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안 가. 안 가도 돼.
37.
“뭐가 다행이지? 둘이 사귀는 걸 나한테 들켰는데?”
“제운씨랑은 아무사이도 아니에요.”
“아무사이도 아니라고?”
둘이 붙어 짝짜꿍짝짜꿍 잘도 놀더니 아무사이라도 아니라니. 선유가 보내는 불신의 눈초리를 소민은 태연자약한 시선으로 받았다.
“그래요. 사귀긴 누가 사귄다 그래요.”
“아니야?”
“아까 한 말은 뭐로 들었어요?”
“앞 뒤 설명이 다르잖아.”
“비밀 지킬 수 있어요?”
“내가 또 입에 만근추를 달고 사는 남자야.”
선유가 어깨를 으쓱하며 그렇게 말하자 소민이 흐응하고 콧소리를 내며 잠시 고민을 하더니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하긴 어차피 곧 기사도 날 거고. 크게 문제될 건 없겠네요.”
“뭔데?”
“그 대사... 제운씨가 맡기로 한 배역 얘기였어요. 남자친구 역할.”
“아... 그런 거였어?”
소민의 말을 들으니 순식간에 이해가 됐다. 그녀의 직업과도 잘 연결이 됨은 물론이었다.
“그 웃음은 뭐예요? 너 따위가 그럴 줄 알았다 그런 의미예요?”
어느새 번진 웃음에 소민이 톡하니 그렇게 쏴붙였고, 선유는 피식 피식 올라가는 입꼬리를 잡아 내려 고정시키며 말했다.
“아닌데?”
입꼬리가 자꾸만 삐죽이는 선유를 노려보던 소민이 무슨 생각인지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물었다.
“나도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뭔데?”
그의 물음에도 선유의 얼굴을 쳐다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망설이던 그녀가 물었다.
“하이파이브의 퀸이랑 무슨 사이에요?”
“어디의 누구?”
“그... 있잖아요. 한선유씨 여자 친구요.”
소민의 말에 선유가 기억을 곰곰이 되짚었다. 소민이 말하는 사람이 대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과 연관이 있으니까 묻는 것일텐데 퀸인지 프린세스인지 그런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여자친구라니?”
그의 태도에 소민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더니 비난을 시작했다.
“어쩜 남자가 그렇게 비겁해요? 그 퀸이 알면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대체 걔가 누군데?”
“한선유씨랑 차에서 있던 그 여자요!”
“나랑 차에 있던?”
소민의 말에 기억을 더듬던 그의 뇌리에 소민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던 그 때가 떠올랐다.
“아, 그 여자애 얘긴가?”
“이제 생각난 척 하지 말죠? 퀸 팬들이 알면 얼마나 돌팔매질 할 거야.”
“누가 그래? 그 여자애랑 나랑 애인사이라고?”
“그 때 그 퀸이!”
소민의 말을 한 손을 들어 막은 선유가 소민의 눈을 바로 보며 얘기했다.
“나도 배역 얘기한 거야. 배역 때문에 대본 맞춰 보는데 엄지손가락 들어 올린 누구 덕분에 황당했던 기억이 떠오르는군.”
물론 그 여자애가 자신에게 들이대긴 했지만 그걸 굳이 떠들고 싶지는 않았다.
태연한 그의 말에 소민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거짓말. 그 퀸이 그런 대사를 했는데도요?”
“누가 할 말을. 내 팬이라는 말, 거짓말 맞지? 내가 나오는 드라마에 그 여자애랑 내가 무슨 사이로 나오는지도 모르는 걸 보면 백프로 거짓말이지.”
“진짜예요?”
그렇게 되묻는 소민을 한차례 노려본 선유가 이내 스마트폰을 꺼내 뭔가를 입력하더니 곧 그녀에게 화면을 들이밀었다.
선유가 내민 건 그가 최근까지 촬영한 드라마의 인물 관계도였고, 선유의 말대로 그 여자는 선유와 연인사이로 나왔다.
“이걸 몰라서가 아니에요. 정말 둘이 아무사이도 아닌 거 맞아요?”
“당사자가 아니라는데 왜 안 믿지?”
“그야 퀸은 정말 좋아하는 사람 보듯이 봤으니까요.”
“그럼 걔는 나 좋아하나보지.”
너무도 태연자약한 그의 말에 소민이 쿨럭 헛기침을 했다.
“그... 그래요?”
“그래.”
“그럼... 한선유씨는요?”
“나 뭐.”
선유가 시큰둥하니 되물었다.
“한선유씨는 퀸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생각 안 하는데.”
“에?”
“생각 안한다고. 솔직히 그 여자애 이름도 몰라.”
무심하게 그렇게 말하는 선유의 태도에 되레 본인이 민망해진 소민이 정면을 응시했다. 왠지 모르게 서운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표정이 사르르 풀리는 그녀의 얼굴 마법을 지켜보던 선유가 창틀에 팔을 걸치고는 긴 검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더니 이내 입술을 열었다.
“근데... 그게 왜 궁금했는데?”
“네?”
선유의 질문에 소민이 자신이 그게 왜 궁금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냥요. 원래 제가 호기심이 좀 많아서. 아하. 아하하하하하하하.”
어색한 소민의 웃음에 선유가 한쪽 눈썹을 올렸다 내리며 물었다.
“그게 말이 돼? 연예부 기자라도 되려는 건가?”
“그럼 반대로 물어볼게요. 한선유씨는 나랑 김제운씨가 애인사인지 아닌지 왜 궁금했는데요? 한선유씨야 말로 연예부 기자 하게요?”
소민의 말에 선유가 입을 다물고 그녀를 쳐다봤다. 한참만에 그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김제운이랑 나랑 같이 촬영했잖아. 혹시나 열애설 터지면 나한테도 인터뷰하러 올지 모르니까.”
“아... 저도 뭐... 제작사에서 한선유씨 여자친구 있냐고 물어보면 답변해야 하니까요.”
대충 둘러댄 말에 소민의 눈에서 한순간 생기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 보는소민의 눈에는 그런 기색은 전혀 없어 보였다.
“아무튼 이건 이번 드라마 컨셉이랑 전체 줄거리 담긴 시놉시스예요.”
소민이 건넨 서류봉투를 선유가 받아들었을 때였다.
“실례합니다.”
방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소민의 말이 잘렸다. 서빙하는 종업원이 반찬을 들여오고 있었다. 자연스레 얘기가 끊기고 반찬을 기다리는데 종업원의 시야에 선유가 들어왔다.
“어머! 한선유씨 아니세요!!!”
“아, 네.”
“저 한선유씨 팬이에요.”
목례를 하는 선유에게 팬이라며 반색을 한 종업원의 시선이 건너편에 앉은 소민을 눈으로 훑었다.
“여긴 누구... 설마... 애인이세요?”
“아니요.”
소민이 부인하자 종업원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일반인이랑 한선유씨라니...”
말끝을 흐리는 종업원의 말이 가당치 않다는 뜻을 담고 있어 소민이 자신이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어처구니 없어 하려는 찰나였다..
“그럼요. 저 분이 저보다 더 훌륭한 분인데요. 차기작 계약 관련해서 만난 저한테 굉장히 중.요.한. 사람입니다.”
웃는 낯으로 이야기하는 말은 단순히 소민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듯 한 것이었지만 묘하게 강조한 단어가 섣부른 지레짐작과 소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은근히 일침을 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민의 귀에는 그 문구에서 선유가 강조한 단어만이 귓가에 콕콕 박혔다. 그 말이 심장까지 콕콕 새겨질 기세였다.
“아, 그러시구나.”
그 말에 뜨끔한 종업원이 이내 반찬을 내려놓고는 곧 요리를 갖고 오겠다며 나갔다.
“한선유씨.”
“왜.”
“방금... 혹시 내 편 들어준 거예요?”
소민의 말에 선유가 소민의 눈을 바라봤다. 잘생긴 눈에 담긴 거울처럼 맑은 동공이 그녀를 담았다.
“여기... 네 편 내 편 나누는 자리는 아니지 않나?”
“그렇긴 한데...”
종업원 앞에서 그녀를 배려한 듯 보인 게 단순히 자신의 착각인가 소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시당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 무시당하는 게 싫은 것뿐이야.”
그리고 그런 소민의 귀에 선유의 말이 날아왔다. 무심하게 그렇게 말하는 선유를 소민이 뚫어져라 바라봤다.
“한선유씨는 참... 묘한 사람이네요.”
소민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무슨 의미지? 나쁜 뜻인가?”
“아, 나쁜 의미는 아니에요. 그냥 제가 좀 잘못 생각한 게 있는 것 같아요.”
소문으로 들었던 선유와 지금 자신의 앞에 앉은 그녀가 알게 된 선유는 많이 달랐다. 안하무인에 싸가지, 머리 나쁘고 카사노바라던 연예인 한선유 대신 틱틱거리며 이따금 말버릇이 나쁘긴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그리고 말속에 숨겨진 가시를 금방 알아채는 그런 남자가 앉아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된 생각을 하기도 해.”
선유가 그렇게 말했을 때 종전의 종업원이 다시 들어왔다. 이번 트레이에는 돌솥에 담긴 알밥이 실려 있었다.
“그나저나 정말 잘생기셨네요. 화면보다 더 멋진 것 같아요.”
종업원이 그렇게 말하며 트레이에서 알밥 하나를 들고 와 소민에게 오던 중이었다.
“어어어어!”
선유를 보고 긴장해서인지 아니면 시선이 선유를 향해 있던 탓인지 방석에 걸려 넘어진 종업원이 엎어지면서 작은 돌솥에 든 알밥이 돌 솥째 소민을 향해 날아갔다. 소민이 질끈 눈을 감는데 이내 퍽소리가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픈 곳이 없자 소민이 살그머니 눈을 떴다.
“괜찮아?”
“네. 전 괜찮은데. 한선유씨는...”
소민의 눈에 어느 새 자리에서 일어나 있는 선유가 제일 먼저 들어오고 그 다음에는 바로 앞쪽으로 넘어져 있는 종업원, 그리고 한 쪽 벽 구성으로 날아가 있는 돌솥과 알밥의 흩어진 잔해들이 보였다.
무슨 정신으로 일어섰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소민을 향해 날아오던 그 뜨거운 돌솥을 손으로 날려낸 후였다. 그 순간에는 그 돌솥에 소민이 맞기라도 한다면 안 된다는 생각이 그를 움직였다.
돌솥을 날리고 난 후에도 다른 것보다 소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놀라거나 무언가 소민에게 떨어지지 않았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소민에게 아무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그의 시선이 자신이 방금 날려버린 돌솥에 닿았다. 흐트러져 나온 그 잔해 사이로 들어온 재료에 그의 안색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괜찮ㅇ”
안색이 창백한 선유에게 괜찮은지 묻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박찬 그가 겉옷과 소민이 건넸던 봉투를 집어 들고는 붙잡을 새도 없이 룸을 빠져나왔다.
“한선유씨! 한선유씨!”
정신없이 식당 밖으로 나온 선유가 차로 향했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차문을 열려다 열지 못하고 주륵 차에 기대 무너졌다. 선유의 뒤를 따라 나온 소민이 두리번거리다 선유를 발견하고는 재빨리 달려갔다.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지난 번 촬영장에서처럼 식은땀을 흘리는 선유의 모습에 소민이 물었지만 그는 거친 숨소리만 냈다. 열이 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딱 봐도 그 당시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보였다.
“안되겠다. 우리 병원 가요.”
그렇게 말하는 소민의 손목을 선유가 붙잡았다.
“...... 안 가. 안 가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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