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소원을 말해봐
한율이 결심을 한 듯 침을 삼키고 말했다.
“나, 스파이가 될래.”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민하. 나쁜 의도는 없었지만 너한테 속은 기분이야. 그 대가로 나도 너희 가족 작전에 끼워줘야겠어. 안심해. 확실히 도움이 될 테니까.”
한율은 당돌한 표정으로 말했다.
“잠깐만. 이해가 잘 안돼. 그 스파이이라는 건 또 뭐고 왜 하려는 건데?”
민하는 한율이 갑작스레 퍼붓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스파이라니.
무슨 생각인 걸까?
“솔직히 네가 마계에서 왔다고 했을 때 조금 무서웠어. 네가 마족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겁이 났었다고. 나는 마족에 대한 편견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친구가 마계에서 왔다고 생각하니 무서웠단 말이야.”
“한율아…….”
“나는 그게 너무 분해. 내 속마음이 이렇게 치사한 건 너무 분하다고. 그래서 이참에 사실은 마족은 좋은 종족이라고 이해하고 싶어. 너희 가족 임무에 함께 하면 진심으로 마족을 이해할 수 있겠지?”
한율의 말을 듣고 민하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강철남은 성숙한 생각을 하는 한율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이런 아이가 민하의 친구라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하. 앞으로 작전에 관한 건 나와 같이 이야기 나누는 거야.”
“응, 그렇게 할게.”
그때, 저 멀리서 민하와 한율을 찾는 반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자유 시간이 다 끝나버린 것이었다.
“앗, 아이들이 부른다. 아빠, 저희 가 볼게요. 한율아 가자.”
“응. 안녕히 계세요.”
“그래, 잘 가렴.”
민하와 한율을 보내고 강철남은 마음이 놓였다.
보물을 처음으로 찾은 이가 바람직한 소원을 빌어주어서 안도했다.
* * *
오후 시간이 되자 민하네 학교는 꽃밭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봄꽃 공원으로 향했다.
가이아가 제안한 이 구역은 인간계와 마계의 꽃이 함께 피어 나는 곳으로 지천으로 널린 꽃들이 화합을 이루어 향긋한 꽃내음을 풍기는 곳이었다.
“너무 예쁘다!”
“선생님! 언니! 저희 여기서 사진 찍어요!”
꽃밭을 보자마자 아이들은 들떠서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선생님과 알파카를 졸라 꽃 이름을 묻거나 사진을 찍기도 했다.
민하는 한율의 손을 잡고 꽃밭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꽃바람]
민하가 손끝에서 작은 바람을 일으키자 꽃잎이 한율의 몸을 감싸며 두둥실 몸을 띄워주었다.
그 신비롭고 향기로운 마법에 한율이 해맑게 웃었고 민하도 기분 좋게 웃었다.
아이들이 봄꽃 공원에서 동화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이,
“헥… 헥…….”
한 남자가 봄꽃 공원의 포털을 발견하고는 안으로 뛰어든다.
남자가 도착한 곳은 가을 단풍이 물든 산길.
“마침 잘됐군. 수련용으로 딱이야.”
남자는 호흡을 가다듬고 산을 달려 오르기 시작했다.
얼마쯤 달렸을까 점점 턱 끝까지 차오르는 호흡을 견디지 못해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헉… 헉… 뒤질 거 같아…….”
남자의 이름은 최만근.
강철남에게 악플을 남겼다가 된통 혼이 났던 그 남자였다.
그날 피시방에서 참교육을 당한 이후로 자기 모습에 한심함을 느끼고 본격적으로 자기를 바꾸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래서 우선 선택한 것이 다이어트.
육중한 120kg의 몸뚱이에서 지방을 걷어내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그가 도착한 곳은 도시로부터 멀리 나와 야생의 세렝게티와도 같은 곳.
바로 희망 테마파크에서 자기 한계를 뛰어넘는 수련을 이겨내고자 한 것이었다.
“뒤질 거 같네.”
희망 테마파크에서 몰래 살아남기 도전 중인 최만근은 이주 일째 산의 나무 열매와 호수의 물을 마시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곳에는 심력으로 키워낸 나무들도 많아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열매도 아주 많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에 입었던 옷은 헐렁해져 있었고 전보다 달리는 발걸음이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맨날 피시방에 죽치고 앉아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몸이 갑자기 극한 체험을 하게 되니 단련을 넘어 혹사에 가까운 피로가 쌓이고 말았다.
“우윽!”
최만근은 먹었던 나무 열매를 게워내며 나무에 쓰러지듯 기대었다.
아무래도 이제 한계에 다다른 걸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무… 무울…….”
하지만 그 전에 시원한 물 한 모금만 마실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걸쭉한 목에서는 자꾸 마른기침이 나왔고 입안이 찝찝해서 기분이 불쾌했다.
수분이 부족한 모양인지 탈수 증상이 오는 것 같기도 했다.
이대로는 쓰러져 버릴 것 같았다.
그때,
“호수다.”
최만근은 좀비처럼 비틀대며 걷다가 눈부시게 푸르른 호수를 발견했다.
햇살이 반사되어 찬란한 빛이 눈을 찌르자 최만근은 머리가 아찔했다.
결국 중심을 잃고 호수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첨벙―
공기 방울을 뱉어내며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최만근은 입으로 들어오는 물을 마시고 땀을 씻어내며 정신을 차렸다.
자칫하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
다행히 완전히 몸이 망가진 것은 아니라 이대로 물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음머!”
놀래서 입에서 커다란 공기 방울이 팡 터져 나왔다.
호수 바닥에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직 숨이 남아 있던 최만근은 있는 힘껏 팔다리를 저어 반짝이는 물건을 향해 다가갔다.
간당간당한 호흡을 유지한 채 다가간 곳에서 돌 사이에 끼어있는 웬 작은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이건 틀림없이 누군가 의도하고 일부러 놓아둔 것 같았다.
숨이 넘어갈 듯 호흡이 가빠진 최만근은 냉큼 상자를 집어들고 허우적대며 올라와 물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푸하아!!”
콜록거리며 뭍으로 올라온 최만근은 그대로 나자빠져 바깥 공기를 마구마구 폐 안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손에 꽉 쥔 작은 상자의 존재가 궁금했다.
진귀하게 포장된 것이 마치 보물 상자 같기도 했다.
정말로 보물이라도 숨겨져 있는 걸까?
달칵―
긴장 반, 설렘 반 마음으로 최만근은 작은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랬더니 안에 있던 것은,
“종이?”
한 장의 하얀 종이가 들어 있었다.
반으로 접힌 그 종이를 펼쳐보니 세로가 긴 직사각형의 종이였는데 가운데는 [당첨]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퍼엉―!
푸른 빛이 번쩍하더니 하연 연기와 함께 누군가 나타났다.
“우왁!”
“놀랬냐?”
최만근 앞에 서 있는 자는 바로 강철남.
첫 번째 보물을 찾은지 얼마나 되었다고 바로 두 번째 보물을 발견하다니.
이걸 기막힌 우연이라고 봐야 할까.
“보물을 찾은 것을 축하한다.”
“보, 보물이요.”
얼떨떨한 상황에 최만근은 머리가 멍했다.
그런데 이 남자…
“히익!!”
갑자기 화들짝 놀래고는 혼비백산하고 뒷걸음질 치기 시작하는데.
“야, 왜 그러는데?”
“저, 저 그날 일은 진짜 아무한테도 말 안 하고 조용히 살고 있다고!”
“무슨 소리야, 갑자기. 너 누군데?”
그 사이 다이어트로 몸이 반쪽이 되어 버린 최만근을 강철남은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저 몰골이 말도 안 되게 피로해 보이는 남자가 홀딱 젖은 채 벌벌 떨고 있는 게 불쌍해 보일 뿐이었다.
“가만히 있거라.”
[회복]
강철남은 도력과 신력을 섞어 회복 술법을 발동하여 지친 최만근의 몸을 치료해주었다.
영험한 빛이 몸을 휘감자 지친 몸이 한결 편안해지는 것을 느낀 최만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당신 마족이었어?”
“나는 마족이 아니다. 인간이지. 그리고 ‘당신’이 아니라 마황제다.”
“…….”
최만근은 입이 굳어버렸다.
지금 눈앞에 있는 자가 진짜 마황제인가?
그런 자가 왜 나타난 거지?
무엇보다 악플 좀 썼다고 마황제가 자기를 쫓아왔다고?
“다, 당신이 마황제일 리가 없어.”
“왜 그렇게 생각하나?”
“마황제가 쪼잔하게 악플 좀 쓴 걸로 인간을 찾아와 혼내지는 않을 테니까!”
강철남은 그제야 손바닥을 주먹으로 쳤다.
어디서 낯이 익다 했더니 그때 피시방에서 악플을 달았던 녀석이로구나.
그때에 비해 살이 너무 빠져서 못 알아본 것이었다.
“너 이름이 뭐냐?”
“최, 최만근입니다.”
자기 입으로 마황제일 리 없다고 말했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묵직한 포스에 존대가 나오고 말았다.
“나는 이 희망 테마파크를 건설하면서 총 세 가지의 보물을 숨겨뒀지.”
“보물이요?”
“그래. 너는 그 중 두 번째 보물을 찾았다.”
“정말요?! 그 보물은 뭔가요?”
“어떤 소원이든 이루어주는 소원이지.”
그 말에 최만근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이런 개고생을 하지 않았을텐데.
아니, 오히려 이런 개고생을 한 보답으로 만날 수 있었던 걸까.
“소원이 뭔가?”
소원이라면 차고 넘친다.
그중 하나가 슬림한 체형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그건 이미 이 자연을 헤매다가 이루어진 것 같다.
또 하나의 소원은 바로,
“헌터가 되고 싶습니다!!”
“뭐?”
최만근은 어릴 적부터 영웅이 되고 싶었다.
그의 눈에는 몬스터를 물리치는 헌터가 현시대의 영웅으로 보였던 것이다.
비록 마계와 인간계가 손을 잡고 날뛰는 몬스터는 극히 소수라 헌터들의 활약이 줄어들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헌터들은 최만근에게 멋있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지금 이 소원은 무엇보다 간절하고 진실된 소원이었다.
“정말 그 소원으로 괜찮겠느냐?”
“네, 괜찮습니다.”
“좋다. 약속은 약속. 널 헌터로 만들어주마.”
강철남은 신력을 모아 빛의 정육면체를 만들었다.
이 힘이 최만근에게 스며들면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잠재 능력을 끌어 올려줄 것이다.
[신력 개방]
신비로운 힘이 최만근에게 스며들면서 그를 빛으로 뒤덮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오.”
강철남이 보기에도 제법 그럴듯한 모습이었다.
곧추선 허리와 탄탄한 상하체 근육.
그리고 날카로운 눈빛.
제대로 된 에이스 헌터의 모습이었다.
“저 뭔가 달라졌나요? 제가 느끼기에는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그건 네가 직접 확인해봐. 헌터 협회로 가면 적성을 판정받을 수 있고 네 그릇이 어느 만한지 확인할 수 있을 거다.”
“가, 감사합니다.”
“다행이구나.”
“네?”
“좋은 소원을 빌어주어서 다행이야.”
그 말을 남기고 강철남은 하얀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최만근은 귀신에 홀린 기분이라 멍하니 연기를 바라보다가 호수로 달려가 자기 몸과 얼굴을 비추어보았다.
“정말 헌터가 된 걸까.”
의심 반 기대 반인 마음으로 최만근은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 * *
다음날, 최만근은 집에 돌아와 꾸질꾸질한 몸을 씻고 로켓 배송으로 주문한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전신 거울에 비추어본 자기 모습은 어느새 탄탄한 몸매로 가꾸어져 있었다.
이 정도면 헌터 협회까지 쉬지 않고도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전에는 꿈도 못 꿨을 텐데 말이다.
“좋아, 가보자!”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 최만근은 가벼운 러닝으로 헌터 협회까지 달려갔다.
헌터 협회는 헌터에 관한 모든 행정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헌터 지망생들의 상태창을 확인해주기도 했다.
최근에는 헌터 지원자가 많지 않아 당일 방문 시 바로 상태창을 측정할 수 있었다.
“최만근님. 들어오세요.”
얼마간의 대기 후 최만근이 상태창을 측정할 때가 왔다.
‘눈’을 가진 최형권이 컴퓨터 앞에 앉아 보이는 상태창을 타이핑 해서 인쇄해 줄 것이다.
“자, 바로 서시고요.”
그리고,
최만근의 상태창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