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4화 (4/116)

# 4

난관... 아니면 기회(1)

“대충 맥락은 알겠는데 정확히 상황이 어떻게 된 겁니까?”

“안 감독이 처음 준비했던 각본을 중간에 수정했어요. 그것만 해도 현주 성격에 뿔이 올랐을텐데 바뀐 각본으로 임현주 연기를 가지고 계속 트집을 잡으니까 임현주가 토라진 모양이에요.”

오 상무가 옆에서 한마디 거든다.

“NG를 20번 넘게 냈다고 합니다. 걔 성격에 촬영장 뒤집지 않은 것만해도 대단한 인내심을 보인 거죠.”

“아...”

임현주의 성격이야 이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적어도 그녀 연기가 형편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미니시리즈나 로맨틱코미디 정도의 가벼운 영화에서는 거슬리게 보이지 않을 만큼 기본은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NG를 스무번이나 연속해서 냈다면 그녀 연기력으로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걸 시켰을 가능성이 다분했고 만약 그게 맞다면 그녀가 속으로 얼마나 열불이 뻗쳤을지는 안봐도 비디오다.

다시 박 대표가 말을 이어갔다.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그래서 임현주 대신에 대원 파트너스에서 나선거죠. 이건 안 감독 입장에서도 물러설 수가 없고 임현주 입장에서도 물러설 수가 없게 된 건데. 괜히 우리만 개피 보게 된 거죠, 아휴...”

듣고 보니 골치 아픈 상황인 게 맞았다.

안 감독이 물러선다면 안 감독의 위신에 크게 손상이 갈 거고 임현주 입장에서도 이렇게까지 했는데 또다시 안 감독에게 털리면 여배우 자존심에 대원 파트너스 대표를 걷어찰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애먼 제작사와 스태프들만 가운데 껴서 새우 등 터지는 꼴이 된 거다.

박 대표의 근심이 이해가 갔다.

“그래서 절 선택했다는 말이네요.”

“꼭 끈 없고 잃을 게 없는 감독이라서만은 아니에요. 우리가 무슨 고작 몇억짜리 다큐멘터리 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이거 실패하면 우리도 타격이 있는데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방패막이 세울 감독을 찾는 건 있을 수 없지. 장 감독의 시나리오는 분명 흥미로웠어요. 그리고 장 감독 첫 단편영화도 보고 직원들 통해서 장 감독 스타일이나 실력에 대해 물어보며 충분한 검증의 시간을 거쳤어요. 결과는 당연히 지금 상황 그대로인거죠. 이건 진심이에요.”

그냥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이 각본 지금 이 자리에서 좀 봐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요.”

동훈은 앉은 자리에서 두툼한 두께의 각본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처음 시켰던 커피를 다 마시고도 한참의 시간을 더 보냈을 즈음 동훈이 각본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흠...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동훈의 미심쩍은 표정에 박 대표의 미간이 살짝 꿈틀한다.

“시나리오 자체가 별로라는 건가요? 아니면 해낼 자신이 없다는 건가요?”

“음, 솔직히 말할게요. 시나리오도, 각본도 뭔가 확 재밌다라고 느껴지지 않네요. 이대로는 자신 없습니다.”

“하! 안철호 감독의 시나리오가 별로다? 장동훈 감독, 생각보다 더 대단한 친구였네요?”

박 대표와 오 상무의 표정이 복잡 미묘해졌다.

어이가 없겠지. 가당치도 않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현시점에서 흥행력 다섯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안철호 감독의 시나리오를 대놓고 까는 신인감독이라니...

하지만 이유를 안 들어볼 수 없다는 생각인지 박 대표가 표정 하나 구기지 않고 재차 물어본다.

“이대로는 자신이 없다라... 그럼 각본을 새로 쓰고 싶다는 말인가요?”

“네. 제가 이 각본에 손을 댈 수 있게 해주면 영화를 맡겠습니다.”

지금 촬영이 중단된 ‘미녀 스파이’의 촬영 일정표와 각본을 받아들고 나서 문득 떠오른 영화 하나.

그 영화는 김영웅 감독이 있었던 그곳에서 완전 대박을 친 작품은 아니었지만 나름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었다.

안 감독의 각본을 그대로 안고 가도 나쁘지는 않았다.

적당히 긴장감있고 유쾌하면서도 마지막에 여운을 주는 것도 좋았다.

다만 안 감독의 각본은 안 감독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기에 그가 혼자 구상했던 장면을 완벽하게 찍어내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안철호 감독은 촬영 중간에 콘티를 계속 수정해가며 찍기로 유명하다.

지금 나온 각본도 결국 안 감독이 찍다보면 중간에 틀어질 가능성은 다분하다는 얘기.

안철호 감독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이 아니라면 지금 각본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어봤자 안 감독이 연출한 것보다 더 좋은 결과가 나오기 힘들 거다.

문제점은 한 가지 더 있다.

안철호 감독이 도중에 바꿔버린 이 각본으로는 깊은 내면 연기를 보여주기 힘든 임현주가 타이틀 롤을 맡기에 아주 많이 버겁다.

애초에 이 각본으로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면 여주인공을 임현주가 아닌 다른 배우로 밀고 갔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제안은 아무 의미없는 것이니 그럴바에야 차라리 다른 차원의 영화를 가지고 온다면 훨씬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영화의 모든 장면과 대사가 고스란히 머릿속에 들어있으니까.

그리고 임현주라는 여배우는 그 영화에 나왔던 주연배우만큼이나, 아니, 더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감독이 바뀌는데 각본이 수정될 수도 있겠지. 좋아요, 만약 바꾼다면 어느 정도나 손 댈 거예요?”

“다 손대고 싶습니다만.”

“다? 전부?”

“네. 전부.”

시나리오를 어중간하게 손대면 더 죽도 밥도 안 된다.

차라리 새집을 짓는게 낫다.

“허...”

박 대표가 얼굴을 쓸어내리고 지긋이 동훈을 바라본다. 그러다 굳은 얼굴로 물었다.

“아예 새로 만들자? 이봐요, 장 감독. 프리 프로덕션 기간이 영화 하나를 만드는데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 그런건가요?”

“알고 있습니다. 조감독으로만 7년 넘게 굴렀습니다. 프리 프로덕션 기간 동안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영화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걸 모를 수 없죠.”

“그런데도 각본을 싹 다 갈아엎자는 말이 나와요?”

동훈은 각본을 싹 다 갈아엎자고 했을 때 박 대표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욕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가 이 바닥 제작사 대표치고 꽤나 신사적인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안철호 감독님의 ‘미녀 스파이’가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현주씨로 이 영화를 끝까지 무사히 찍을 수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흠...”

박 대표도 대답을 하지 못한다.

당연하지. 그럴 수 있었다면 안철호 감독이 왜 두 손 털고 잠수탔겠나?

더군다나 각본상에 있는 여주의 저 농도 깊은 감정 연기를 끌어내려면 배우와 감독간에 수십번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싸우면서 치열한 대화를 나누어야 할 것인데 임현주와의 그런 관계는 도저히 그려지지 않았다.

이 각본을 그대로 고수한다면 백만은 물론이고 오십만도 채 들지 않을게 분명했다.

“각본을 수정해야 하는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맹탕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대표님도 이거 성공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야 당연하지.”

“제작비는 오버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마침 제가 생각했던 각본이 있었는데 정말 우연찮게도 안 감독님의 각본과 결이 비슷한 게 있거든요. 여주의 연기력이 크게 필요하지 않은 로맨틱 코미디니 오히려 좋아할겁니다.”

“이미 현장 로케 다 잡아놨고 미술팀이 세팅해놓은 건 어떻게 할 겁니까?”

“그것도 최대한 살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준비해놓은 소품들도 그대로 써도 될 것 같아요.”

“그럼 거의 비슷한 내용이겠네요?”

“맞습니다. ‘미녀 스파이’는 남파간첩으로 온 여자가 주인공이고 제가 바꿀 각본은 국정원 요원이 주인공이거든요, 물론 여주가 타이틀 롤입니다.”

“으흠... 이게 내 맘대로 딱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투자자들도 쉽게 넘어갈 게 아닌데...”

일단 투자자의 돈이 들어왔으면 영화의 향방을 결정하는 데에 제작사의 뜻 외에 투자자의 입김도 들어갈 수밖에 없다.

박민구 대표가 우려하는 건 그것이었다.

“제작비는 덜 썼으면 덜 썼지, 더 쓰지는 않을 겁니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다르지만 큰 선은 비슷합니다. 아까 시나리오 보셨죠? 충분히 더 재밌게 만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박 대표는 팔짱을 끼고 한동안 침묵을 이어갔다.

그렇게 5분여의 시간이 흐른 뒤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본래부터 안 감독의 방향이 그리 마음에 들진 않았거든. 작가주의 색채도 너무 진했고... 어차피 엎어진거 제대로 처음부터 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하지만 이건 분명하게 하고 갑시다. 사흘 뒤 각본을 보고나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지 말지 결정할 겁니다. 괜찮지요?”

“물론입니다. 그럼 제가 드린 ‘새로운 세계’ 시나리오는 차후 제작 진행하겠다고 계약서 도장 찍어주시면 이거 제가 마무리 짓겠습니다.”

“오케이. 나 장 감독 믿겠습니다. 아, 그런데... 혹시 새로 만들 각본의 영화 제목은 어떻게 됩니까?”

동훈은 잠깐 망설이다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6급 공무원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