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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38화 (38/170)

< 이렇게 신뢰를 보내주면 나도 힘이 날 수밖에 없지 >

다음날, 나는 유현지와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단, 약속장소는 언제나와 같은 연습실이 아니었다.

돈가스와 우동을 파는 회사 인근의 가게.

저녁도 같이 먹을 겸, 오늘은 그녀에게 할 말도 있었으니까.

“매니저님.”

“아, 오셨어요? 현지 씨, 많이 배고프시죠?”

개인연습을 하지 않고 와서 그런지 좀 일찍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개인연습까지 빼달라 할 정도로, 오늘 내가 할 말은 꽤 적지 않은 무게감이 있었다.

당연히 말을 하는 나도 어느 정도 긴장을 하고 있었고.

데뷔를 미룬 것에 대한 얘기.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말을 하는 편이 맞는 것 같았다.

그녀의 데뷔를 내가 허락도 없이 미룬 거니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네.’

데뷔를 미룬 것에 대한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면 그녀도 납득할 거라는 믿음은 있었지만, 납득하기 전까지는 날카로운 반응이 나올 수도 있다.

또한, 내가 그것을 미룰 수 있느냐에 대한 얘기.

이건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어느 정도 생략하거나 아니면 대충 얼버무리거나, 그도 아니면 어림짐작이라도 할 수 있게끔 간접적으로 돌려 말하거나.

그렇다.

지금 이렇게 그녀와 얼굴을 맞대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나는 그녀에게 어떻게 말을 전달해야 할지 확실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어떠한 선택지를 골라도, 그 이후 파생되는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겨났으니까.

내가 사회 경험이 적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냥 맞부딪히는 쪽으로 선택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캐물어보면 캐물어보는 대로 대답하고, 아니면 얼버무릴 수도 있고.

우선 내가 어떻게 미뤘는지보다는, 그녀의 데뷔를 내가 미뤘다는 걸 알리는 게 중요한 거니까.

“현지 씨, 맛은 좀 괜찮아요?”

“네. 저 아무거나 다 잘 먹어요. 매니저님은 맛있어요?”

우리는 식사를 하며 별거 아닌 얘기들을 했다.

중요하거나 무거워질 수 있는 얘기들은 식사가 다 끝난 다음에 하는 거라고 알고 있어서.

“1등 다시 한번 축하드려요. 어제 기분 되게 좋았겠어요.”

“오늘 연습할 때도 기분 좋았어요. 지금도 기분 좋아요.”

저렇게 맑고 깨끗한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 실망감을 안겨줄까 봐 두렵다.

그녀를 위해서 이런 결정을 내린 거긴 하지만, 얘기를 다 듣고 ‘뭐하는 짓이에요?’라고 말하며 화를 낼 수도 있다.

몇 년간 연습생 생활을 해오며 애타게 기다려왔을 데뷔다.

이제야 겨우 데뷔 찬스가 찾아왔는데, 내가 그걸 미룬 거다.

유현지가 막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이 상상이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런 걱정이 계속해서 차오르고 있다.

돈가스를 씹는데 맛도 안 느껴지고, 속도 더부룩해서 잘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래도 억지로 꾸역꾸역 먹어서 그릇이 깨끗하게 비워졌다.

이젠 말해야겠지.

나는 냉수를 벌컥벌컥 시원하게 들이키고는 말문을 열었다.

“현지 씨.”

“네.”

“현지 씨 데뷔 프로젝트 시작한다는 거 제가 좀 미뤘어요.”

그녀의 눈이 살짝 커지는 걸 보곤 난 다급히 말을 이었다.

“아직 현지 씨 노래를 안 봐드렸잖아요. 좀 더 장점을 끌어올린 다음에 데뷔 준비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어요. 죄송해요, 상의도 없이 제가 미뤄버렸어요. 그래도 대중들한테 강한 임팩트를 주려면 컨셉이라든지 곡이라든지 좀 더 현지 씨 실력을 끌어올린 다음에 준비하는 게 나을 것 같더라고요.”

그녀의 똘망똘망한 눈이 내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에는 환한 미소를 머금고.

“···?”

하다못해 얼굴이 굳거나 미간이 살짝이라도 찌푸려질 줄 알았는데.

왜 웃고 있지?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감사?

“예···?”

내 표정이 어떤지 몰라도 내 되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나는 물었다.

“데뷔를 미뤘는데··· 아쉽거나 하지는 않으세요?”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는 듯, 그녀의 얼굴에 배시시 미소가 퍼졌다.

“매니저님은 절 위해서 그러신 거잖아요.”

“아··· 네···. 그렇죠.”

아무리 이유를 말했다 하더라도, 이런 건 예상하지 못했었는데.

심지어 자세하고 깊게 들어가지도 않았다.

“전 매니저님이 하자는 대로 할게요.”

로드매니저인 내가 어떻게 데뷔를 미뤘는지에 대해서, 아예 설명을 안 해도 되는 상황이 올 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 얼떨떨한 듯하면서도 입꼬리가 움찔움찔 떨렸다.

안 되겠다. 지금 당장 연습실에 가야겠다.

“그럼··· 바로 연습실로 갈까요?”

“좋아요.”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를 나왔다.

이렇게 신뢰를 보내주면 나도 힘이 날 수밖에 없지.

***

“우선 가장 자신 있는 것부터 해볼래요? 무반주로.”

“네, 그럼 오아시스의 ‘Champagne Supernova’ 할게요.”

“···.”

지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YU엔터의 신인 걸그룹, ‘샴페인 노바.’

그녀는 이 걸그룹 데뷔조에 들지 못해서 YU엔터를 나왔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부르는 노래는 ‘샴페인 수퍼노바’.

‘이거랑은 아무 관련 없겠지?’

나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본 그녀라면,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이 노래를 부르는 건 아닐 테니까.

내가 가장 자신 있는 걸 보여달랬잖아.

그녀와 나, 단 둘이 있는 작은 보컬 전용 연습실에서.

그녀는 목을 풀고는 노래를 시작했다.

“How many special people change.”

첫 소절이 내 귓가에 꽂힌 순간,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샴페인 노바?

아니, 그녀는 정말 가장 자신 있는 노래를 한 거였다.

‘너무 좋잖아.’

만약 이게 음원이나 영상이었다면, 나는 당장 첫 소절을 또다시 들어봤을 것이다.

“How many lives are lining strange.”

아니 어쩌면 모든 소절을.

나는 그녀의 목소리가 주는 감성을 기꺼이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녀의 눈빛처럼 맑고 깨끗한 노랫소리.

듣다 보면 귀에서부터 스며들 듯 정화되는 느낌이 든다.

“Someday you will find me.”

기본적으로 높은 톤의 목소리로 듣기 편안한 소리를 내는데, 그 안엔 그녀만의 독특한 매력이 담겨 있었다.

내가 본 그녀의 가능성은 바로 이것.

나는 그 매력이 목소리 위로 튀어나왔을 때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힘.’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 단단한 힘이 잠재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비욘세와 같은 그런 슈퍼파워풀보컬이 아니라.

뭐랄까, 그녀가 지금 부르고 있는 오아시스로 따지면 리암 갤러거보단 노엘 갤러거에 가까운 느낌?

그렇다고 리암이 힘이 없다는 말은 아니고.

아무튼.

그녀의 깨끗하고 맑은 보컬은, 단단한 힘으로 꽉 둘러싸여졌을 때 가장 빛이 날 것이다.

그 완성된 무대가 눈앞에 그려져서, 입가에 씨익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가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것만으로도 눈이 황홀하고 무대가 꽉 차 보일 텐데, 그런 보컬까지 얹으면 어떻겠나.

아마 데뷔를 미루지 않았다면, 내가 그리는 그 매력적인 무대는 꽤나 나중에서야 보게 됐을지도 모른다.

첫 컨셉이 다음 컨셉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으니, 얼마간은 맑고 여리여리한 목소리로 노래해야 했을지도 모르지.

보컬을 죽인 댄스 위주의 무대를 꾸리면서.

“While we young we getting high. We were getting high.”

노래가 다 끝나고.

그녀와 나는 함께 미소 짓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잘 들었어요. 역시 엄청 좋던데요.”

“감사합니다. 좋게 들어주시는 게 보여서 부를 때도 기분 좋았어요.”

그렇겠지. 여기에 우리 둘밖에 없어서 내 표정만 보일 텐데 그 표정이 엄청 밝았을 테니까.

나는 말을 좀 더 덧붙였다.

이제 더 도움이 되는 말을 해야지.

“제가 전문적으로 보컬 트레이닝을 하지는 못해서 기술적으로 어떻게 부르라 말은 못하겠어요. 보컬이란 게 워낙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다뤄야 하는 거기도 하고. 그런데 현지 씨가 훨씬 더 잘할 수 있는 방향은 알아요.”

“말씀해주신 재즈랑 댄스스포츠처럼요?”

그래, 댄스를 봐줬던 것처럼.

이미 그녀의 눈빛에는 신뢰로 가득했다.

원래, 보컬을 바꾸는 건 엄청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문제라서 혹여 불안해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다.

이쪽이 정답인 건 확실하니, 내 말을 확실히 믿고 따라주는 편이 훨씬 좋지.

불안한 마음으로 연습하면 긴장해서 역효과가 발생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어깨나 몸이 경직되거나 목에 힘이 들어간다거나 하는.

“좀 더 힘 있고 단단한 목소리를 내셨으면 해요. 현지 씨 노래는 그때 가장 빛날 거거든요.”

“어느 정도로 힘 있게요?”

“딱 어느 정도라고 말하진 못하겠어요. 대신 매일 연습하시는 거 녹음해서 보내주세요. 그때그때 바로 말씀드릴게요.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고요. 목에 힘 들어갈 수도 있고, 그러면 목 상할 수도 있으니까. 이 부분은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시겠죠?”

당연히 보컬 트레이너의 도움을 받는 게 좋기 때문에, 어차피 아버지께 말씀드릴 거긴 하다.

그럼 아버지가 어떻게 해서 보컬 트레이너에게 전달하겠지.

트레이너가 그녀의 잠재력을 못 알아봐서 진정 납득을 못 할 수도 있지만, 기획사에선 흔히 있는 일.

아마 개발되어가는 보컬을 듣다 보면 직접 훈련을 시켜준 그 당사자 또한 깜짝깜짝 놀랄 것이다.

생각보다 훨씬 더 매력적일 테니까.

“네, 열심히 할게요.”

매일매일 그녀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선물을 기다리는 느낌. 그것도 점점 더 좋아지는 선물을 매일매일 받을 수 있다니.

역시 이 직업은 내게 천직이 맞았다.

이거 아니면 이런 재미를 어디서 누려?

***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유현지의 노래 선물을 받기 시작한지 며칠이 지났을 때.

채희와 드라마 배우들이 함께 출연한 ‘짝꿍끼리’가 방송되는 날이 다가왔다.

“잘 나왔겠죠? 편집 얼마나 됐을까요? 저번 예능에선 엄청 편집되던데.”

채희와 나, 그리고 한실장님과 윤팀장님까지.

우리는 커다란 TV가 있는 휴게실에서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의 물음에 덤덤하게 대답했다.

“편집 엄청 되겠지.”

“정말요!? 재밌었던 것 같은데? 오빠도 그때 방송 잘 나올 것 같다고 했었잖아요!”

“너 말고, 다른 사람들. 편집 엄청 될 것 같다고.”

이어진 내 말에 비로소 웃음 짓는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 엄청 편집될 거라니까 웃네?”

“···안 웃었는데요? 저 나쁜 사람 아닌데요.”

“와. 이젠 대놓고 거짓말까지 해?”

“안 웃었다니까요? 생사람 잡지 마세요.”

내 눈을 피한 그녀가 내 앞에 놓인 노트북을 빼앗아 자기 앞으로 가져갔다.

방송 전 반응 모니터링 중이었는데.

“내놔.”

“저도 모니터링하는 거예요.”

사실 그냥 할 말이 없어서 화풀이를 하는 게 분명했다.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핸드폰으로 포털을 켰을 때, 태블릿을 보던 한실장님이 말하셨다.

“역시 드라마가 잘 되니까 반응이 다 좋네. 어제 나온 선공개 영상 조회수가 벌써 18만이야.”

윤팀장님도 덧붙여 말하셨다.

“예능도 엄청 잘 나왔다며. 얼마나 잘했으면 제작진들이 기대해도 된다고 연락이 와? 하하! 이러다가 다음주부터 시청률 갑자기 팍 뛰는 거 아냐?”

이번주에 방송된 5, 6회의 시청률은 10%와 11.5%.

1회 시청률이 6%였다는 걸 감안하면, 우리는 이미 매주마다 시청률이 팍팍 뛰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또 한 번 추진력을 얻을 수 있게 생겼다.

드라마라는 게 한 해에도 화제작들이 여럿 쏟아지곤 하지만, 반대로 가뭄일 때도 많다.

다행히 지금 시기엔 30%가 넘거나 20%가 넘어가는 드라마가 없으니, 흐름만 제대로 타게 되면 이번 분기는 우리 드라마가 완전히 평정할 수도 있다.

“어! 이제 시작한다! 저거 봐요! 이제 시작해요!”

“응. 나도 눈이 멀쩡히 달려있어서 눈에 잘 보이고 있어.”

“···오빠 보면 그것도 정말 재능인 것 같아요. 어떻게 입만 열면 그렇게 꿀밤을 유발해요?”

재밌잖아. 이런 반응 보는 거.

아무튼 우리는 인터넷 반응을 실시간으로 살피며 방송을 보기 시작했는데.

오프닝이 끝난 바로 다음.

나와 작가의 대화를 몰래 찍은 영상이 나오고 채희가 문제를 맞추기 시작했을 때.

-각별은 무슨 각별이요. 그냥 하다 보니까 하는 거지.

그날 현장에 가지 않았던 윤팀장님과, 휴게실에 있던 직원들의 입에서 동시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또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얘 뭐냐?ㅋㅋㅋ

-정채희 원래 이런 캐릭터였음?ㅋㅋㅋㅋㅋ 드라마랑 완전 다르넼ㅋㅋ 귀여워

온라인 상에서의 반응 역시 뜨거웠다.

물론 내 핸드폰에서도 불이 나고 있었고.

몇 안 되는 친구들을 비롯해, 전화번호만 아는 사람들까지 연락이 한꺼번에 와르르 몰려왔다.

아, 송하연한테도 톡이 왔네?

그래도 지금은 일일이 답장을 할 수 없으니, 나는 핸드폰을 잠시 무음으로 돌렸다.

지금 중요한 건 TV에 나오고 있는 내 모습에 대한 주변인들의 반응이 아니라, 방송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이니까.

그런데.

-아, 그럼 둘이 각별하겠네요?

-각별하죠. 처음 맡아서 그런 게 아니라 애가 워낙 착하고 순수하거든요.

-채희 씨가 나빴네! 매니저분 겉도 촉촉하시잖아!”

이미 드라마와 ‘짝꿍끼리’의 관련 키워드들로 가득했던 커뮤니티에.

‘겉바속촉 매니저’, ‘겉촉속촉 매니저’라는 키워드 또한 함께 떠오르기 시작했다.

젠장.

-틀렸네요. 맞출 줄 알았는데.

그런데 뭐, 괜찮을 것 같다.

정답을 듣고는 잔뜩 기뻐하며 환하게 웃음 짓고 있는 채희의 얼굴이, 화면에 큼지막하게 잡히고 있었으니까.

저걸 보고 누가 나한테 관심을 가져?

“와! 진짜 편집 엄청 잘하셨다!”

“네 위주라서 더 잘해보이는 거겠지.”

“이제 곧 오빠 위주도 나올 건데요? 퀴즈 다 맞히셨잖아요. 서른 개나. 저 그거 보고 진짜 놀랐는데. 어떻게 그걸 다 맞혀요? 신기해.”

아, 맞다.

그게 있었지?

< 이렇게 신뢰를 보내주면 나도 힘이 날 수밖에 없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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