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난관... 아니면 기회(2)
“6급 공무원이라... 제목이 뭔가 의미심장하네? 뭐, 내용은 나중에 보면 알겠고... 이제 한 배 탔으니까 술이라도 한잔 할까?”
아까도 반존대를 하더니 이제는 자연스럽게 하대를 하는데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말투에 거만함이 담겨 있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그것보다 일단 이것부터 살려야하니까 술은 다음에 마시는게 어떨까요?”
동훈이 촬영일정표를 들고 말하니 박 대표와 오 상무가 빙긋 웃음 짓는다.
“아무래도 그게 좋겠지? 각본 새로 쓰는데 얼마나 걸리겠어요?”
“사흘이면 충분합니다.”
“사흘? 정말 그거면 충분합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쓰려고 하면 말도 안 되는 시간이다.
다만 동훈의 머릿속엔 이미 장면과 대사가 꽉 들어차 있었다.
사흘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컴퓨터와 씨름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거다.
“네. 우연찮게 안 감독님 영화와 아주 비슷하게 구상해놓은 스토리가 있었거든요. 조금 변형하고 살을 붙이는 거라 사흘이면 충분합니다.”
“허허... 이거 운이 좋은 건가?”
말은 운이 좋다고 하면서도 미심쩍어하는 표정이다.
세상 모든 일이 너무 딱딱 들어맞으면 오히려 불안한게 사람 심리이니 그의 걱정이 이해가 갔다.
“결과는 사흘 뒤에 아시게 될테니 그때 가서 보고 결정하셔도 됩니다.”
너무도 자신만만한 동훈의 태도에 박 대표와 오 상무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좋습니다. 좋아요. 그렇게 합시다. 그럼 스탭들이랑 배우들에게 통보하고 입을 좀 맞춰야 할건데?”
“아닙니다. 이제와서 새로 대본리딩하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그냥 바로 시작하는게 덜 어색할 것 같습니다.”
“그럼 사흘 뒤에 바로?”
동훈은 잠시 고민하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흘은 너무 이르고요, 일주일만 시간을 주시죠. 촬영일정표도 수정해야하고 미술팀이 부족한 소품 구하고 세트장 변형할 시간도 필요하니까요. 그리고 배우들이 대사 외울 시간도 필요하고... 딱 일주일 뒤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일주일만에 가능하겠습니까?”
본래 동훈의 능력이라면 절대 불가능할 내용이다.
아마 대한민국 감독 그 누구도 쉽사리 ‘예스’라고 하지 못할 거다.
“이런 말씀 드리긴 그렇지만 사실 제가 드린 시나리오 전에 구상했던 게 바로 지금 보여드릴 작품이거든요. 꽤나 오랫동안 준비했었던 거라 어떤 장면을 어떻게 찍을지 머릿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일정표에 있는 현장 보니까 거의 수정없이 그대로 살릴 수 있는 것들이고 또 자동차 액션 같은 불필요하게 돈만 많이 나가고 현장 인력만 축내는 장면이 없어서 오히려 일정 자체는 더 빨라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무리 살릴 수 있다고 해도 미술팀에서 만들어놓은 세트까지 살릴 수 있다는게... 어렵지 않아?”
아마 다른 영화였다면 절대 불가능했을텐데 하필 딱 스파이 영화라 기존의 세트를 조금 손보면 충분히 가능할 듯 싶었다.
“당연히 쉽진 않겠죠. 하지만 어렵다고 처음부터 세트 다시 만들고 구성 다시 잡으려면 최소 몇 달에서 많게는 반년을 훌쩍 넘길지도 모릅니다. 그냥 살릴 수 있는 건 살려야 스탭들 빨리 돈주고 영화 마무리 짓죠.”
“하긴 지금도 법인 통장에서 돈 나가는 거 보면 피가 마르고 숨이 가빠진다니까? 내가 요새 잠을 못자요. 장 감독이 그렇게만 해준다면 내가 바랄게 없지. 문제는 그게 가능하냐는 건데...”
아무래도 미심쩍은가 본데 사실 그게 정상이라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긴 했다.
“네, 가능하게끔 해보겠습니다. 대신 중간에 놀이공원 장면을 하나 넣고 싶은데 이 부분만 회사쪽에서 지원 해주시면 뭐...”
“그건 가능하지, 방학시즌도 아니고... 폭파씬 같은 건 없지?”
놀이공원에서의 폭파씬이면 수백억을 쏟는 대작들도 엄두를 못낸다.
“하하, 당연히 없습니다.”
“좋아. 그럼 난 자네만 믿고 있겠네. 잘 부탁하지.”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오 상무는 장 감독 지원 착실히 해주고, 특히 현주 꼬장부리지 않게 중간에서 잘 커트해.”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현주 매니저는 제가 꽉 잡고 있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 현주 매니저는 현주한테 꽉 잡혀 있으니까 문제지. 하여튼 잘 해보자고. 계약서는 오 상무가 장 감독이랑 스케줄 잡아서 작성해.”
그토록 바라던 제작사와의 미팅은 이렇게 예상치 못했던 전개로 끝났다.
비록 자신이 원하던 시나리오로 영화를 제작하는 건 미뤄졌지만 어쩌면 이게 베스트 시나리오 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세계’로 첫 데뷔를 하게 되면 원하는 배우를 캐스팅하기 어려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어찌됐건 임현주라는 톱 여배우와 함께 화려한 신고식을 치르게 생겼으니 기뻐해야 마땅하리라.
그렇게 제작사 대표와 헤어지고 곧바로 옥탑방에 틀어박혀 각본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미 촬영했던 분량에 어떤 장면을 촬영했고 어떤 내용이 있는지 오 상무로부터 자료를 받았기에 살릴 수 있는 장면은 살리고 살리기 어려운 부분은 가차 없이 잘라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대사와 장면이 머릿속에 빼곡히 들어서 있었기에 타자를 치는 동훈의 손길엔 거침이 없었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
“반갑습니다!”
“어머, 너무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언니, 너무 보고 싶었어요.”
“인사는 나중에 하고 다들 여기 집중해주세요!”
남양주의 한 영화촬영장에 모인 수많은 스태프들과 배우들.
그중에 동훈이 조금은 어색하지만 애써 무덤덤한 얼굴로 유지은 팀장의 곁에 섰다.
유지은 팀장은 제작피디로 제작사인 영화세상에서 실질적으로 영화제작의 총괄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여자로 서른 중반은 되어 보였다.
아직 몇 번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 잘 모르지만, 지금까지는 말을 하는데 있어 실수가 없고 불필요한 이야기도 하지 않아 조금 차가워보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유 팀장은 잠시 소란을 지켜보다 두 번의 박수로 시선을 모은 후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다들 알다시피 조금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촬영이 중단됐었습니다. 걱정들이 많았을 거예요. 이러다 아예 엎어지는 거 아닌가, 계속 질질 끌다가 돈도 못 받고 계약 때문에 시간만 보내는 게 아니가... 저 역시도 여러분들만큼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감독님을 모셔왔으니까 우리 다시 한번 시작해 보자구요. 이미 들으셨겠지만 여기 계신 감독님은 ‘사랑은 한 번 뿐이야’, ‘최악의 하루’, ‘미친남자’, ‘사랑 내 사랑’에서 조연출을 맡았던 장동훈 감독님입니다. 모두 박수!”
짝짝짝!!
동훈은 한 걸음 나서 허리를 꾸벅 숙였다.
박수소리만 들어도 어딘가 모르게 힘이 빠져있다는 걸 알 수 있지만 동훈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마 자신이 저들중 하나였더라도 실망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종간에 대타로 투입됐다곤 하더라도 무려 수십억이 투자됐고 현재 톱스타인 임현주가 주연배우로 촬영중인 이 영화에 이제 입봉하는 감독이 꽂혔으니 실망을 안 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안녕하세요. 장동훈입니다. 이중에서 저와 같이 일해보셨던 분도 계시고 이번이 처음인 분도 계실 건데 정상적으로 만나게 된 건 아니지만 하여튼 만나서 반갑습니다. 여러 말을 미리 드리는 것보단 연출로 보여드리는 게 가장 확실할 것 같습니다. 이미 제작사측한테 영화 내용이 조금 바뀐다는 건 들으셨을겁니다. 그리고 어제 콘티와 대사 보내드린 거 받으셨죠?”
“네, 받았는데 장면이나 대사가 완전히 다른데 이걸 어떻게 봐야 하는 거죠? 의상도 달라진 것 같고...”
임현주가 손을 들고 물었다.
“네. 안 감독님 작품과 비교하면 아주 다른 작품이라고 봐도 될 겁니다. 어제 받았던 것 말고 이후 각본이랑 일정표는 오늘 나눠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막 바꿔도 되는 건가요? 난 ‘미녀 스파이’ 각본을 보고 계약한거예요.”
그녀의 질문에 유지은 팀장이 대신 나섰다.
“스태프들이야 작품 내용이 바뀐다고 큰 문제는 없을 테지만 배우님들은 다르겠죠? 저희도 많이 생각했는데 바뀐 이 각본이 더 좋다는 결론이 나왔어요. 만약 각본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여기서 결정을 해주시면 좋겠어요. 빠르게 정리하고 최대한 빨리 촬영에 들어가야 할 테니까요. 어제 받아보셨으니까 대충 느낌 오시죠?”
“아니, 느낌만 가지고 결정하라는 거예요? 그건 좀 너무한거 아닌가?”
“미안해요. 하지만 상황이 그런걸 어쩌겠어요? 아니면 다시 안 감독님 불러드릴까요? 현주씨가 원하시면 안 감독님 부르기 위해 다시 최선을 다할 준비는 되어 있거든요. 음... 현주씨,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대원 파트너스에서도 안 감독 각본보다 장 감독님의 바뀐 각본을 마음에 들어했어요. 우리가 무작정 혼자서 결정한 건 아니니까 너무 안좋게만 생각하지는 말아주세요.”
유지은 팀장은 잔뜩 미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현주도 그녀도 서로가 미안해하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영화 촬영 일정이 이렇게 터져버린데에는 그 누구보다 임현주의 책임이 큰 걸 서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현주는 슬쩍 눈길을 돌렸다.
이제와서 안 감독을 다시 불러달라 떼쓰는 건 대놓고 이 판을 엎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남들이 없는 곳에서라면 몰라도 이렇게 스탭들 다 모인자리에서 다시 판을 깬다는 건 아무리 싸가지 없는 그녀라도 쪽팔리는 짓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사실 투자자인 대원 파트너스까지도 장 감독의 시나리오를 마음에 들어했다는 말이 가장 결정적이긴 했다.
“일단 읽어볼게요.”
“읽어보면 오히려 더 잘 됐다고 생각하실걸요? 내말 믿어요.”
유지은 팀장은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현주의 어깨를 토닥여 그녀의 기를 세웠다.
스탭들 사이에 있던 커다란 덩치에 거무죽죽한 얼굴을 한 남자가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전 괜찮은 것 같던데요? 아직 전체적인 각본을 다 보진 않았지만 느낌 좋던데...”
양판석 조명감독인데 그제 스태프들끼리 만나서 회의했을 때 얼굴을 익혔었다.
사실 스탭들이야 계약대로 영화촬영만 다 마치면 되니 바뀐 각본이 더 재미있든 없든 문제가 없었다.
미술팀을 비롯한 몇몇 팀들이야 기존에 계획했던 것을 바꾸고 새로 준비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있지만 그래도 촬영이 아예 엎어지는 것보다야 훨씬 나은 일이다.
“그럼 캐스팅은 어쩌구요? 누가 더 들어오나요?”
조금 날카로운 현주의 물음에 들어있는 본심은 자신 이외에 다른 여배우가 투입되냐는 거였다.
어차피 ‘미녀 스파이’의 남자 주인공도 그냥 얼굴빨로 밀고 나오는 모델같은 남주가 아닌 개성파 배우인 김대호다.
연기력도 제법이고 재치도 좋아 ‘6급 공무원’의 남자 주인공을 맡기기에 제격이었다.
그 외 다른 조연들도 다들 연기력이 수준 이상이라 다른 배우는 참여시킬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당연히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하는 찰나 유지은 팀장이 먼저 나섰다.
“네, 배우 한명이 일주일 뒤에 합류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