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새로운 시작(2)
아마 그 DVD를 보지 않았다면 강석호 감독을 따라서 가고 싶지 않은 술자리라도 억지로 따라갔을거다.
영화와 관련된 학과가 아닌 경영학과를 나온 동훈은 한국영화아카데미도 나오지 않았다. 한마디로 학벌, 인맥 아무것도 없다고 봐야 했다.
그랬기에 강석호 감독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었다.
이곳 영화판에서 현장을 통솔하는 감독의 말은 망망대해에 떠 있는 함정 선장의 말 만큼이나 절대적이다.
특히 중부대학교 영화학과를 나온 강석호 감독은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것에 비례해 영화학과를 안 나온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심했다.
비단 그만이 아니었다. 영화학과나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수료하지 못한 이들은 메가폰을 잡는다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김영웅의 지식을 알고 난 다음에는 DVD속의 영화를 만든 다른 차원의 한국이라고 해도 별다를 것 없다는 걸 알게돼 약간의 위안이라도 얻었지만, 영화판 자체의 시장성은 이곳이 훨씬 떨어진다는 걸 알게돼 오히려 더 좋은 여건이라고 생각했다.
김영웅이 살았던 한국은 제작사의 입김이 강력하긴 하지만 영화가 성공했을 때 감독이 가져가는 수입부분이 상당했다.
그렇기에 감독은 더욱 열정적으로 재밌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그런 노력 덕분에 더 좋은 영화들이 만들어지는 선순환 구조였다.
안타깝게도 이곳은 아니다.
80년대 만화의 호황 이후 애니메이션 산업이 크게 부흥하자 투자자들은 얼마나 흥행할지 미지수인 영화보다 확실한 코어팬층을 가진 애니메이션에 더 많은 투자를 하기 시작한 거다.
물론 성공한 상업영화도 상당수 존재하지만 투자자들과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은 조금 재능 있어 보이는, 싹수가 있다 싶은 감독들에겐 애니메이션 제작을 맡겼다.
반대로 상업영화를 성공시킨다고 해도 감독에겐 큰 수익을 주지 않았다. 김영웅이 살던 차원의 일본처럼 말이다.
그곳의 일본영화는 90년대 초만 해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좋은 영화들이 많이 나왔지만 어느 순간부터 한국 상업영화에 의해 밀려나게 된다.
이유는 하나였다.
아무리 좋은 영화를 만들어도 큰 보상을 주지 않으니 감독들이 좋은 영화를 만들려는 노력을 하지 않게된 거다.
이곳처럼...
하지만 문제를 정확히 깨닫게 되니 두렵지 않았다.
한국 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성공한 영화감독이 된다면 이곳 영화판의 시장구조 자체를 바꿔버릴 수 있을 테니까.
자신감은 차고 넘쳤다.
“정신 차리고, 석호 형 원래 저러잖아? 신경쓰지 마.”
쓸씁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는데 지나가던 광종이 형이 팔을 툭 치면서 지나갔다.
촬영감독 10년차인 그는 그래도 학연, 지연 없는 동훈이 마음속 말을 내뱉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네. 괜찮아요.”
“그런데 진짜 입봉 하는거야?”
“아직 확정된 건 없어요. 오늘 미팅해봐야 알아요.”
“누구랑 미팅인데? 제작사 대표가 나오는 건 아닐테고... 팀장급이 나오는 거야?”
“글쎄요. 저도 잘...”
거짓말이 아니라 일단 약속을 잡았다는 거에 흥분해서 누구와 미팅하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에이... 거짓말 하는거지?”
“진짜예요.”
“그래? 그럼 말고... 그런데 촬영은 누구랑 할지 생각해둔 사람 있어?”
이렇게 대놓고 물어볼 줄은 몰랐던지라 순간 표정관리를 못하고 멈칫하고 말았다.
“아... 그게 아직...”
“음... 그래? 수고해.”
어색한 얼굴로 인사하며 멀어지는 그를 보며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솔직히 광종이 형과 친하긴 했지만 새로운 지식에 눈뜨게 된 이후 구도와 색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결국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을 탈피해 조금더 감각적이고 현실적인 구도와 촬영기법을 구현해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는 자신의 촬영기법에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광종이 형과는 같이 일하기 힘들다는 말과 같았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생각이 꽉 막혀있는 사람이라 한참이나 어리고 영화아카데미도 나오지 않은 조감독의 신분으론 설득이 가능할 리 없었다.
“오빠 화이팅!”
지나가던 의상팀 은재가 주먹을 살짝 들어올려주곤 황급히 가던 길을 간다.
“그래, 파이팅이다.”
동훈은 잡생각은 털어버리고 다시 촬영에 집중하기로 했다.
강 감독의 상한 기분 때문인지 주연배우가 늦지 않게 도착했음에도 촬영 내내 분위기가 좋지 못했다.
추가 촬영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김석훈과 별다른 디렉팅 없이 무작정 많이 찍어놓고 가장 마음에 드는 걸 선택하는 강 감독의 스타일이 문제였다.
결국 두 씬 정도만 찍는 추가 촬영은 8시가 지나고서야 끝나고 말았다.
동훈은 강석호 감독의 쏘아보는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빠르게 일을 마무리했고, 연출부 막내에게 나머지 잡일을 맡긴 뒤 촬영장을 벗어났다.
강석호 감독이 뒤에서 호박씨를 까댈 것이 분명했지만, 그다지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결국 딱 한 편이다.
딱 한 편만 제대로 띄우면 인맥이고 지랄이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다.
이제 갑이 되는 거다.
*
동훈은 옥탑방에 들러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택시를 타고 충무로로 향했다.
저녁시간이 한참 지난 10시로 약속을 잡아놓았기에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다.
“여기예요!”
현재 흥행 1위를 달리고 있는 애니메이션 대형 광고판이 눈길을 잡아 끄는 충무로 서울극장.
그 서울극장 1층 대형 커피숍에 미리 도착한 동훈이 손을 흔들자 장년의 남자 둘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늦었습니다.”
“늦긴요, 아직 9시 50분이잖아요. 게다가 오늘 추가 촬영했다면서요? 전 더 늦을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요. 오상진입니다.”
웃으며 동훈을 맞이하는 이가 명함을 내밀었다.
30대 중반이지만 벌써부터 탈모 기미가 조금씩 보이는 남자였다.
[영화세상 오상진 상무]
나이가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직위가 상무라고 쓰여있으니 왠지 더 있어 보인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분은 우리 회사 대표님이신 박만구 대표님입니다.”
대표라고? 아직 계약서에 도장도 안 찍었는데 사내 미팅도 아닌 외부 미팅자리에 대표가 나왔다니...
“아이고,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도 만나서 반가워요.”
분명 시나리오가 너무 좋아 대표가 자리에 나온 게 아닐까 생각하며 내심 기분이 들떴는데 대표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그는 웃으며 동훈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똥 마려운 강아지 같은 다급함이 표정에 드러나 있는 거다.
이유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시나리오는 잘 봤습니다. 조폭들의 세계를 아주 흥미롭게 그렸더군요. 그런데 이런 무거운 소재의 이야기가 먹힐지...”
박만구 대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부정적인 표정을 지었다.
“아직 완성된 각본이 아니라서 그렇게 느낄 수 있는데 너무 무겁기만 한 내용은 아닌데... 그럼 별로라는 건가요?”
“아니아니, 좋은데... 시나리오 딱 보면 제작비가 최소 50억 이상은 나올텐데 동훈씨 이번에 입봉이잖아. 우리로서도 부담이 크거든.”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동훈이 별 말없이 빤히 박 대표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이번에 우리가 촬영하다 잠시 스톱을 걸어놓은 게 있는데... 일단 그걸 맡아보는게 어때요?”
촬영하다 중간에 엎어진 영화라면... 설마!
“투자자랑 대판 싸워서 감독이 도망갔다던 그 영화가 영화세상에서 제작한 거였습니까?”
박 대표와 오 상무가 서로를 바로보며 멋쩍은 듯 웃음 짓는다.
“하아... 맞군요.”
이걸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옴팡 덮어썼다고 해야 할지...
박 대표가 말하는 영화는 코믹 스파이 영화로 여주인 남파 공작원이 한국에 적응하며 벌이는 좌충우돌 로맨스인데 이 작품의 여주가 탑스타인 임현주다.
임현주 정도 되는 톱스타와 같이 작업을 해보라는데 이걸 발목을 잡혔다고 징징대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받아들이자니 여러 가지로 뒷맛이 안 좋다.
물론 자신의 시나리오로 제작할 작품이 연기된 게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오해하지 말고... 우리가 지금 굉장히 난처한 상황이에요. 그래서 내가 깊게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장동훈 감독이 이걸 먼저 처리해줬으면 해요.”
박 대표가 서류봉투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뭔가 하고 보니 영화 ‘미녀 스파이’의 촬영 일정표와 각본이었다.
“촬영은 어디까지 해놨습니까?”
오 상무가 박 대표 대신 대답했다.
“한 20%정도? 대본에 콘티까지는 다 나왔으니까 동훈 씨... 아니, 장 감독이 이후 촬영하는데는 문제 없을 겁니다. 지금 배우들이랑 스태프들이 이것 때문에 다른 스케줄도 못 잡고 다 묶여 있어요. 만약 이번에 장 감독님이 이거 제대로 살려 주시면 앞으로 감독님 작품 제대로 서포트 해드리겠습니다.”
처음엔 찝찝해서 거부하려했지만 듣고보니 솔깃하긴 했다.
“만약 시작한다면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아이고 감독님께서 오케이만 하시면 내일 당장이라도 시작할 수 았죠. 기사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이게 촬영 중단된지 보름 정도 된거라 아직 전 감독님이 복귀하면 바로 촬영 시작하려고 스탠바이 상대로 대기하고 있거든요.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동훈의 긍적적인 답변에 오 상무가 화색을 드러내며 대답했다.
나쁘지 않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저기... 절 찍으신 이유가 있습니까? 안철호 감독님이 손털고 나간 작품인데 제가 꽂히면 분명 투자자들도 신뢰하지 않을거고 배우들도 납득하지 못할 텐데요. 괜히 분란만 생기고 제작이 또 미뤄지는 거 아닙니까?”
자칫 잘못하다가는 영화는 영화대로 못 찍고 본래 찍으려던 영화도 흐지부지 될 수 있는거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던 거다.
이번에는 오 상무 대신 박 대표가 입을 열었다.
“장 감독도 알겠지만 안철호 감독이 좀 애같아요. 예술한다는 사람들이 조금 그런 경향이 있긴 하지만 애새끼마냥 속이 좁아 터졌거든. 지금 눈에 불을 켜고 자기 대신에 누가 들어오는지 지켜보고 있는데 어떤 감독이 발을 들이겠어요? 일단 한국영화아카데미를 나온 감독들은 다 손 들어버리니 우리도 방법이 없지.”
“투자자들이 안 감독님이랑 의견을 좁히지 않는다고 하던가요?”
“후후. 안 감독한테 안 져줬을 것 같아요? 몇 번을 져줬지. 그런데 안 감독이 건들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려서...”
“네?”
“어차피 장 감독은 알아야 할 이야기니까 말해줄게요. 안 감독이 두 손을 털고 잠적한건 우리나 투자자와 문제가 생겨서 그런게 아니에요. 임현주랑 붙어서 그런거지. 알겠지만 임현주 성격이 보통 아니라서 절대 잘못했다고 물러서지 않는데 하필 임현주가 이 영화 메인 투자자인 대원 파트너스 대표의 이거란 말이죠. 내말 무슨 뜻인지 이제 이해가 가시죠?”
박 대표가 새끼 손가락 하나를 들고 까딱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