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
결국 동팔은 각성상태를 끌어올리기 위해 스스로를 속이거나 최면을 거는 행동을 하지 않기로 했다.
결국 타석에 들어서면서 본인의 실력으로 투구를 타격해야 했다.
타석에 서면서 지금 공을 던지는 투수에 대해 떠올렸다.
'공은 확실히 좋아. 승리를 굳히기 위해 보스턴 레드삭스가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마무리니까.'
지완과 자신만큼은 아니지만, 타자의 입장에서 상대하기 어려운 투수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무리라면 불펜 투수 중에서 제일 뛰어난 구위를 가진 선수가 한다.
사실상 거의 선발급이라고 보면 되었다.
반면, 타자로 따지면 아주 뛰어난 타자는 아닌 동팔이니, 자신보다 구위가 떨어지는 투수라도 상대하는 것이 벅차다.
'그래도 던지는 공은 95마일에 달하는 강속구. 제구는 되는 측에 속하고, 주로 던지는 변화구는 싱커라고 했지?'
싱커라면 커브보다 빠르면서 더 낮게 떨어지는 구종이다. 이름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구종이 있는데 싱킹 패스트볼이라 불리고 있다. 이는 투심 패스트볼에 가까운 표현이다.
공의 궤적은 타자의 몸쪽 아래로 떨어진다. 치기 어려운 곳으로 향하니 헛스윙을 유도하는 포크볼이 아니라, 범타를 유도하는 공에 가깝다.
동팔은 그걸 모르지 않는다. 자신도 종종 던지는, 실전에서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구종 중 하나였으니까.
다만 타자로서 짜증나는 공 가운데 하나임은 사실이다.
역회전을 걸어야 하기에 팔을 많이 비틀어야 하니 사이드암 투수가 주로 던진다. 그리고 팔에 무리가 가지만, 회복이 되는 동팔에게 있어서 그 문제는 크게 장애가 되지 않았다.
'궤적은 예상할 수 있지만, 투수가 그걸 알려주지 않는단 말이지. 당연한 거지만…….'
투수가 던질 공을 알려주면, 프로에 있는 이상 어떤 타자라도 칠 수 있다. 다만 운에 따라 잘 맞은 타구가 범타도 되겠지만, 절반 이상은 안타가 나올 수 있다.
그러니 동팔이 한국 프로 리그에서 뛰었을 때, 작은 습관 하나로 인해 어이없이 공략당하지 않았던가.
당연히 투수는 아주 작은 틈이라도 보이지 않기 위해서 항상 같은 동작으로 공을 던지도록 스스로 조심하고, 의식하면서 훈련한다.
특히 현미경 분석으로 유명한 일본 프로 야구에선 투수나 타자나 분석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당연히 상대 투수, 타자에 대한 분석은 메이저리그에서도 활발히 일어난다.
'대신 던질 수 있는 구종의 한계로 인해 선발투수가 되지 못한다고 했어. 하지만 포심 패스트볼과 싱커만으로 충분히 강해…….'
구종이 다양해도 실제 경기에서 제대로 던지지 못하면 안 던지는 것이 낫다. 밋밋한 변화구는 좋은 먹잇감에 불과하다.
하지만 예측할 수 있는 구종의 종류가 적어도 강력한 움직임을 보이는 공을 치기가 더 어렵다.
'체력은 좋지 않아서 던질 수 있는 강속구의 숫자는 적어. 하지만 불펜이라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이미 상대 투수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혜진이 해주었다.
'한 이닝에 던질 수 있는 강속구의 숫자는 7개가 한계. 그리고 방금 전, 두 타자를 상대하면서 던진 강속구는 모두 6개…….'
꼭 7개를 던진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7개 이후에 던진 강속구는 힘이 떨어지고, 싱커를 던져도 볼 끝의 움직임이 줄어든다.
그리고 동팔이 희망을 보는 이유는 또 있었다.
'그 전에 던진 투구 숫자가 많아. 변화구라도 던지는 것에는 힘이 들어가기 마련. 그리고 평상시 마무리의 투구 숫자는 15개가 평균. 하지만 두 사람을 상대하면서 17개…….'
즉, 지금 투수의 상태는 체력이 많이 떨어졌다는 의미. 거기에 체력이나 근력은 단시간에 끌어올릴 수 없다.
변동폭이 적으니 예상은 더 쉬웠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또 있었다.
'투수 교체를 하지 않는 걸로 봐서 보스턴 더그아웃에선 날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이 뻔해. 그리고 자존심도 걸렸겠지. 내가 타석에 선 상황에서 투수를 교체하면 날 의식하고 피하는 것으로 보이니까.'
그렇지 않아도 앞선 두 이닝에 치욕적인 기록을 당했다. 비록 이기고 있는 중이라도 투수가 대타로 올라온 상황에 마운드를 교체하면 팬들의 야유는 보스턴을 향할 것이다.
비록 지금 투수의 체력이 떨어졌음을 파악해도, 동팔 정도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라 판단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동팔이 타석에 선 때는 지금으로부터 2개월 전인 인터리그때. 그때 홈런을 기록했지만, 그 이후로 별다른 타격 성공은 없었던 점이 보스턴 감독이 그러한 판단을 하는데 힘을 보탰다.
한편, 동팔이 타석에 올라오는 것을 보며 양키즈 팬들은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분풀이 하듯이 약 올려도 되는 건가?"
"이왕이면 끝까지 가봐야지……."
그나마 지완의 완벽한 봉쇄로 기분이 나아졌다. 하지만 동팔이 타석에 올라온 것은 여전이 이해할 수 없었다.
적어도 마지막까지 발버둥쳐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지금의 행동은 패배를 확정지은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존 지라디 감독이 왜 최고 인기구단이자 명문인 양키즈의 감독이 되었는지를. 이건 상대의 도발에 발끈한 것도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타석에 세운 건 아니다.
코치는 동팔이 타석에 서 있는 모습을 보며 존 지라디 감독에게 물었다.
"과연 잘 될까요?"
코치의 말에 감독이 말했다.
"잘 될 거야.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른 선수보다 제일 확실한 카드지."
이미 감독과 이야기를 한 코치는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긴 지금 투수는 지쳐있는 상태입니다. 만약 다른 타자를 대타로 세웠다면 보스턴에선 바로 투수를 교체했겠죠."
"상대할 타자가 투수인 이상, 같은 투수로서 지고 싶지 않겠지. 얼마 전에 홈런을 쳤지만, 그 이후로 무안타였고. 잘 해야 볼넷을 고른 정도?"
그들이 동팔을 대타로 내세우면서 유도한 것은 투수 교체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올라오는 타자에 따라 그에 맡는 투수를 세워야 하는데, 동팔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다. 내셔널리그도 아니고 투수가 타석에 들어설 일은 인터리그 중 절반 밖에 되지 않는다.
"적어도 타자 타이틀을 가진 선수를 내보냈다간 바로 투수가 교체될 것이고, 나중에 교체를 한 보스턴이 더 유리해집니다. 하지만 투수를 타자로 내보내면…저쪽도 생각이 복잡해지죠."
"생각이 복잡해지면 행동도 느려지지. 지금처럼. 이전이라면 교체했겠지만, 계속 던지게 하고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그건 유도가 되었으니 다행이지만… 과연 동팔이 공을 칠 수 있을까요?"
코치의 말에 감독이 말했다.
"투수 중에 타격 훈련을 꾸준히 받은 사람은 동팔 이외에 없어. 타석에 설 일이 없으니 투구 훈련에 중점을 두는 것은 당연하니까. 하지만 동팔은 타석에 설 일이 없어도 매일 쉬지 않고 타자들과 같이 훈련을 받아. 드러나지 않았을 뿐, 웬만한 타자 정도의 타격 감각을 가지고 있어. 하지만… 저기 시뻘건 양말 놈들은 그걸 몰라."
"결국 동팔이 아니면 칠 수 없다는 말이군요."
"꼭 그렇진 않아. 다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타격에 성공할 확률이 제일 높은 건 사실이야. 지친 투수만큼 두들기기 좋은 투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볼에 속으면 안 되는데요……."
코치의 걱정에 감독은 확고히 말했다.
"그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동팔이 투수인 건 둘째 치고 선수 자체로서의 선구안은 확실히 뛰어나."
그들이 예상한대로 동팔은 이미 투수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준비가 된 것은 아니다.
'제대로 힘이 실린 강속구는 한 번이 한계. 그리고 내가 노리는 것은 단타 이상의 타격. 그렇다면… 동욱이가 알려준 방법이 유효하겠지.'
단타 이상의 안타를 치고 싶다면 자신이 원하는 공을 던지게 만들어라.
동욱이 알려준 것은 그게 전부다. 동욱의 경우 원하는 공이 올 때까지 커트하여 투수로 하여금 지치게 만든다.
다만 항상 그렇게 하면 상대하는 투수가 일부러 피할 가능성이 높으니 웬만큼 중요하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작 타격할 때에 빗맞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타율을 높이 올려주는 방식인 건 사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 방법을 사용하기 위해선 자신의 능력에 맞는 방법을 고안해야 하는 것이다.
'노리는 것은 치기 좋은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공. 그럼 내가 선구안이 좋다는 것을 상대에게 알려줘야 해.'
당연히 자신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고, 있더라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양은 아니었다. 당연히 투수는 타자 강동팔에 대해 알기 위해 실험을 해야 했다.
휙~ 퍽.
몸 쪽 아래로 빠지는 싱커에 동팔의 배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공은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났기 때문에 주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볼카운트는 1볼. 그리고 미동하지 않는 동팔을 보자 투수는 확신했다.
'투수라서 좋은 건가? 아니면 그냥 좋은 건가……?'
모든 투수라고 선구안이 뛰어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을 던지는 입장을 알고 있으니 공을 보는 눈이 타자보다 더 유리한 건 사실.
대체적으로 투수가 타석에 서면 안타보다 볼넷을 노리는 것이 현실적이었다.
지금 타석에서 투수도 많은 실험을 할 수 없다. 가용한 기회는 최대 2회. 볼에 대한 시험을 했다면 이제는 반대로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공에 대한 시험을 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실험을 하고 결과를 도출하는 것은 목적이 아니다. 그건 학술 논문을 쓸 때나 하는 것.
지금 투수가 해야 할 일은 최소한의 투구로 동팔에 대해 최대한 많이 알아내는 것이다. 이왕이면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휙~ 퍽!
이번에 던진 공은 방금 전에 던진 싱커보다 더 스트라이크 존에 가까운 공이었다. 하지만 처음에만 그렇게 보일 뿐, 결국 밑으로 떨어지며 범타를 유도하려 했다.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할 것으로 예상한 동팔을 유인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제 볼카운트는 2볼. 투수의 입장에서 더 이상의 실험은 불가능했다.
'이거 어쩐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팔에서 힘이 떨어지는 느낌이 오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강속구를 던지고 싶지만, 그 이후에 잘 던질 자신이 없었다.
두 번의 실험으로 얻은 것은 없고, 잃은 것은 자신의 체력. 그리고 지금은 신속한 경기 진행을 위하여 바뀐 룰에 의해 투구 지연을 오래 할 수도 없었다.
물론 이는 투수만 아니라 타자도 해당되는 규정이었다.
그러니 쉬면서 체력을 회복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포심 패스트 볼은 언제 던지는 것이 좋을까? 마지막? 그건 너무 뻔히 보여. 그럼 마지막 바로 전? 그럼 그 다음에 싱커라는 것이 훤히 보이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