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269화 (269/325)

[269]

"절대로 부상만 안 입으면 돼. 어떤 결과가 나와도 좋으니까, 위험한 공이다 싶으면 무조건 피해."

사실 이런 선택이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때론 이성보다 감정이 먼저 나올 때가 있었고,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괜히 타석에 세웠다가 동팔이 부상을 당하게 되면 그만한 손해가 없다. 그걸 알면서도 타석에 보낼만큼, 존 지라디 감독은 짜증과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고 있는 상황이니 분노는 더 커졌고, 마침 동팔이 말한 것 때문에 이런 도발을 생각하고 실행하게 되었다.

물론 이렇게 되다가도, 혹시 이번 타자가 진루를 하게 되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게 이번 타자는 헛스윙 삼진으로 타석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한 점도 다니고 두 점 차이가 난 상황에 남은 아웃카운트는 하나. 그러니 감독은 다시 동팔에게 말했다.

"동팔아. 다른 것은 됐고, 부상만 조심해."

"알겠습니다. 위험한 공은 잽싸게 피할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말을 삼켰다.

'살기 위해서라도 말이죠.'

지금까지 천운이라면 크게 다친 적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다 다치게 되면 그 날 회복할 때에 거의 죽음을 생각해야 했다.

아마추어 야구를 하고 있을 때, 무릎을 강타한 타구에 의해 큰 부상을 입었다. 회복능력으로 인해 사흘 만에 회복했지만, 회복될 때마다 무릎을 뜨겁게 달구어진 둔탁한 칼로 후벼파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단순한 타박상으로 생긴 멍도 마찬가지였다.

회복 능력이 어떻게 발동되는지 모를 때, 허벅지에 맞은 공으로 인해 생긴 멍이 갑자기 치료되면서 민희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러니 동팔은 절대 부상만은 당할 생각이 없었다. 특히 머리에 공을 맞아 두개골이 골절된다면 끔직한 고통에 쇼크로 죽을 수도 있었다.

다만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으니 조심하면 어떻게든 피할 수 있었다. 제일 위험한 상황은 투수가 제구력 난조로 공이 갑자기 높이 뜨며 날아오거나 몸 쪽으로 너무 빠지는 경우다.

하지만 지금 던지는 투수가 제구력 난조를 겪고 있다면 굳이 자신이 나올 일도 없었다.

점수를 낼 좋은 기회가 되니 감정적이 된 감독이라도 타격 능력이 뛰어난 선수를 대타로 세울 것이다.

그리고 제구가 안 되는 투수 앞에 제일 뛰어난 전력인 동팔이 부상을 당하도록 만들 생각은 더욱 더 없다.

두 번째 타자가 삼진으로 물러나자, 동팔은 배트에 끼운 배트링을 빼고 타석에 들어섰다.

'감독님은 어떻게 되던 상관없으니 부상만 조심하라고 하셨지만…….'

이왕 타석에 들어섰다면 좋은 결과를 만들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그리고 얼마 전, 하얀 늑대의 벗을 통해 한 가지 추론을 듣게 되었다.

*     *     *

며칠 전.

"그러니까… 일종의 각성상태라는 건가요?"

"그렇다. 동팔이 말했던 그 상태는 나도 살면서 열번 이상 겪었던 일이다."

그의 나이가 300살을 훌쩍 넘어감을 생각하면, 보통 사람의 경우 한 번도 없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제일 많이 겪는 사람은 전쟁터에 있는 사람들이다. 죽지 않기 위해 극도로 신경이 곤두 서 있고, 이전에 없던 집중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 중 나타나는 효과 중 하나가 주변의 모든 것이 느리게 보이는 것도 있다. 심지어 총알이 날아가는 것마저 보인다. 나도 직접 겪었으니 잘 알고 있다."

동팔이 겪은 것만 해도 40~50배로 느려진 경우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총알이 날아오는 것이 보일 정도는 아니다.

처음부터 신경이 전달하는 속도보다 총알이 날아가는 속도가 훨씬 빠르니 물리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

다만 멀리서 날아오는 탄환이라면 극히 일부, 보고 피할 수 있는 희망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살아남기란 어렵다.

그건 둘째 치고 지금 중요한 것은 단순히 상태에 대한 분석이 아니었다. 이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를 파악하고 가능하다면 최대한 발동시키는 조건을 알아내는 것이다.

다행히 거기에 대해선 하얀 늑대의 벗이 어느 정도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회복을 통해 고통을 받은 것이 주요한 이유로 파악하고 있다. 고통이라는 것은 몸에 이상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 보내는 경고 방식이다. 그리고 감당하기 어려울 강도로 뇌에 자극을 주는 것이다. 즉, 매일 한계 이상의 고통을 겪으며 뇌에 자극을 주고 있다는 말이다."

"그럼…뇌에 매일 강한 자극을 준 결과로 각성상태가 나타났다는 겁니까?"

"지금은 그렇게 추측할 뿐이다. 그 외에 동팔이 각성상태가 되는 이유를 찾을 수 없다."

하얀 늑대의 벗의 말에 혜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동팔이의 생활을 보면 다른 사람과 특별히 다른 건 없으니까."

기준은 당연히 주변에 있는 다른 메이저리그 선수들이다. 그들과 같이 훈련을 하고, 경기를 치른다.

"인디언 아저씨가 말한대로 고통이란 것은 뇌에 전달되는 강한 자극을 말해. 그럼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그때 뇌에 강한 자극이 된다는 말이잖아. 그 자극을 겪으며 뇌는 자연스럽게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활성화되는 건 아닐까?"

그러면서 혜진은 이런 말을 하려다 참았다.

'그 전에 계속 고통을 일정한 시간마다 겪어야 하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닌데…….'

처음에 며칠은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점점 고통을 겪는 기간이 늘어나면 정신은 피폐해지기 마련.

아무리 몸이 회복되어도 계속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는 건 차라리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 나아보이게 만든다.

암 환자들이 힘들어 하는 것에는 경제적인 압박도 있지만, 항암치료를 하면서 겪는 고통을 계속 겪게 되는 것에 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고통. 그리고 이 고통을 겪더라도 회복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숨이 막히는 압박과 실제로 느껴지는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지금 바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죽음 이외에 없었다.

비록 실제로 나아지고 있다고 한들, 미래의 희망보다 지금의 절망과 고통이 눈앞에 있으니까.

더군다나 동팔의 고통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숙명이었다.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부상을 당해도 회복이 된다는 것. 그리고 어제 경기에 혹사하듯 던져도 다음 날이면 회복이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모든 장점도 실제로 겪어야 할 고통에 비하면 작게 느껴진다.

다른 사람이라면 처음에는 희망차게 시작하더라도 계속되는 고통에 정신이 갉아 먹힌다. 그러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그러나 동팔은 3년을 넘어 4년차가 된 지금도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과 달리 나아진 점이 있다면 회복의 타이밍을 본인의 의지대로 조종할 수 있어, 단번에 치료됨으로 인해 강한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마 마크와 지완의 회복을 도우면서 평상시보다 훨씬 강한 고통이 뇌를 더 강하게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그 효과로 예상치 못한 순간이거나,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게 될 때 각성상태가 되었으리라 본다."

하얀 늑대의 벗의 말에 동팔이 물어봤다.

"그럼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할 수만 있다면 언제라도 각성상태가 될 수 있는 건가요?"

그의 말에 하얀 늑대의 벗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다. 각성상태가 분명히 뛰어나고 효율적인 행동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하지만 그만큼 뇌에서 소모하는 에너지가 많다. 만약 계속 각성상태로 있게 되면 너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는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머리를 쓴다는 것은 많은 체력을 필요로 한다."

어떤 작가는 한 권의 책을 며칠 만에 쓰다가 이후 시름시름 앓다 죽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고시 공부를 하는 사람도 체력이 없으면 할 수 없다고 공통되는 말을 한다.

고작 책상에 앉아 책을 계속 읽는 것이 체력을 소모하는 건가 싶을 것이다. 하지만 앉아서 집중하며 책을 잃으며 암기하는 것은 뇌에 많은 포도당을 요구하는 행동이다.

하루는 어떻게 공부를 해도, 계속 집중력을 유지하며 공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아니라면 사법 시험에서 3차 연수중에 공부와 경쟁을 하다가 목숨을 잃는 사례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주는 아니지만, 간혹 그러한 경우가 발생한다.

특히 체력적으로 힘든 상태의 사람일수록 더 심하다.

동팔이 각성상태가 되는 시간은 실제 시간으로 따져도 0.3초를 넘지 않는다. 그런 상태를 계속 겪는다면 건강한 동팔이라도 하루 이상을 버틸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그러니 너의 몸은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각성상태로 가는 것을 최대한 저지하려 한다. 즉, 너는 각성상태가 되기 위해선 생존본능을 이용하면서 뚫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얀 늑대의 벗의 말에는 어폐가 있는 것 같지만, 이것은 그의 경험에서 기인한 말이다. 그리고 동팔은 그가 말하는 바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 말씀은…스스로 지금 상황이 극한상태라고 인식해야 한다는 거군요."

극도로 위험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몸이 무리하더라도 행동해야 한다.

평상시에 근육이 힘을 제어하며 한계 이상의 힘을 주지 않게 한다. 과도한 힘을 사용함으로 인해 근육이 파열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하지만, 위기 상황이 되면 그 제한이 풀리며 믿을 수 없는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힘을 발휘한 근육은 위기가 끝나면 심각한 손상을 입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회복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동팔이 겪었던 각성상태도 이와 마찬가지로 볼 수 있었다. 긴박한 무언가를 해야 할 때에 고도의 집중력이 생기면서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그렇다."

전장이나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겪는 각성상태가 쉽게 일어나면 한 순간의 사고로 목숨을 잃을 사람이 많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으니 찰나의 순간에 기민하게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바꿔 말해 각성상태 자체가 동팔의 몸에 좋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대는 투수다. 동욱처럼 무리하면서 타자가 될 필요는 없다. 그리고…동욱과 같이 각성상태를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상황이 되면 발현될 가능성이 높아질 뿐이다."

하지만 타석에 선 상태에서 각성상태가 된다면 언제든지 홈런을 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팔이 살아남기 위해선 이제 겨우 2시즌이 남은 상태. 그런 와중에 확실한 득점이 가능한 능력을 쓰지 않는다면 너무 아까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하얀 늑대의 벗은 그 이상의 것을 보고 있었다.

"본인에게 최면을 걸어 지금 상황이 심각한 상황임을 인지하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그건 좋지 않다. 만약 그게 가능한 수준이라면… 그대는 더 이상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 심각한 인지부조화로 인해 평생을 정신병동에서 보내야 할 것이다."

"그건… 어떻게 확신할 수 있으신 거죠?"

"그런 경우를 많이 봤다. 그리고 나 또한 경험할 뻔한 일이다."

그 말을 하고 하얀 늑대의 벗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동팔이 괜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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