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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82화 (82/135)

82화

나는, 너를 죽인다

갑자기 마슈의 등 뒤에 나타난 칠흑의 기사를 바라봤을 때, 이소연은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저 칠흑의 기사는,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그를 바라본 순간 이소연은 직감적으로 이를 느꼈다.

그리고 이소연은 곧 그 직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처음 보는 게 분명할 저 정체불명의 칠흑의 기사는, 미카엘라와 인상이 닮아있던 것이다.

어째서 그런 말도 안 돼는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바로 이유 모를 직감의 정체였다.

물론 미카엘라일리는 없었다.

이소연은 자신이 떠올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털어내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 칠흑빛 갑옷의 크기는 도저히 미카엘라가 입을 수 있을 만한 크기가 아니었다.

만약 그녀가 저 갑옷을 입고 있다면, 그녀는 지금 팔목부위 쯤에 손을 넣고서 움직이고 있는 꼴이었다.

아니, 몸집이 다르다던가, 거리상으로 그녀가 이곳에 오는 것은 불가능하다든가 하는 물리적인 증거들은 제쳐두더라도, 이소연이 아는 미카엘라는 저런 흉흉한 분위기를 풍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말도 안 돼.’

마슈가 칠흑의 기사의 검을 막아내고 물러섰을 무렵, 이소연은 이미 눈앞의 적에 대한 분석을 마쳤다.

그리고 그 결과는 도저히 믿기가 힘든 결과였다.

분석 결과, 저 갑옷의 안쪽은 텅 비어있었다.

눈앞에 서있는 저 칠흑의 기사는, 기사가 아니라 텅 비어있는 갑옷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놀란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근육 한 점 없는 새하얀 백골들도 뛰어다니는 마당에 텅 빈 갑옷이 혼자 움직이는 것 정도가 뭐가 대수겠는가. 그 정도야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이소연은 저 텅 빈 갑옷에게서 느껴지는 에테르의 패턴이 미카엘라의 것과 완전히 동일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에테르의 패턴이 서로 비슷한 경우는 있어도 완전히 동일한 경우는 없다. 그건 에스퍼들 사이는 물론이고 몬스터들을 포함하더라도 마찬가지인 이야기였다.

물론 이 세상에는 우연의 일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 간혹 가다보면 기적이라는 것도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소연의 경험상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수십만에 해당되는 몬스터들과 수천에 해당되는 에스퍼들을 분석해온 이소연의 경험상에는 말이다.

“…이게, 무슨.”

그렇기에, 이소연은 그 분석 결과에 대한 심리적인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이성적인 확신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이해를 벗어난 상황에, 이소연은 잠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미카엘라 언니…?”

이소연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린 목소리에 오히려 자신이 놀라며,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 …

칠흑의 기사, 아니 칠흑의 갑옷은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조용히 시선을 돌려 이소연을 바라봤다.

눈동자는커녕 플레이트 헬름의 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검은 안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눈을 마주치고 나서 이소연은 자신의 생각에 더욱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저 텅 빈 갑옷, 할로우 나이트의 정체는 바로 미카엘라였다.

“언니, 맞죠? 미카엘라 언―”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할로우 나이트는 검을 휘둘러 그녀의 말을 잘랐다.

양손으로 쥐고 휘두르는 바스타드 소드는 빈틈투성이인 이소연의 허리를 노리고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

이소연의 반응은 너무 늦었다.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고, 안 그래도 전투력이 떨어지는 그녀가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리는 없었다.

키이이잉!!

하지만 어느새 다가온 마슈가 양 손을 교차시켜 할로우 나이트의 참격을 막아냈다.

최대한으로 힘을 끌어올린 마슈의 반응속도는 방금 전의 모습과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흐읍!”

양 손으로 막아낸 검을 뿌리쳐낸 마슈는 크게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정권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녀의 정권은 제대로 힘이 실리기 전에 할로우 나이트의 손에 가로막혔고, 드레이크 때처럼 연격을 쏟아 부을 생각이었던 마슈는 성과 없이 뒤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언니, 물러서요!!”

“…부탁할게, 마슈.”

방금 전과 달리 마슈는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듯이 말했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이소연은 뒤늦게 자리를 피했다.

미카엘라와 동일한 에테르 패턴에 놀라 잠시 잊고 있었지만, 저 할로우 나이트의 전투력은 어마어마했다.

예전에 고전을 치뤘었던 바리크라는 녀석도 저 할로우 나이트에 비하면 그저 잔챙이에 불과할 정도였다.

‘저 정도 녀석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이소연은 뒤로 물러나면서, 지금 상황에서 저 할로우 나이트를 상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에 대해 신중히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물론 아직 저 할로우 나이트와 미카엘라의 관계가 무엇인지 조금도 알지 못했고, 호기심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그딴 거에 신경을 썼다가는 단숨에 목숨을 잃게 된다는 것을, 이소연은 잘 알고 있었다.

‘우선 1:1로 해결할 수 있는 건…….’

조원호, 유선, 이태현, 로이드. 그리고 가까스로 마슈 정도.

이중에서 그나마 담당구역에 여유가 있던 것은 마슈 뿐이었고, 마슈는 이미 할로우 나이트와 접전에 들어서있었다.

그렇다고 마슈에게만 저 할로우 나이트를 맡겨놓을 수는 없었다. 물론 마슈의 힘을 얕보는 건 아니었다. 수비에만 집중할 경우, 마슈는 절대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방어력을 보였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밀린다.

근거는 없었지만 이소연은 그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

‘…그렇다면.’

이소연은 긴장으로 메마른 입술은 한차례 핥은 다음, 주변 인원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현재 중앙에서 마슈가 강적과 교전 중. 펠트는 마슈를 커버. 그동안 얀이 펠트 역할까지 전담.]

펠트와 마슈.

펠트의 능력은 중력과 염동력이었고, 마슈의 능력은 에테르의 축적과 구현화였다.

솔직히 둘의 능력은 그다지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었지만, 둘이 워낙 오랜 시간을 헌터 듀오로 함께 해왔기에 환상적인 호흡을 보이기로 유명했다.

그렇기에 이소연은 마슈의 지원군으로 펠트를 선택했다.

물론 그래도 저 둘이 저 할로우 나이트를 제압할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 좀 더 안정적으로 버틸 수 있게 됐을 뿐이다.

블러드 레이스.

이태현 정도라면 단독으로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는 이미 3명의 마족을 상대로 발이 묶여있는 상태였기에 이쪽으로 부를 수가 없었다.

애초에 굳이 승기를 잡기 위해 이쪽에서 무리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다.

‘…결국 이 전투의 승패는, 대장전에서 결정 날 테니까.’

방금 전, 그야말로 하늘을 베어냈던 조원호의 거대한 참격을 떠올리면서 이소연은 생각했다.

이소연은 데모닉 게이트 때 기절해버리는 바람에 어떤 식으로 정리가 된 건지 볼 수 없었고, 알 수도 없었다. 단지 조원호가 해결했으리라 어렴풋이 짐작만 하고 있었을 뿐.

그렇기에 지금 하늘에서 펼쳐지는 말도 안 되는 공방전을 바라보며 이소연은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능력으로도 포착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오직 잔상만을 남기며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조원호도, 그걸 계속해서 받아치는 루시퍼라는 마족도 전부 말도 안 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저 둘 중 하나가 패하고 남은 승자가 이 치열한 전장에 합류한다면, 그 직전까지 전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건 간에 승패는 단번에 결정 날 것이다.

그렇기에 우선 지금은 버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소연은 그렇게 판단하고 지휘를 위해 다른 안전지대를 찾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주위에 거센 에테르의 폭풍이 몰아친 것은 그 때였다.

‘…?! 무슨.’

누군가의 마법인가.

아니, 그렇다고 생각하기에는 규모에 비해 위력이 너무 약했다. 의도한 마법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낭비가 심했다.

다행히 에테르의 폭풍은 빠르게 잠잠해졌고, 이소연은 얼굴 위로 들어 올렸던 두 팔을 조심스레 내리며 폭풍이 몰아쳐 온 하늘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올린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하늘에 펼쳐진 여섯 장의 날개였다.

가장 위에는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감히 성스럽다는 표현을 붙일만한 새하얀 천사의 날개가.

그리고 그 밑에는 방금 전에도 꺼내두고 있었던 검게 물든 잿빛의 날개가 뻗어져 나와 있었고,

가장 밑에는 악마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한 쌍의 박쥐 날개가 돋아나와 아래쪽으로 처져있었다.

* * *

“하,”

루시퍼의 목에 검을 찔러 넣으려는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루시퍼를 중심으로 엄청난 충격파가 몰아쳤었다.

그 충격파에 밀려난 조원호는, 거리를 확보한 채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런 거 가지고 있으면 숨겨놓지 말고 미리 좀 꺼내 놔라. 응? 닳기라도 하냐?”

조원호는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조금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그가 긴장하고 있는 상태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꺼내버렸다.”

하지만 루시퍼는 그런 조원호의 말에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은 채,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꺼내버렸다, 꺼내버렸어…….”

그리고 루시퍼는 자신의 두 눈을 감싸 쥔 채로 탄식을 내뱉었다.

“이 꼴을, 이 꼴을… 그것도 인간계에서, 인간들 따위의 앞에서, 그것도 겁에 질린 채로…….”

깊은 자괴감의 늪에 빠진 채 탄식을 내뱉는 루시퍼의 등 뒤에는, 방금 전의 날개와는 수준이 다른 거대한 여섯 장의 날개들이 새롭게 돋아나와 한껏 뻗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루시퍼는 지금 자기혐오에 빠져 주위 상황도 제대로 둘러보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자기 손으로 두 눈을 감싸 쥐고 있는 상태였다.

누가 봐도 허점투성이 상태였다.

저대로 목을 따인다고 하더라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었다.

“…큭.”

하지만 조원호는 달려들지 않았다.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너무 적었다.

지금 그가 알 수 있는 정보는, 여섯 장의 날개를 펼쳐낸 지금의 루시퍼가 방금 전의 루시퍼와는 급이 다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머릿속에서는 경고음들이 잔뜩 울리고 있었다.

지금 공격을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허점투성이인 지금의 기회를 그대로 놓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었다.

‘…일도양단?’

아니, 그건 위험했다.

일도양단은 ‘반드시 베어낸다’는 일회성의 기아스를 걸어, 순간적으로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기술이었다.

당연히 기아스를 활용하는 기술인만큼 실패했을 경우에는 만만찮은 부작용이 따랐다.

그렇기에 일도양단은 단 한 번의 참격으로 적을 베어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을 때는 사용해서는 안 되는 기술이었다.

그리고 조원호는 자신이 단 한 번의 참격으로 지금의 루시퍼를 베어낼 수 있을 거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결국은, 정보가 너무 부족한 건가.’

지금은 탐색전이 필요할 때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조원호는, 먼 거리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루시퍼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은 허공을 베어낼 뿐이었지만, 검에 담겨져 있던 에테르는 참격의 형태를 띤 채로 앞을 향해 쇄도해 나아갔다.

키잉.

하지만 에테르의 참격은 루시퍼에게 닿는 순간, 약간의 충격음만을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루시퍼의 날개 중 하나에 닿는 순간이었다.

“…그래, 네놈이 있었지.”

자기혐오의 시간은 끝났는지, 고개를 들어 올린 루시퍼가 조원호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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