말인데 감독님 이제 내꺼 해요. 응? 감독님 이제 내꺼야. 오케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은정의 눈빛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오케이. 난 이제 신은정꺼다.”
“히힛! 좋아좋아.”
그녀는 부끄러운 얼굴로 걸음을 멈춘채 몸을 비비꼬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감싸쥐고 입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