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새로운 시작(1)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깨어나보니 다행스럽게도 모니터가 망가진 것 외에 불이 나거나 하는 등의 피해가 생기진 않았었다.
문제는 자신의 머릿속에 생긴 낯선 지식들...
분명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지식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올랐다.
쉴 틈 없이 연속적으로.
한순간에 떠오른게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적으로 낯선 장면들이 눈에 보이는 거다.
사흘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머리를 정리할 수 있었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이건 다른 차원에서 영화감독을 하던 사람의 지식들이라는 걸 말이다.
이름도 떠올랐고 어떤 영화를 만들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도 어렴풋이 알게됐다.
영화감독 김영웅, 천만 관객 영화를 무려 세 편이나 만들어낸 최고의 영화감독.
처음에는 내가 그 사람이었는지 전생에 그 사람의 인생을 살았던 건지 헷갈려 혼란스러웠지만 더 이상 그런 고민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건 하늘이 준 기회나 다름없어.”
로또를 바래본 적이 있었다.
쉽고 편하게 살려고 바란게 아니라 로또에 당첨된다면 내가 원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머릿속에 새롭게 파고든 지식은 로또나 다름 없었다.
지금까지 세상에 없었던 수많은 시나리오와 눈을 사로잡는 장면들은 절로 흥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다른게 로또가 아니라 이게 진짜 로또였다.
동훈은 정신을 차리고 거지꼴 같던 집을 정리했다.
오랜만에 샤워도 하고 이제는 완전히 쓰레기처럼 보이는 시나리오도 치워버렸다.
마치 아주 중요한 의식을 앞두고 몸을 정갈히 하듯 새로운 시나리오 작성을 앞두고 몸과 마음을 가다듬었다.
첫 작품을 어떤 것으로 정할까?
김영웅 감독이 만들었던 작품도 기억나지만 다른 작품들도 좋은 게 많이 떠올랐다.
한가지 안타까운 건 헐리우드 영화를 비롯한 서방세계의 영화들은 대부분 이곳과 그곳이 다를바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나이트를 비롯한 슈퍼히어로들의 영화가 그곳과 이곳이 다를바 없으니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반대로 다행스러운 건 이곳에는 아이언맨이 1편까지만 나온 상태여서 헐리우드에 진출한다면 써먹을만한 작품은 충분히 있다는 정도?
물론 김치국 한 사발 들이킨거지만 말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동훈은 마침내 결심하고 제목에 큼지막하게 제목을 적었다.
[새로운 세계]
“크크크... 원작이 없으면 더 대박이지.”
홍콩영화계는 한국만큼 달라지진 않았지만 90년대 이후 한류 애니메이션 열풍(?) 덕분에 SF 영화가 많이 발달했다.
그래서인지 다른차원에서 톱스타를 구가하던 장국영, 왕가위, 주성치 등 톱스타들이 이곳에서는 영화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물론 그 이유 때문인건지 아니면 그들의 어린시절부터, 또는 그 이전부터 뭔가가 달라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 주인공은 당연히 이현제겠지?”
이현제는 그쪽이나 여기나 동일하게 인정받는 톱스타다.
과연 그가 자신의 첫 입봉작에 주연으로 들어올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게만 해준다면 첫 작품부터 대박은 따논 당상이나 다름없다.
동훈은 그렇게 설레임 반 걱정 반으로 시나리오를 작성해갔고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
한 달 뒤 어느 영화 제작사 사무실.
“아직도 연락이 안 돼?”
머리가 히끗한 남자는 배가 두둑히 나왔고 어딜 가나 사람 좋아보인다는 말을 들을 것 같았다.
그런데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는지 죽을 상을 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그가 앉은 자리의 명패에는 ‘대표 박만구’라고 쓰여 있어 회사를 이끌어가는 사장임을 알 수 있었다.
박만구 대표 앞에는 30대를 훌쩍 넘어 보이는 남자와 역시 30대로 보이는 여자가 어두운 얼굴로 서 있었다.
“네, 아무래도 안 감독이 잠수를 타기로 작정한 거 같습니다. 연락도 끊고 집에 갔는데 인기척이 없어서...”
“이 인간이 또 병 도졌네. 하... 시팔...”
박만구 대표는 머리를 부여잡고 한참을 고심하더니 말했다.
“임현주 그년은 뭐래?”
“임현주야 언제나 그렇듯이 자기가 뭘 잘못했냐고 나오죠. 그 성질에 곱게 ‘잘못했습니다’ 할 리 없잖아요.”
앞에 선 여자는 뾰루퉁한 얼굴로 짜증을 속으로 삭히고 있는 게 다 티가났다.
“대원의 그 애송이는? 돈 빼겠다는 말 없어?”
“다행이 지들 잘못은 아는지 그런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감독을 바꾸는 건 어떠냐고 은근히 물어보더라구요.”
“감독을 바꿔? 안철호 감독을 까고 다른 감독을 쓰라고? 하... 이 새끼가 완전히 돌았구만.”
“그 정도 각본이라면 꼭 안철호 감독을 고집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냐고...”
“하... 시팔 상황이 좆같으니 별 거지같은 소리를 다 듣겠네. 오 상무, 이거 날리면 우리 손해가 얼마야?”
“당장 3차 투자금이 들어와야 직원들 월급 안 밀립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그대여’에서 손해본 것 때문에 은행이자 지급도 헉헉대는 실정이라서... 이번에 이거 엎어지면 정말 큰일입니다.”
“엎어지면 회사 문 닫는다는거지? 후... 그럼 이걸 어떡해서든 다시 살려야 한다는건데... 무슨 방법 없어?”
“안 감독님을 어떡해서든 다시 설득하는 것 말고는...”
남자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박 대표는 그런 모습이 보기 싫은지 여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유 팀장은 무슨 방법 안 떠올라?”
“그게...”
잠시 망설이는 유 팀장의 모습에 박 대표의 눈빛이 반짝인다.
“뭐 생각나는 거라도 있어? 말해봐.”
“조금 황당하긴 한데요.”
“괜찮아, 말해보라니까.”
유 팀장이라는 여자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어제 회사로 시나리오 하나를 보낸 감독이 있어요. 장동훈 조감독이라고 지금 강석호 감독이랑 영화 하나 찍는 중인 것 같아요.”
“장동훈? 처음 듣는데?”
“큰 영화는 못하고 작은 영화 위주로 다섯 개 정도 작업했는데 나름 평판이 괜찮더라구요.”
“그래서?”
“음... 시나리오가 좋아요.”
박 대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게 끝이야? 이 바닥에 좋은 시나리오가 없었나?”
“그게 아니라... 두 세장짜리 시나리오뿐만 아니라 각본까지 써 냈는데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영화 하나를 거의 완벽하게 준비해 왔더라구요.”
그제야 박 대표의 얼굴에 호기심이 돌기 시작했다.
“그 정도야?”
“네. 아직 원석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걸 넘겨보자?”
“그렇죠.”
박 대표는 팔짱을 끼고 한참을 고심했다.
그렇게 5분여를 고심한 박 대표는 자신의 두툼한 뱃살을 툭툭 쓰다듬곤 말했다.
“연락해, 한번 보자고. 그리고 배 고프니 나가서 밥이나 먹자.”
*
“동훈아! 김석훈이 언제 온대?”
목소리의 주인공은 강석호 감독. 새치가 잔뜩 난 짧은 머리에 살이 쪽 빠진 얼굴, 째진 눈에 걸친 금테 안경이 그의 인상을 날카롭게 보이게 한다.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동훈은 얼른 고개를 돌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콜타임보다 1시간 일찍 불렀어요! 그래도 1시간은 넘게 늦을 테니까 2시 반쯤에 도착할 겁니다.”
“늦지는 않겠지?”
“1시 반에 다시 체크할 예정이구요. 미용실에서 그 전에 출발했다면 2시 반 전에는 도착할 겁니다. 김석훈이 굼뜬 거지 걔 로드 운전 실력은 믿을 만합니다.”
“그래? 크흠... 알았어.”
강 감독이 빠르게 수긍하며 넘어가자 보조출연자의 의상을 점검하던 의상팀의 유은재가 입을 삐죽거리며 중얼거렸다.
“아주 그냥 꼬투리 하나 잡고 싶어서 안달이 됐네.”
은재와 같은 의상팀원인 효연이 기름때가 잔뜩 묻은 주방 옷을 꺼내놓으며 말했다.
“요즘 동훈 오빠가 감독님이랑 은근히 선을 긋는 것 같아서 더 그런 것 같아. 평생 동훈 오빠 부려먹으려고 하다가 갑자기 입봉한다는 소문 듣고 나서부터 아주 눈에 불을 켜고 동훈 오빠 잡아먹으려고 하던데? 인간이 너무해.”
의상팀 여자들의 대화처럼 동훈은 완전히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머릿속에는 온갖 재미있는 시나리오들이 날뛰고 있으니까.
처음에는 감독으로 성공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성공하고 싶다는 열망보다는 어떡해서든 그 이야기들을 사람들 앞에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마침 운이 좋게도 한 제작사에서 동훈의 시나리오를 보고 미팅을 제의했다.
동훈이 제작사와 미팅을 한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촬영장에 퍼졌고 그 이후부터 강석호 감독이 예민하게 굴기 시작했다.
예전이었다면 그것 때문에 무척이나 신경이 쓰이고 스트레스를 받았겠지만, 이제는 그런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아졌다.
다른 차원에 존재했던 영화감독 김영웅의 지식을 얻고 난 후 그 사람의 인격이 들어온 것처럼 목소리에 힘이 생기고 자신감이 흘러 넘쳤다.
“너 끝나고 일 있냐?”
강 감독이 스크립터와 콘티와 관련해 대화를 나누다가 슬쩍 물어온다. 술 한 잔 하고 가라는 거다.
연출부끼리 끝나고 술 마시는 건 특별할 것도 없는 정해진 코스와도 같은 것인데도 특별히(?) 물어보는 건 오늘 동훈이 제작사와 미팅이 잡혀 있기 때문이 분명했다.
본래 촬영 당일에 조감독이 저녁 약속을 잡는 짓은 미치지 않은 이상 할 수가 없는 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촬영과 미팅이 겹치게 된 이유는 동훈 때문이 아니라 강석호 감독 때문이었다.
본래 강석호 감독과 진행하던 영화는 일정상 모든 촬영이 끝난 상태였는데 바로 그제 감독이 추가 촬영이 필요하다며 스태프들과 배우들을 억지로 불렀기 때문이다.
마침 주연배우들과 조연배우들의 스케줄이 비어 있었기에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추가 촬영날짜는 한도 끝도 없이 미뤄졌을 터였다.
“한 잔 하고 싶으세요? 전에 연출부끼리 마지막 촬영 끝내고 회식 했어서 오늘 마실거라고 생각 못 했는데...”
“오늘이 진짜 마지막인데 빠질거야?”
“음... 죄송해요. 오늘 제작사와 첫 만남인데 펑크내기는 좀 그렇잖아요?”
순간 강석호 감독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야... 장동훈이 많이 컸네. 이제 입봉한다고 내 말이 좆같이 들리나 봐? 하긴, 배운 게 없으니... 가서 일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