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쓴 소설에 전생했다-4화 (4/102)

〈 4화 〉 만물상 (수정)

* * *

어거스트는 내 목걸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목걸이, 나한테 맡겨놔라."

"어거스트, 그건 유품..!"

"넌 닥치고 있어. 절름발이."

똑똑하다면 똑똑하고, 징그러울 정도로 계산적인 놈.

지금껏 가까이하지 않아서 양아치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이 녀석은 확실히 떡잎부터 다르다.

" ...잃어버리지 마."

의외로 순순히 목걸이를 넘기자 어거스트가 씩 웃으며 목걸이를 가로채 갔다.

" 좋아. 이제 다녀오라고!"

만물상이 있는 비좁은 골목길을 걸어가며 길리언이 말을 걸었다.

"괜찮아? 부모님네 유품이라면서."

"상관없어."

유품? 알 게 뭐야. 태어나자마자 버린 놈들이었다. 부모라 불릴 자격도 없지.

"..."

검은색 십자 모양의 목걸이.

무엇으로 만들어진 건인지는 모르지만 7년 동안 차고 있음에도 흠집이 전혀 남지 않았다.

목걸이야 파이프를 팔고 다시 돌아가면 받을 수 있지만, 이걸로 길리언과 둘이서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뒷골목 으슥한 곳으로 도착하니, 아르모니아어로 '만물상' 이라 적혀진 허름한 건물이 나타났다.

"제값, 받아낼 수 있을까. 사야..?"

길리언은 조금 걱정되는 눈치였다.

문제없지. 나는 정신만큼은 어른이니까.

이런 중세 만물상의 협상은 기본적으로 깡이다. 처음부터 묵직한 금액을 요구해서 최소치를 높게 설정하는 게 베스트다.

­

"20 골드. 더는 못 쳐준다."

"말도 안 돼!"

만물상 아저씨는 터무니없는 가격을 요구했다. 딱딱한 빵과 물이 2골드. 숙박비가 5골드다. 두 사람이 이틀 정도 버틸 골드밖에 되지 못하는 금액이다.

"너무 남겨 먹잖아! 적어도 반값은.."

"시끄러워. 남자 꼬맹이 둘이서 쫑알쫑알하는 것도 짜증 나는데. 안 팔 거면 썩 꺼져!"

이럴 수가. 한마디도 먹히지 않았다. 이게 중세..?

꼬맹이라 얕잡아볼까 일부러 반말까지 쓰면서 가격을 불렀는데,

그게 오히려 역효과가 된 듯하다.

"사야. 잠깐 이리로."

길리언이 내 옷 소매를 잡아끌었다.

길리언에 이끌려 다시 건물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아무래도, 저 아저씨한테는 사야의 방법은 오히려 화만 돋구는 느낌이야."

..슬슬 나도 그렇게 느끼고 있던 참이지.

"뭐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채찍이 안되면, 당근을 써야지."

당근?

“당근을 어디서 구하는데?”

"네가 당근이야. 사야."

...엥?

­

수치스럽다.

지금 내 꼬락서니가, 이 몰골이 과연 맞는 걸까.

"..와. 솔직히 몰라보겠어. 사야."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세상에 귀여운 걸 싫어하는 남자는 없어! 분명 먹힐 거야!"

조금 전, 길리언이 신발 끈 두 개를 풀어내서 머리를 묶어주었다.

평생 안 해본 머리끈을 여기서 하게 되다니.

"역시 바지는 벗는 게 좋겠어."

"뭐..?"

이게 돌았나.

"미쳤어? 바지는 왜!?"

"지금 복장은 너무 밋밋해. 내 생각엔 좀 더 강렬한 게 필요할 것 같아. 상의 밑단이 길어서 바지를 벗어도 치마처럼 자연스러울걸."

"으음…"

"못하겠으면, 도와줄까?"

"혼자서 할게! 혼자서 한다고..!"

아이씨.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온 건지.

“뒤돌아 있을게. 다되면 불러..”

뒤돌아있는 길리언을 확인하고, 천천히 바지를 내렸다.

나는 언제 남자애 시선을 의식하는 놈이 돼버린 거지..?

분하고 창피하지만, 길리언이 근거 없는 작전을 세울 아이는 아니니까 믿어보기로 했다.

"..너, 실패하면 한 대 맞을 각오해."

"하하.."

...후우.

크게 심호흡을 하고 가게 문 앞에 섰다.

침착해, 길리언의 작전대로..

'딸랑­'

"어서 오쇼. 빌의 만물상입니…"

“...”

이어지는 십수초간의 정적. 결국 내가 먼저 입을 뗐다.

“저기.. 방금전 무례는, 죄송했어요.”

“..오…. 오오오오….....”

“..?”

건물 벽을 타고, 무시무시한 진동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진동의 근원은 눈앞의 이 아저씨인 듯 한데.

“..나는... 이런 가녀린 소녀에게…”

불안해.

“무슨 심한 말을 해버린 것인가 ㅡ !!!”

그가 참지 못하고 벽을 내려치자, 진열대에 있던 온갖 잡동사니가 바닥으로 수직 낙하했다.

‘미쳤군.’

조금 전까진 단호박을 수십 개 먹은 듯이 매정했던 아저씨가, 이제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뿜어낸다.

“빌 아저씨가 미안해요오... 꼬마 아가씨, 뭘 해줄까?”

움찔.

본능적인 위협에 순간적으로 뒷걸음질 쳤지만, 이성이 나를 겨우 붙잡았다.

“물건. 팔고 싶어요.”

“웅! 얼마를 원해에~?”

진심으로 소름 돋았다.

이거 빨리 탈출하지 않으면, 하고 생각할 때 길리언이 나를 작게 불렀다.

‘사야..! 50! 50!’

아득해지는 멘탈을 붙잡고, 만물상에게 말했다.

“50이면 가능할까요..?”

“으으음.. 곤란한데.. 50에 줘버리면 우리도 남는 게 없어서어..”

말투 늘이지 말아 주세요. 죽이고 싶으니까.

하는 수 없다. 길리언이 알려준 최후의 방법을 사용할 때다.

정말 정말 정말 하기 싫지만, 이건 다 살아남기 위해서니까.

후우.

“...사야느은..”

“..?”

만물상에게 다가가, 최대한 귀여운 포즈를 취했다.

“사야는.. 50골드, 꼭 필요한걸.. 응?!”

그의 눈동자가 요동친다.

“아니…. 그래도, 50골드는 너무 많달까..”

이번에는. 팔짱까지.

“응?!”

“.......”

딸랑.

문에 달린 방울이 흔들렸다.

“감사합니다! 빌의 만물상에 또 놀러 오세요!”

나는 한 손 가득 묵직한 무게가 느껴지는 골드 주머니를 품에 안고 밖으로 나온다.

“오오..! 사야, 해냈구나!”

길리언을 한 대 때렸다.

“서, 성공했는데 왜 때려?”

남자로서 무언가 끝나버린 것 같아서, 괜히 길리언을 한 대 쳤다.

진짜로 정말로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생각해보니까 또 열 받네.”

퍽. 길리언을 한 대 더 쥐어박았다.

“으악! 결과는 좋았잖아, 응!?”

“하….”

어찌 됐든, 길리언의 작전 덕분에 50골드를 얻게 된 건 사실이니까.

이쯤 해두도록 하고, 슬슬 어거스트에게로 돌아갈 준비를 해보자.

나는 바지를 다시 입고 머리끈을 풀어 길리언에게 돌려주었다.

“...”

“왜?”

“아니야, 아무것도.”

걸어가는데 아까부터 힐끔힐끔 쳐다보는 느낌이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골목길을 벗어나자, 다행스럽게도 어거스트의 모습이 보였다.

“사야. 누가 또 있는데?”

“응?”

어거스트의 옆에는, 사람 좋아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같이 서 있었다.

“어이! 너희들 늦었잖아!”

그럴 일이 좀 있었거든.

일단은 골드 분배부터 해볼까.

“자. 여기 약속한 골드야. 파이프가 50골드 나왔으니까 정확히..”

“넣어둬. 넣어둬.”

골드를 꺼내려는 내 손을 그가 제지했다.

“그런 건 나중에 하고, 일단 인사드려. 여긴 마리아 할멈.”

“이 아이의 친구들이니? 다들 참 예쁘구나.”

누구지, 이 사람?

족히 70세는 먹은 것 같은 백발의 노인이었다.

“이분은..?”

“너희가 만물상에 다녀오는 동안, 말을 걸어오더라고. 민박을 운영하고 계신대.”

민박인가. 지금껏 머릿속으로 여관비용을 계산하고 있었는데.

“여관에서는 한 사람당 5골드씩 받는데, 마리아 할멈은 2골드로 해주신단다. 어때, 좋은 분이지?”

‘2골드..?’

삼일을 묵는다고 쳐도 고작 6골드.

“사야. 따라가도 되는 걸까..?”

길리언이 작게 귓속말을 건넸다.

“다들 배고프지? 집에 스튜를 끓여놨단다.”

“빨리 따라가자. 배고파서 눈이 돌겠어.”

민박을 한다고? 2골드로?

웃기는 소리 하고 앉아있다.

당장 땅 파도 먹을 것 하나 없는 이곳에서, 뭐하러 그런 자선 사업을 운영해?

“길리언. 짐 챙겨. 우린 거기 안갈꺼니까.”

짐을 집어 들고, 길리언에게 건넸다.

어거스트는, 불만족스럽다는 눈으로 우릴 바라본다.

“여기 네 몫 20골드. 5골드 더 얹어 줬으니까, 불만 없지?”

“...”

그리고 잊은 거 하나.

“목걸이 줘야지.”

그는 혀를 쯧, 굴리며 목걸이를 다시 돌려준다.

이걸로, 이놈과의 인연은 끝이다.

“가자, 길리언.”

“으, 응.”

묘하게 얽혀오는 시선을 등진 채, 길리언과 여관으로 향했다.

“방 하나요.”

험상궂게 생긴 중년의 여관 주인은,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열쇠를 휙 던져준다.

“올라가서 오른쪽이다.”

방에 올라가 문을 잠그니, 안도감이 밀려왔다.

“하아… 드디어.”

양아치 근성 꼬맹이에, 누가 봐도 뻔한 인신매매를 시도하는 할머니에, 도대체가 이 세계는 마음 놓고 살아갈 수가 없다.

“..저기, 사야.”

“응?”

짐을 풀던 길리언이, 우물쭈물하며 말을 걸어온다.

“실은 아까 여관까지 오는데, 뒤에서 계속 인기척이 느껴져서.. 사야한테 말해줘야 할 것 같았어.”

“...”

인기척만으로 억측하는 건 좀 과한 게 아닌가 싶지만, 만일에 대비해서 나쁠 건 없다.

길리언이 들었다는 게 사실이라면, 우리 같은 쉬운 먹잇감을 쉽게 포기하진 않을 거다.

“여기, 다른 여관은 없었지?”

“응, 하도 작은 마을이라 여기뿐인 듯 해.”

노숙을 하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이런 쌀쌀한 날씨에 꼬맹이 둘이 노숙하는쪽이 더 미친짓이다.

미행의 낌새를 알았더라도, 방을 잠궈놓고 있는 쪽이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

“잠깐 기다려.”

다시 카운터에 내려가 돈을 지불하고, 옆 방을 하나 더 잡았다.

“..뭐한거야?”

“방을 나눴어. 하나는 위장용인척 하면서, 각자 방을 나눠잘거야.”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여기 문짝 못 봤어? 몽둥이로 치기만 해도 쉽게 열릴걸.”

주인에게는 한 방에는 짐만을 놓을 거라고 말해뒀다.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돈을 더 준다는데 마다할 사람은 역시 없었다.

“나눠서 자다가 수상한 낌새가 있으면, 창문이 가까우니까 다른 방으로 넘어올 수 있어.”

여차하면, 좀 다치더라도 뛰어내려도 된다.

“..배고프니, 이제 뭐라도 좀 먹어야겠네.”

방을 두 개나 잡느라 여윳돈이 없지만,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할 테니.

여관의 음식 중 가장 싼 것은 양배추 수프였다.

물을 얼마나 많이 집어넣었는지, 양배추는 거의 향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양배추 수프를 먹으며, 조금 긴장이 풀려갔다.

“..사야, 우린 뭘 하며 살아가야 할까?”

어린애치고는, 꽤 심오한 이야기다.

“..일단은, 살아남아야지.”

발버둥 치며 살아남아 보는 게, 우리가 이 부조리한 세계에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다.

그날 밤, 말해뒀던 대로 길리언과 방을 한쪽씩 나눠서 자기로 했다.

긴장을 곤두세우느라 제대로 자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종일 돌아다닌 탓에 결국 밀려오는 졸음에 몸을 맡겼다.

달콤한 냄새에, 잠을 깼다.

어딘가 익숙한, 그러니까 전생 전의 세계에서 좋아했던 냄새였다.

그러니까 이게.. 뭐였더라..?

‘바닐라..’

바닐라 향이다.

‘이 세계에, 바닐라가 있었나..?’

어렴풋이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다.

그래. 바닐라 향이 나는, 약초가 있었지.

‘이프노스.’

중학교 시절의 나는, 단순히 세계를 만들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 생물, 몬스터 하물며 식물까지도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가며 지어주었었다.

‘뜻이 뭐였더라?’

아르모니아 세계관 대부분의 고유명사는 그리스어에서 따왔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아르모니아’ 라는 단어도 ‘조화’라는 뜻의 그리스어고.

“....!”

몸을 일으키고, 곧장 코를 틀어막았다.

기억났어.

그리스어로 이프노스의 의미는 ‘수면’.

말 그대로, 대상자를 잠재울 때 사용하는 약초였다.

그런 약초를, 누가 이런 여관에서..?

재빨리 창문을 열고 난간에 서서, 길리언의 방의 창문을 두드렸다.

“...미친..!”

희미하게 냄새만이 남았던 내 방과 달리, 그의 방에는 희뿌연 연기가 가득 차 있다.

창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유입되며 급격하게 연기가 빠져나왔다.

“길리언, 길리언..!”

작은 목소리로 그를 흔들었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길리언의 방 문 밖으로, 처음 듣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쯤 잠들었겠지?”

“그럼, 비싸게 구한건데, 먹혀야지.”

쿵.

무언가를 내리 찍는 소리가 들렸다.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그게 잠긴 문을 여는 시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관 주인이 관여하지 않는걸로 봐서는, 이미 암묵적 동의라는 거겠지.

돈이면 정말 뭐든지 하는구만.

길리언을 등에 업고, 창가에 고개를 내밀었다.

“....”

약 2층 높이. 나 혼자였다면, 다리를 좀 다치더라도 충분히 도망갈 수 있다.

그러나 길리언이 의식이 없는 지금은 달랐다.

그를 버리고 간다면, 나는 살 수 있다.

...

..그런 생각이 드는걸, 고개를 저어 떨쳐버렸다.

잘못돼서 죽더라도, 인간으로 죽어야지.

코를 틀어막고, 침대의 이불보와 커튼을 있는 대로 모아 엮었다.

창틀의 뾰족한 부분에 묶은 뒤, 임시로 만든 로프를 아래로 내렸다.

“...후우.”

심호흡한 뒤, 등에 길리언을 업은 채로 건물의 외벽을 한 걸음씩 내디뎠다.

‘젠장, 팔이 찢어지겠어…!”

각오는 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무게다.

한 손으로 줄을 붙잡으면서 길리언을 떨어지지 않게 하는 건, 어린아이의 몸으로는 도저히 버틸 만한 것이 아니었다.

밧줄을 이빨로까지 물면서, 신중히 한 걸음씩 내디뎠다.

중간까지 내디뎠을까? 결국, 밧줄에서 주르륵 미끄러져 떨어지고 만다.

“으윽…!”

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서 길리언의 머리를 부딪히지 않게 하려다 보니, 다리가 크게 삐었다.

아파할 틈도 없이, 그를 고쳐 업고 다리를 절며 여관으로부터 열심히 걸었다.

길리언을 버리지 않은 이상, 이 더러운 곳에서 꼭 살아남을 거다.

근육이 다 찢어져서, 팔다리가 전부 풀린다. 도중에는 결국 질질 기는 형태로 길리언을 끌고 갈 수 밖에 없었다.

이 언덕을 넘어 인근의 숲으로 숨어들면, 어떻게든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을 거다.

앞으로, 한 걸음만..

“...어..?”

언덕을 넘어 마주한 것은, 익숙한 두 사람의 그림자였다.

“제가 그랬죠. 머리좋은 계집이라고.”

“네 말대로 창가에서 기다리길 잘했구나.”

어거스트와 좀전의 그 노파였다.

“어거스트, 이 개..”

노파가 휘두른 몽둥이에,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나는 무어라 말을 더해보려고 했지만, 의식이 흐릿해지면서 초점이 흔들린다.

“그러게, 순순히 따라오면 좋았잖니. 아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인자한 마리아의 미소를 보며,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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