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기작은? >
방송이 모두 끝나고도 우리는 퇴근을 할 수 없었다.
채희를 집에 데려다준 뒤에도 다시 회사에 와서 모니터링을 해야 했으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내가 방송에 나왔다 보니, 그리고 반응도 좋다 보니 이걸 내가 하는 게 맞나 싶다.
얼굴이 너무 화끈거려.
[정채희-매니저 환상의 짝꿍, ‘짝꿍끼리’에서 대활약!]
[정채희의 겉바속촉 매니저, 연예계 척척박사. 드라마에 긍정적 영향 주나?]
이런 기사들은 예사였고.
-ㅋㅋ정채희ㅋㅋㅋ 매니저도 매력있네 평소에도 엄청 친한가 봄.
-완전 호감이다ㅋㅋ 정채희가 매니저 문제 맞출 때 표정이 킬포!
-아니 근데 매니저는 저걸 다 어떻게 아는 거냐;;;
-채희 틀렸는데 왜 좋아하냐곸ㅋㅋㅋ 귀여웤ㅋㅋㅋㅋㅋ
-츤데레 아님? 매니저가 앞에서만 장난치고 뒤에선 엄청 좋은 말만 해주나보네··· 쏘스윗
댓글은 나와 관련되어 있는 얘기들로 한가득이었다.
나에게 포커스가 맞춰졌든 채희에게 포커스가 맞춰졌든, 아무튼 우리가 함께 나온 장면들이 계속해서 언급되고 있었다.
[송하연] [ㅋㅋㅋㅋ제 문제도 맞추셨네요? 방송 잘 봤어요! 재밌다ㅋㅋ 근데 실물이 훨씬 나아요!!]
[유현지] [다시보기로 봤어요. 엄청 재밌었어요.]
“···.”
고맙다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이 메시지들에도 아직까지 답장을 못 하고 있었다.
“어휴.”
“왜 한숨이야. 반응 핫한 거 보니까 너무 좋아? 큭큭.”
“그럴 리가요. 살짝 후회중이에요.”
한실장님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나를 놀려댔다.
빨리 승진하든가 해야지.
아니, 윤팀장님한테 하는 거 보니까 승진한다 해도 놀림당하겠구나.
“예, 작가님. 예,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하하. 예, 빨리 연락드릴게요. 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그저 윤팀장님 생각만 했을 뿐인데, 방송 끝나고 바로 나가셨던 팀장님이 다시 사무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한 손에는 테이크 아웃 커피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전화를 받으면서.
전화를 끊은 그가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한울아, 너 예능해볼래?”
“예?”
나를 힐끗 쳐다본 그가 자리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재밌겠다는 듯이.
“왜? 별로야? 채희랑 같이 출연제의 들어온 게 벌써 한둘이 아닌데. 한 번 해봐. 방송 보니까 잘하더만. 반응도 좋고.”
한실장님이 옆에서 피식 웃으며 거들었다.
“그래, 이런 화제는 대중들한테도 잘 먹혀서 채희한테도 좋아. 어차피 당분간 할 것도 없겠다, 이참에 인지도나 확 끌어올리게.”
할 게 없긴.
지금은 유현지를 봐줘도 시간이 많이 남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본격적으로 방송을 하러 다니기 시작하면 유현지를 봐줄 시간이 잘 나지 않을 것이다.
데뷔 미룬 염치가 있지, 난 그렇게는 못한다.
또한 굳이 그게 아니어도 난 방송 생각이 없다.
내가 방송을 왜 해.
‘어차피 채희는 연기로 다 씹어먹게 될 텐데.’
채희나 다른 출연자들이 드라마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서 예능을 하고 있긴 한데, 나까지 본격적으로 하는 건 오바다.
드라마에 도움이 될 화제도 크게 얻었겠다, 이젠 예능에 신경을 쏟는 대신 영화라도 알아보는 편이 나을 터.
나는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전 체질에 안 맞는 것 같아요.”
“잘하면 연예인 될 수도 있는데, 싫어?”
연예인? 별로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정채희에 유현지까지 내 손 안에 들어왔으니, 이제 그녀들을 키우며 매니저로 쭉쭉 치고 올라갈 기반은 거진 다 다진 거나 마찬가지.
시간이 조금 지나면 이대로 대표까지 쭉 직행할 수도 있는데 내가 연예인을 굳이 왜.
관심 없다.
“전 매니저로 만족합니다.”
“하하. 그럼 됐고.”
윤팀장님이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채희의 대중적 인지도를 더 높인다느니 하며 좀 더 말해볼 줄 알았는데 의외로 포기가 빠르시다.
그리고 그 이유는 곧장 밝혀졌다.
“채희한테 들어온 게 예능만이 아냐. 벌써 영화 들어왔다.”
“영화요?”
눈이 번쩍 뜨이는 말이었다.
마침 영화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벌써 들어왔다고 하니 어찌 솔깃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직 시나리오는 못 봤는데, 그래도 이영진 감독님 영화야.”
“이영진 감독님이요!?”
한실장님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이영진 감독.
벌써 4편의 상업영화를 성공시킨 국내의 거장 중 한 명이자, 만드는 영화마다 웰메이드, 그리고 최소한 중박 이상은 뽑아내는 감독님이었다.
더 이상 좋은 걸 고르는 건 욕심.
‘이영진 정도면 최고지!’
더 골라봐야 시간낭비다.
우리는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시나리오도 곧 퀵으로 도착한다고 하고.
“장르는 뭔데요? 채희 역할은?”
한실장님의 질문에 팀장님이 답했다.
“범죄영화래. 청불로 하지도 않을 거라고 하고, 채희도 분량 짱짱한 조연.”
“이야. 퍼펙트하네요! 범죄영화 잘 먹히지! 유치하지도 않고! 거기다 15금이면 좋죠!”
희희낙락하고 있는 윤팀장과 한실장님.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범죄영화는 국내에서 굉장히 잘 먹히는 장르 중 하나였다.
게다가 채희의 분량도 짱짱하다고 하고.
자세한 건 시나리오를 봐야 알겠지만, 그래도 이미 마음은 반 넘게 그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퀵인데 왜 이렇게 느려? 빨리 좀 왔으면 좋겠네.’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기대감을 키웠다.
***
드라마 <헌팅 포차에서 만난 사이>가 편집되고 있는 중소 제작사 ‘시리즈 마스터’.
드라마에 대해 계속해서 좋은 반응이 나오고, 배우들이 나간 예능도 큰 화제가 되고 있었으니, 구선학 감독은 피곤한 줄도 모르고 작업을 이어갔다.
물론 혼자서만 계속 편집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가이드라인만 짜주는 건 더더욱 아니었고.
“감독님, 좀 주무세요. 이제 제가 이어서 할게요. 한숨 푹 자고 나니까 정신이 맑아지네요.”
“그럼 그럴래? 나도 좀 피곤하네.”
그렇게 편집실을 나선 구선학 감독은 숙직실로 가는 길에 시선을 한쪽으로 빼앗겼다.
“연락드릴게요, 작가님.”
“네, 잘 부탁드려요. 채희 씨 꼭 캐스팅해주세요. 주연으로 채희 씨 섭외만 되면 다른 건 다 양보할 수 있어요.”
“어휴. 알죠, 그럼요. 저희도 정채희 배우님 되게 좋아해요. 지금도 배우님 덕 엄청 보고 있는데요.”
정채희? 그 이름에 관심이 끌렸다.
정채희를 주연으로 쓰겠다는 작가가 누굴까.
직원의 살가운 반응으로 보아 대본도 잘 뽑힌 모양인데.
작가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구선학 감독은 숙직실로 향하던 발걸음을 잠시 미루곤, 그 직원에게로 다가갔다.
“아, 감독님.”
“방금 누구예요?”
“조수연 작가님이에요. 채희 씨 데뷔한 웹드라마 쓰신 분이요. 이번엔 드라마 대본 들고 오셨는데, 이것도 엄청 좋네요. 한 번 읽어보시겠어요?”
직원은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을 빛내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구선학 감독이 드라마에 도전해보기 위해 이 제작사와 계약했을 뿐, 애초부터 드라마 하나가 끝나면 다시 영화를 하러 떠난다고 못 박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영화 만들 수 있는데.
만일 이 대본이 구선학 감독의 마음에 들어, 드라마 한 편을 더 만들게 된다면 제작사로서는 대박!
대본도 잘빠졌을뿐더러, 조수연 작가와 구선학 감독 모두가 정채희를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
정채희만 섭외된다면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었다.
감독은 직원이 건네준 대본을 받아들면서 물었다.
“계약은 했어요?”
“하하, 작가님께서 저희랑 계약하고 싶어서 오신 거예요.”
“아직 안 했다는 소리네요?”
“···거의 한 거나 다름없어요. 작가님이 대본 보내신 다음에 저희가 연락드려서 오신 거고, 이제 도장 찍기 직전이에요.”
직원의 말은 한 귀로 흘리며 대본을 살폈다.
일단 시놉시스부터.
‘괜찮은데?’
구선학 감독은 이 작가가 쓴 웹드라마를 보고 정채희를 골랐었다.
작가의 스타일을 알기 때문인지, 시놉과 대본이 머릿속에 더 잘 들어오고, 더 자세하게 그려졌다.
사락, 사락.
종잇장 넘기는 소리가 한두 번 더 들리더니, 감독은 말했다.
“혹시 아이스 아메리카노 좀··· 아니, 진한 걸로 부탁드려도 돼요?”
“···! 다, 당연하죠! 저기 회의실에서 편히 보고 계세요.”
구 감독은 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대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에스프레소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지만, 그는 커피에는 한 입도 대지 않았다.
굳이 피로를 이겨내려 노력하지 않아도 절로 정신이 깨어나고 있었으니까.
“괜찮아···. 너무 괜찮아.”
그렇게 마지막 장을 덮으며 1, 2회의 대본을 모두 읽었을 때.
구 감독의 얼굴엔 깊은 고민이 자리하게 되었다.
의자에 푹 몸을 기댄 채, 미간을 찌푸리고 머리를 굴렸다.
이번 드라마만 마치고 영화를 하려 했는데, 이 작품도 하고 싶어졌다.
어차피 가지고 있는 시나리오도 얼개만 짜둔 상태였을 뿐이니, 급할 것도 없긴 하지만.
어쨌든 영화를 하고 싶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영화를 하고 싶으면 영화를 하면 된다.
또한.
이 작품을 하고 싶으면 이 작품을 하면 된다.
‘역시 난 시나리오는 쓰면 안 되겠군.’
얼개만 짜뒀던 시나리오는 이거에 비하면 쓰레기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이 작품을 영화에 맞게 각색하는 것.
구 감독은 곧바로 이 제작사의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퇴근한 지 고작 1시간밖에 안 됐으나, 대표는 칼같이 전화를 받았다.
-예, 감독님.
“차기작 문제로 상의할 게 있는데 언제가 괜찮을까.”
-지금!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얼마 안 걸립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
소회의실.
나와 한실장님, 그리고 윤팀장님은 아까 도착한 이영진 감독의 시나리오를 다 살피고 본격적으로 얘기를 나눴다.
포문을 연 건 윤팀장님.
그는 환한 얼굴로 말했다.
“재밌는데? 채희 분량도 많아. 거기다 연출이 이영진 감독이다? 크으! 게임 끝이지!”
한실장님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면서도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을 말했다.
“근데 분량에 비해서 별로 비중이 없는데요?”
한실장님이 정확히 봤다.
분명히 재밌고, 잘될 작품인데다, 채희가 맡을 역할의 분량도 많다.
연출도 이영진 감독이니 더 말할 것도 없겠지.
그런데.
‘이건 그냥 꽃병풍이야.’
주인공은 경찰의 탈을 쓴 범죄자.
채희가 맡은 역할은 주인공의 동료 경찰.
역할과 분량은 괜찮은데, 이 영화는 거의 주인공 원톱 영화였다.
물론 주인공 외에도 매력적인 캐릭터는 있었지만, 문제는 그게 채희가 맡을 역할은 아니라는 것.
‘마음에 안 들어.’
이런 내 표정을 보곤 윤팀장님이 물으셨다.
“넌 별로야?”
난 그 물음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쯤이면 내 의견을 강하게 내도 될 것 같다.
“꽃병풍이에요. 시나리오 서사도 좋고, 몇몇 캐릭터는 매력까지 갖추고 있는데 채희 역할은 그게 아니에요. 정말 병풍,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주인공에 대한 것만 기억에 남고 채희는 예쁘게 나온 장면만 머리에 남을 겁니다. 이건 아니에요. 영화는 충분히 잘될 수 있는데, 채희한테는 영양가가 없어요.”
“영양가가 없다?”
한실장은 내 말에 동조했다.
“저도 한울이랑 같은 생각이요. 그래도 뭐··· 길게 보면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닌 것도 맞죠. 필모도 그렇고, 영화 데뷔도 그렇고, 잘하면 이영진 감독 차기작에 또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그의 말은 틀렸다.
길게 보면 더더욱!
‘채희는 선택받으려고 매달릴 필요가 없지.’
상대가 제 아무리 거장이라 해도.
채희는 오히려 선택을 해야 하는 위치로 올라가야 한다.
고로, 이 길은 틀렸다.
차라리 덜 성공하더라도, 관객들의 머릿속에 진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작품으로.
<캠퍼스 낭만이 원래 이런 거야?>와 <헌팅 포차에서 만난 사이>를 이어, 채희의 매력을 폭발시킬 수 있는 작품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이쪽이었다.
“음. 본부장님께 보고드려야겠네. 우리 본부장님 안목이 또 굉장하시잖아. 웹드라마랑 지금 이 드라마까지 다 본부장님이 고르신 거니까 믿고 맡기면 될 거야. 아무튼 오늘은 다들 퇴근하고 내일 다시 회의하자고.”
나를 칭찬하신 팀장님이 해산을 지시했다.
“예.”
“네.”
그렇게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지이잉- 지이잉- 한실장님의 전화가 울렸고.
“구선학 감독님인데요?”
우리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예, 감독님. 전화 받았습니다.”
전화를 받는 한실장님의 눈은 점점 동그랗게 그 크기를 키웠다.
나와 윤팀장님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예, 아직 회사입니다. 예, 방금 하나 검토했습니다. 예. 네네, 괜찮습니다. 네, 네.”
전화를 끊은 한실장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지금 한창 드라마 후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을 감독님의 전화.
그리고 한실장님의 표정까지.
“왜. 뭔데.”
윤팀장은 그를 닦달했고, 나 또한 마음이 급했다.
뭔가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뭐지? 누가 사고라도 쳤나?
우리가 불안하게 쳐다보는데, 한실장은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방금 시나리오 검토 하나 했다니까 감독님이 아주 몸이 달으셨는데요?”
우리의 의문을 읽은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채희랑 영화 찍고 싶으시대요. 그리고 지금 바로 여기로 출발하시겠다네요? 제작사 대표님이랑 조수연 작가님이랑 같이.”
< 차기작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