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동창회(2)
* * *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까지 모두 끝낸 뒤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털썩
"내일 먹을 고기를 오늘 먹었으니까 내일을 뭘 먹어야 되나..."
침대 위로 몸을 던지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이것도 형편에 여유가 있으니까 하는 생각이지 옛날 같았으면 식사는 무슨 어떤 라면을 먹을까를 고민하고 있었을텐데. 이럴 때 보면 참 동거하기 잘한 것 같다.
Rrrrr
"응?"
그렇게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뒤지고 있던 중 전화가 걸려 왔다.
[김창규]
고등학교 친구 녀석이다.
그렇게 친하지는 않지만 여럿이 모여 다닐 때 있던 그런 친구.
잠시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보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얘가 나한테 먼저 전화한 적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은데'
혹시 모르지 내가 모르는 내가 창규랑 친했을지도 모르니.
"여보세요"
[어 진성아! 되게 오랜만이다!]
"어 그래. 무슨일이야?"
[별건 아니고 우리 얘들끼리 모여서 동창회 하기로 했잖아? 그래서 말인데...]
나는 조용히 창규의 말을 듣고 일단 알겠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뚝
"동창회라..."
말이 동창회지 그렇게 거추장한 건 아니고 그냥 친한 얘들끼리 놀고먹고 하는 자리다.
하기야 언제 한번 얘들도 만나기는 해야 했는데 이번에 만나서 어떻게 성격들이 바뀌었는지 살펴보면 될 것 같다.
'시간도 딱 적절하게 호프집 알바가 없는 날이네'
보니까 저녁 겸 술을 마시는 자리 같은데 과연 얘들이 내가 알던 방식대로 술만 퍼마실지, 아니면 다른 행동을 보여 줄지.
기대가 됐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감도 없지 않았다.
걔네들 처지에선 나만 바뀐 셈이 된 것이었으니 오히려 지금의 나를 어색하게 볼지도 모르겠다.
"... 담배나 한대 필까?"
분리수거도 할 겸 방에서 뒹굴거리는 돼지랑 같이 산책이나 해야겠다.
***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동창회 날짜가 다가왔다.
"밥 다 차려놨으니까 배달 시키지 말고 잘 먹고"
"알겠어"
"다른 건 몰라도 반찬은 다 먹으면 꼭 냉장고에 넣라? 여유가 되면 밥그릇도 설거지통에 넣고..."
"아오 다 알겠으니까 얼릉 가기나 해. 무슨 내가 애새끼도 아니고 뭐 이리 걱정이 많아?"
은하가 귀찮다는 듯 내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지딴에선 나를 안심시켜 주려고 한 행동 같은데 영 탐탁지가 않았다.
'끄응... 뭐 별일이야 생기겠어'
"... 아무튼 그럼 나갔다올게"
"엉. 잘 다녀와~"
쾅
"..."
굳게 닫힌 문을 뒤로하고 나는 오피스텔을 빠져나왔다.
친구들끼리 만나기로 한 장소는 역전이 되기 전에도 자주 갔었던 술집. 하긴 그곳은 남녀 성비를 불문하고 많이들 가는 곳이었으니 납득은 갔다.
'얘들은 어떻게 변했으려나'
연락이야 뭐 간간이 하는 편이었지만 이렇게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기분이 묘했다.
나는 부푼 가슴을 떠안은 체 술집으로 들어갔다.
딸랑
"어 진성아! 이쪽이야!"
"우와 다른 얘들도 오랜만에 보는데 진성이 너는 진짜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익숙한 얼굴들과 뇌리에 박혀 있는 목소리들. 역전이 되기 전날 미친 듯이 술을 퍼부었던 그 새끼들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변한 건 별로 없어 보이는데'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였을 뿐.
"그래서 그년이 어떻게 했다고?"
"나 하고 바람피우는 남자 사이에서 쩔쩔매다 결국 그놈한테 가더라... 나쁜 새끼..."
"진짜 쌍년이네! 어떻게 남자 친구가 있는데 바람을 필 수 있는 거야?!"
"주영이 마음고생 심했겠다..."
분명히 술집에 들어오기 전 단단히 각오를 한 나였지만 저 지랄 같은 대화법을 실제로 듣게 되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딸깍
'자몽 소주는 또 뭐야? 이슬 말곤 내 인생에 소주는 없다 라고 외쳤던 새끼들이'
조용히 술잔을 내려놨다.
예전에는 술이 안 맞아서 못 먹었는데 이제는 맛대가리가 없어서 마시질 못하겠다.
뭐 어쨌든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뜻하지 않는 일이 발생했다.
"얘들아~ 저쪽 테이블에서 같이 합석하자는데?"
"어디? 저기 여자들?"
"우와 저쪽에 피어싱한 여자 진짜 예쁘다..."
친구들의 호들갑에 나 역시 합석 요청이 들어온 테이블을 바라봤다.
수려한 외모와 값비싸 보이는 옷들로 치장한 여자들. 이성을 꼬시는데에 모든 조건을 가진 리얼 알파 피메일들이었다.
"진성아. 너도 괜찮은 거지?"
"... 마음대로 해라"
니들 알아서 하라는 말투로 나는 포크로 메론을 찔러 입속에 넣었다.
솔직히 여자들이랑 합석하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지만 내가 반대를 해도 어차피 결과는 정해진 것 같았다. 지금 당장 얘들 얼굴만 봐도 눈빛이 반짝거리는데 뭐 내가 어쩌겠어 그냥 따라야겠지.
"그러면 저쪽에서 일로 오는 거니까 옆에 테이블 좀 붙이고 해서..."
인원도 딱 알맞게 4대4였다. 역전이 되기 전엔 무슨 개지랄을 해도 합석 한번 성사되지 않았는데.
'내가 아니라 이 새끼들이 역전이 됐어야 했는데'
아마 그랬다면 날라다니고도 남았을 것이다. 무슨 입만 열면 섹스 섹스 거리던 얘들이었으니.
사장님께 허락을 받고 테이블과 의자를 합쳐 우리는 서로가 마주 볼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었다.
그렇게 여자들이 착석하고 꽤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빈 술병이 빠른 속도로 늘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진...성? 이었나? 이쪽분은 아까부터 한마디도 안하시네..."
"아하하... 진성이가 낯을 좀 가리는 성격이여가지고..."
"에이... 그러면 재미가 없죠. 그러시지 마시고 저희 친구해요. 네?!"
"..."
친구는 무슨, 나는 말없이 빈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조용히 술을 마신 뒤 패딩을 집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화장실 좀 다녀올게"
"어? 으응. 다녀와"
4명이었던 인원이 8명으로, 그것도 남녀 혼합으로 늘어나니 자리가 혼잡스러웠다.
'이렇게 보면 나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주머니에 있는 담배를 만지작거렸다. 나가서 담배라도 펴야 답답함이 해소될 것 같았다.
딸랑
"어으... 존나 춥네"
패딩을 뚫고 들어오는 추위에 몸을 벌벌 떨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얘들이랑 있으면서 혼자 담배피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이렇게 혼자 피게 되니 기분이 참 묘했다.
'다들 꼴초였는데... 새끼들 갱생 돼 버렸네'
"후우..."
알 수 없는 쓸쓸함을 느끼며 한 개비를 다 태우고 다시 곽에서 담배를 꺼냈다.
"저도 한 개비 주실래요?"
"워매 시발!"
갑작스러운 터치에 나는 화들짝 놀라면서 담배를 떨어뜨렸다.
"아... 죄송해요. 제가 놀래켰나보네요"
"..."
놀람이 가시니 곧바로 짜증이 몰려왔다.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보니 아까 합석한 여자 중 피어싱을 한 여자가 서 있었다.
"... 언제부터 있으셨어요?"
"담배에 불을 붙일 때부터? 어쩌다 보니 계속 보게 됐네"
"..."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는 피어싱년에 나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이 미친놈. 그러니까 내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지도 일어났다는 거 아니야?'
아니 시발 화장실 간다고 했는데 그걸 왜 따라오는 거지? 이거 남자의 기준으로 볼 때 위험한 거 아니야?
오해의 요지도 없었다. 당장 저 눈빛만 봐도 그때 헬스장에서의 양아치 새끼들이랑 똑같은데.
"담배 한 개비만 주세요~ 제가 담배를 두고 와가지고"
"... 허참"
사람이 이렇게 뻔뻔할 수가. 흡연자가 담배를 두고 온다는 건 무슨 말같지도 않은 소리인지.
잠시 여자를 째려보다 담배가 존나 마려워져서 결국, 그녀에게 담배를 건네줬다.
"불같이 붙이실례요?"
"... 됐습니다. 여기 쓰세요"
지랄도 정도 것 해야지.
불을 붙인 피어싱녀에게 라이터를 돌려봤고 어쩌다 보니 같이 담배를 피게 되었다.
"으음... 독한 거 피시네요? 남자들은 이런 거 안피던데"
"... 목적이 뭐예요? 남의 뒷꽁무늬나 따라오고"
"뒷꽁무늬라... 뭐 그렇다면 그런 거죠"
내 말에 여자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더 이상 말을 하는 게 답이 없다 판단해서 나는 빠르게 담배를 태웠고 상대방도 내 템포에 맞춰 여유롭게 담배를 태웠다.
그렇게 담배를 모두 피우고 이만 돌아가려고 할 때.
"혹시 여자 친구 없으세요?"
피어싱한 년이 그윽한 눈빛으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
어처구니가 없던 나는 여자를 노려봤고 내가 노려보든 말든 여자는 능글스러운 미소로 나를 바라봤다.
"저 그쪽에게 관심 있는데, 저희 번호 교환 안할레요?"
"... 저 여자 친구 있어요"
"에이... 골기퍼가 있다고 골이 안 들어 가는 건 아니잖아요"
'이런 미친 새끼'
"아니 시발 내가 너에게 관심이 없다고요"
"욕하는 것도 어쩜 이리 섹시한지..."
어쩜 한마디 한마디가 이렇게 주옥 같을 수 있는지. 짜증도 짜증이지만 이제는 하도 이런 일들이 많아 귀찮음이 앞섰다.
"그렇지 않아요? 여자 친구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훨씬 나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
자신 있게 말하는 그녀에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어 헛웃음이 지어졌다.
문득 나도 모르게 은하를 떠올렸다.
'자기가 은하보다 낫다고?'
전혀 아니다. 적어도 서은하는 이런 추잡한 짓은 하지 않으니까. 겉모습으로만 판단 해도 은하가 훨씬 낫고 인성으로도... 뭐 저 여자 보단 나았다.
"어때요? 저랑 만날 생각 없어요?"
'시발련이 싫다니까 몇 번을 처 말하는 거야'
"아니면 서로 번호라도 교환하는 게..."
"시발 좀 꺼지라고!"
결국 그렇게 대치를 하다 나는 힘으로 여자를 밀고 술집으로 들어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