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36화 (36/105)

36. 들었어요?

36.

선유를 향해 걸어간 그 여자는 소민은 보이지 않는다는 듯 선유만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유는 들은 척도 않았다.

“버릇없고 무례한 건 여전하구나. 나도 상처받아.”

선유의 태도에 전혀 상처받은 얼굴이 아니었음에도 여자는 그렇게 말하더니 선유를 돌려 세웠다. 그리고 소민은 그 순간 선유의 텅 빈 눈빛을 봤다. 여태껏 본 적 없던 그 눈빛에 소민은 순간 철렁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저 눈빛을 하고 있는 선유의 모습이 너무도 위태로워 보여서 이 곳이 벼랑 끝이나 다리 위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감마저 들 지경이었다.

“이제야 보는구나.”

그리고 그 눈빛이 보이지도 않는지 선유의 앞에 선 여자가 그렇게 말했다.

“밥 다 먹었으면 꺼져.”

“그러려고 했는데 마침 네가 보였잖니. 이건 내가 네 영역을 침범한 게 아니니까 내 잘못은 아니지.”

“그럼 못 본척하고 꺼져.”

선유는 높낮이도 없이 꺼지라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려고 할 생각이야. 근데.”

그렇게 말한 여자의 눈빛이 소민을 향했다.

“이 여자는 누구니?”

그 말에 선유가 소민의 손목을 잡아끌더니 그의 몸 뒤로 끌어 살짝 가렸다.

“알 필요 없어.”

“알 필요가 없다니. 그래도 명색이 내가 네 엄만데.”

그 말에 소민이 놀란 얼굴을 했다.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이 분위기가 과연 모자 간에 흐를 수 있는 분위기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누군지 나와서 얘기 좀 해보죠? 뒤에 숨어서 있지 말고.”

누군가 하는 말에 모양이 보인다면 저건 마치 화살이나 창처럼 뾰족한 모양이 아닐까 싶게 날카로운 어조와 시선이 소민을 불렀다.

움찔거리며 앞으로 나가려는데 선유가 잡고 있는 손목에 조금 더 힘을 주고는 아예 소민의 앞에 가리고 섰다. 덕분에 그 뾰족한 시선을 선유가 오롯이 받아내는 셈이 되었다.

“알 필요가 없다면 그런 줄 알아. 캐스팅 디렉터일 뿐이야.”

앞에 선 선유는 그녀 앞에 모진 바람을 막아줄 듯 믿음직스러웠지만 그가 던지는 대사에 소민은 심장이 서걱서걱 갈리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아, 그런 거였어? 실례했네요. 이 바닥에서 얘 발목 잡고 늘어지려고 하는 애들이 많아서. 그런 애들인가 했어요.”

아까와는 다르게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그럼 들어가서 얘기 나눠요. 나 때문에 시간 많이 뺏겼겠네.”

그렇게 말한 여자가 돌아서서 구둣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들어가지.”

그리고 그 여자가 사라지고서야 그녀를 가리고 있던 선유가 돌아서서는 그렇게 말했다.

아직도 소민의 손목을 잡고 있던 선유가 앞장 서 안으로 들어갔고 소민은 선유가 이끄는 대로 따라 들어갔다. 안내받아 들어간 방 안에서도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한동안 고민하던 소민이 입술을 뗐다.

“한선유씨는 김제운씨랑 같이 촬영 하니까 어땠어요? 둘이 친해요?”

선유의 시선이 소민을 향했다. 소민을 향한 시선에는 아까 상황에 대해 묻지 않는 그녀가 이상했던 걸까. 그녀를 담고 있는 듯 한편으로는 담지 않은 듯 한 시선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질문에는 답이 없었다. 애써 화제를 돌리려던 소민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래요. 말하기 싫으면 말아요.”

“안 친해.”

소민을 향해 선유가 시큰둥하니 답했고,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빛에 조금은 무언가가 담긴 듯 해 소민은 안도했다.

“왜요?”

“같이 촬영하면 꼭 친해지란 법 있어?”

“그렇긴 하네요.”

또 다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고 소민도 더 이상 궁금증을 참기는 어려웠다.

“그... 저기요.”

“왜.”

선유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그 눈빛에는 체념내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빛이 어려 있었다.

“아까 나 왜 숨겼어요?”

“뭐?”

그녀의 질문이 예상 밖이었던 걸까? 선유가 반문했고, 소민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굳이 왜 뒤에 숨겼냐구요. 아니 내가 한선유씨 캐스팅하는 게 부끄러워요?”

그 말에 선유가 피식 웃었다.

“뭘 묻나 했더니.”

“내가 한선유씨랑 같이 빈집털이 하는 것도 아니고. 뭐가 부끄럽다고 숨겨요?”

“그래. 내가 그 생각은 못했네. 근데 부끄러워서 숨긴 건 아니야.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신경쓰지 마.”

그렇게 말하는 선유의 표정에는 그 이상은 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리고 소민은 그런 선유에게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그가 아까 같은 눈빛을 할까봐 그래서 잊혀지지 않을 그 눈빛만 남기고 사라질까봐 겁이 나서. 그가 다시 평소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절로 안심이 돼서 묻지 않기로 했다.

“그래요. 뭐. 알겠어요. 내가 부끄러워서 그런 게 아니면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는 소민을 바라보던 선유의 머리에 자신에게 전화기 너머로 반말을 서슴지 않던 한 인물이 떠올랐다. 아까 그녀의 집에 있던, 자신이 나가고도 내려오지 않던 그 인물. 그러고 보니 그 남자에게 당수로 맞았던 미간이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이제 그가 안 괜찮을 차례인 모양이었다.

눈가를 어루만지는 선유를 본 소민이 물었다.

“왜 그래요?”

“아까 맞은 데가 아픈 것 같아서.”

그 말에 소민이 퉁명스레 말했다.

“그러게, 왜 남을 훔쳐보고 그래요.”

“값은 충분히 치른 것 같은데. 그리고 혈기왕성한 남자 앞에서 그렇게 벌컥 벌컥 문을 여는 본인 잘못이 더 크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럼 내 집에서 샤워도 맘대로 못해요? 그리고 따지자면 훔쳐본 한 선유씨가 변태인 거죠.”

“나는 그저 신체가 건강한 남자일 뿐이야.”

더 말해봐야 민망할 뿐일 듯 한 대화에 그리고 평소의 페이스를 되찾은 듯한 선유의 모습에 소민이 화제를 돌렸다.

“어? 액정에 그 사진 누구에요? 되게 귀엽게 생겼다.”

“나...라고 해야겠지.”

“진짜요? 한선유씨 어릴 때 이렇게 생겼었어요? 지금이랑 비슷한 것도 같고 다른 것도 같고. 좀 보면 안 돼요?”

소민의 말에 선유가 아예 액정화면이 보이지 않게 핸드폰을 뒤집었다.

“치사하게. 인터넷 뒤지면 나올 지도 모를 사진이면서.”

“안 나와.”

“왜요? 한 번쯤 스타의 과거 이런 거에 사진 나왔을 텐데요?”

“이건... 안 나온 사진이야.”

“참 나. 어차피 어릴 때 사진은 그 사진이 그 사진인데. 다른 사람인 것처럼 그래요?”

자신을 향해 그렇게 말을 하는 소민을 바라보며 선유가 다른 생각에 빠졌다. 다른 사람이란 말이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플래그가 됐다. 애써 생각을 전환하려는 노력을 하기도 했지만 소민의 말에 순식간에 생각이 다른 쪽으로 뻗어갔다. 그리고 그 생각은 아까 마주쳤던 자신에게 거침없이 당수를 날리던 그 남자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눈 앞에 앉은 이 여자가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 얘기만 해도 불쾌했다. 그게 일과 관련된 것인데도. 그런데 태연스레 목욕가운을 부탁할 수 있는 존재를 목격한 기분은 더 더러웠다. 그래서 차마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을 거를 새가 없었다.

“아까 그 남자는 동거인인가?”

일 얘기 좀 하쟀더니 또 딴소리였다. 선유의 의중이 무엇인지 살피려 그를 쳐다보는 소민의 눈에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선유가 비쳤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길게 생각할 시간을 허락하지를 않았다.

“아까 그 남자가 동거인이냐고 물었는데.”

“음... 굳이 따지자면 그렇죠?”

“그러니까 그 남자랑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거야?”

“그렇고 그런 관계가 뭔데요?”

“몰라 물어?”

“모르니까 묻죠.”

태연한 소민의 말에 선유가 얼굴이 벌개지더니 말했다.

“같이 밤을 보내는 사이냐고.”

“아...”

선유의 말에 이해했다는 반응을 보인 소민의 입에서 나온 말이 기막혔다.

“같이 밤을 보낼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는데요.”

“뭐? 정말이야?”

아니 동생하고 같이 날 밤을 지새우며 알콜을 좀 마시면서 밤을 즐기는 게 어디가 어때서?

알콜을 마신다고 과음을 하는 것도 아니고 영화 한 편을 보면서 입이 심심하니까 맥주 조금과 오징어 땅콩을  즐기는 것 뿐인데 말이다. 그게 그렇게 지탄 받을 만한 일인가 싶어 불현 듯 울화가 치미는 것이었다.

그렇게 묻는 본인은 수많은 여자와 신문기사를 비롯해 증권가 찌라시를 얼마나 장식해 줬는데! 하는 생각이 그녀를 더욱 열 받게 했다.

“아, 그래요! 그게 뭐요!”

“그럼 그 남자가 애인인가?”

이건 뭔 달나라 토끼가 같이 절구질 하던 옆 토끼 절구방망이로 두드려 패는 소리인지...

욱했던 그녀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아니면 설마......... 벌써 결혼이라도 한 거야?”

“뭔 소리예요. 동생이랑 어떻게 결혼을 해요.”

“뭐?”

이게 웬 다스베이더가 “아임유어파더” 하는 소리인지 설핏 이해가 되지 않고 있었다.

“동생 몰라요? 동생?”

“친동생?”

“아, 진짜! 그래요. 내 친동생. 하나뿐인 친 남동생이요!”

애인도 남편도 아닌 그저 동생이라고 짜랑짜랑하게 부인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시냅스를 거쳐 뉴런에 정확히 입력이 되자 차 안만 아니라면 덩실덩실 탈춤이라도 추고 싶은 기분인 게 한순간 바닥까지 추락했던 이카루스에게 다시 날개가 돋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동거인이라며?”

“동생이라도 같이 살면 동거인이지, 아니에요?”

다시 확인하려고 물은 질문에도 돌아오는 답이 같자 어쩌면 심장마비로 죽는 게 아닐까 싶은 기쁨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순간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또 다른 인물이 떠올랐으니.

“아, 그럼 김제운인가?”

“제운씨요?”

그녀의 입에서 친밀하게 들리는 호칭이 나오자 기분이 다시 한 없이 밑바닥으로 자맥질하기 시작했다.

“제운씨는 왜요?”

“김제운이 애인인가?”

“제운씨요? 제운씨랑 제가 왜 애인 사이에요?”

“분명히 지난 번에 영화제의 밤에서...”

“헉! 들었어요?”

“역시 대외적으로 비밀인 건가?”

“어디까지 들었어요?”

“글쎄... 김제운이 할게요. 남자친구. 한 거까지?”

묘하게 가라앉은 선유의 목소리에 소민은 눈에 띄게 안도했다.

“아... 그래요?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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