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동창회
* * *
어이가 없다 어이가 없어. 내가 무슨 입만 열면 욕이 나오는 사람인 줄 아는 건가?
'나를 얼마나 좆으로 보면 이딴 내기를 제안하는 거지?'
"그럼 지금부터 시작이다? 이제 나한테 욕하면 안 되는 거야?"
"... 쫄리냐? 왜 이렇게 말을 질질끌어"
"... 말하는 꼬랑지하고는. 그렇게 나를 비하하는 표현도 하면 안 되는 거 알지?"
"..."
나는 조용히 은하를 바라봤다.
'이게 은근슬쩍 조건은 추가하네?'
"그래 뭐. 내가 소원권을 어떻게 쓰는지 함 두고 보자"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내가 질 일이 없을텐데. 그냥 괜히 불안 해가지고 저런 거겠지.
"... 됐고 나가서 담배나 한대 피러 가자"
"내가 왜 병신아?"
"..."
"..."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은하의 말에 내가 반응하지 않자 은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봐봐. 얼마나 좋아 이게. 물론 방금 건 내가 일부러 욕을 했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참으니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잖아?"
"...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가려고 일어났잖아 시꺄. 나 손만 씻고 올 테니까 옷이나 입고 있어"
그러면서 은하는 괜히 내 눈치를 보면서 잽싸게 화장실로 들어갔다.
"..."
나는 멍하니 은하가 굳게 닫힌 화장실 문을 바라봤다.
평소에도 얄미운 새끼였는데 이렇게 보복할 수 없으니 특유의 깐족거림이 배가 되는 것 같았다.
"... 시발 버틸 수 있겠지?"
분명히 방금까지만 해도 해볼 만 하다 생각했는데 갑자기 자신감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다.
이게 참 내가 이렇게 인내심이 없는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당분간 일주일 동안은 담배만 존나 필 것 같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 에이씨 어떻게든 되겠지'
단순하게 생각하자. 말이야 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보내면 되는 것이니.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오피스텔 앞에 있는 정자에서 같이 담배를 폈다.
"... 후우 이것도 이제 좀 끊어야 되는데"
한 개비를 다 태우고 다시 담배를 꺼내 들며 내가 중얼거렸다.
"... 넌 죽어도 못 끊을 것 같은데...?"
"... 내가 진짜 군대만 아니었어도 담배 같은 건 펴볼일이 없었을 텐데..."
"... 군대? 군대랑 담배랑 무슨 상관이야?"
"..."
은하의 말에 나는 조용히 침묵했다.
"... 그냥 뭐 군대 비슷한 환경에서 담배를 배웠다고"
"아~ 난 또 뭐라고..."
내 말에 은하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게 서로 마주 보고 맞담을 피고 있을 때 저기 앞에 어떤 아저씨가 길을 지나가며 우리를 힐끗 쳐다보더니 혀를 끌끌차며 중얼거렸다.
"쯧쯧. 젊은것들이 서로 담배나 피고 있으니 말이야.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요즘은 부부들도 저 모양이니 원"
"..."
내가 아저씨를 뚫어져라 노려보자 아저씨는 움찔거리며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 부부는 무슨. 어이가 없어가지곤. 그렇지 않냐?"
"..."
"...?"
뭐야? 이 새끼... 왜 웃고 있는 거지?
"... 서은하?"
"어? 어어 맞지. 지가 뭔데 이래라저래라야?!"
"..."
"... 헤"
왜 인지를 모르겠지만 갑자기 은하가 실실쪼개기 시작했다.
'...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미친 새끼도 아니고'
에휴 나도 이젠 모르겠다. 원래 이상한 새끼이긴 했지만 얘는 알면 알수록 모르는 부분만 더 늘어나는 기분이라니까?
"다폈어? 그럼 이제 들어갈까?"
"... 한대만 더 피고"
"그래? 그래 뭐"
자연스럽게 담배를 입에 물고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역시 믿을 건 담배 밖에 없다.
***
마침내 종강이 찾아왔다.
더 이상 학교를 갈 일이 없었고 이제 남는 게 시간이었으니 나는 본격적으로 알바 자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호프집 사장님께 다른 시간에 알바를 해도 되냐고 부탁드리고 싶었지만...'
아마 내가 알바하면 은하도 나를 따라서 알바를 할 것 같아 그러지 않기로 했다.
괜히 나 때문에 안 그래도 힘든 주방일을 더 할 수는 없는 일이니 뭐.
차라리 다른 알바를 구하는 게 나도 좋고 은하도 좋을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구한 알바가 바로 과외였다.
과외야 뭐 제대로 해 본적은 없지만 역전이 되기 전 진아와 진아 동생들을 상대로 공부를 알려 준 적이 있는데 생각보다 점수가 괜찮게 나와서 자신은 없지 않았다.
'고1 수학정도는 뭐...'
그래도 그렇게 별다른 걱정은 없으리라 생각한 나였다.
내가 과외를 맞게 된 아이는 다음 년도에 고등학교 입학을 하는 여자아이였다.
보니까 모습도 말끔하고 성격도 털털한 게 다행히 누구처럼 양아치는 아닌 것 같았다.
다만
"... 진짜로 하나도 모르겠다고 나영아?"
"네에~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이후로 수학에 손을 놔가지고요"
"... 그래도 구구단 정도는 보통 저학년 때 다 외우지 않니...?"
"저는 보통 아이가 아니니까요~"
"..."
아이가 머리에 든 게 없어도 너무 없는 아이었다.
'어쩐지... 대학 간판 치곤 급여가 너무 많다고 생각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네'
뭐 상관은 없었다. 차라리 이렇게 백지인 상태에서 공부를 가리키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니 오히려 내 처지에선 더 좋다고 말해야 하는건가?
'... 그래도 뭐 공부 머리만 없을 뿐이지 누구처럼 머리 자체가 아예 없지는 않을 테니까'
내게 과외를 받는 학생. 나영이는 멀뚱히 나를 바라봤다.
"에이 걱정하지 마세요 쌤. 이래 봬도 제가 한다면 하는 여자라서요"
"그럼. 나는 걱정 안해. 우리 한번 열심히 해 보자 나영아"
최대한 미소를 머금으며 나영이에게 말했다.
그래도 공부하겠다는 의지는 보이는 것 같으니 나영이가 노력을 하는 만큼 나 역시 적극적으로 가리키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나영이에게 다음 주까지 구구단을 외우겠다는 숙제를 내주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일단은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기초부터 가르쳐보자. 아직 고등학교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말이야'
소파에 엎어진 체로 초등학교 수학 문제 집을 검색했다.
아예 완전 쌩 기초 지식만 잡혀 있는 상태라 진지하게 문제 집을 찾아보는 나였다.
"... 뭐 하냐?"
은하가 슬그머니 내게 다가왔다.
"응. 다음 주부터 과외가 잡혀가지고"
"과외? 웬 과외?"
"방학이라서 시간도 많은데 이렇게 빌 때 돈 좀 벌어놔야지"
내 말에 은하가 눈을 껌뻑거렸다.
"... 하긴 집에 박혀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편이 낫겠지"
"넌 방학 때 뭐 할 건데?"
"그냥 굼벵이 마냥 집에 틀여 박혀 있을 계획인데?"
"..."
부러운 새끼. 자기는 뭐 돈 따위야 많으니 일 같은 건 안 해도 된다 이런 마인든가?
'... 에휴 어차피 나랑 상관도 없는데 지가 알아서 하겠지'
은근슬쩍 은하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지만 워낙 이런 자잘한 스킨쉽들에 익숙해진 나는 그런 은하를 가만히 냅두고 계속 휴대폰을 뒤적거렸다.
"... 그런데 가르치는 학생이 중학생이냐? 중학교 문제 집을 보고 있네"
"... 이번에 고등학교 입학하는 얜데"
"... 뭐? 근데 왜 1학년 문제 집을 검색하는 거야"
"얘가 공부에 손을 완전히 놨다고 해가지고"
그 말에 은하가 혀를 끌끌거렸다.
"... 쯧. 수고해라. 방학 한번 알차게 보내겠네"
"... 성격이 약간 너랑 비슷한데 넌 어릴 때 어떻게 공부했냐? 너도 과외나 학원 같은 곳을 다녔어?"
"그런 건 하지 않았고... 뭐 그냥 하다 보니까 어떻게든 되더라?"
"... 그러냐?"
하긴 이번 시험에서도 존나 찔끔 공부했는데 시간에 비해 점수는 기가 막히게 나왔으니까.
눈을 게스름하게 뜬 채로 은하를 쳐다 봤다.
외견만 빼면 그냥 평범한 학생인데 왜 얘는 염색을 하고 태닝한 피부에 타투를 했을까?
"... 그래서 언제까지 찾아볼건데. 밥 먹자 밥"
"아니 아까 물어 봤을 때 밖에서 먹고 왔다며"
"또 배고파졌어. 그리고 너도 아직 식사 안 했잖아?"
은하가 칭얼거리며 말했다.
한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배불러 뒤지겠다고 말한 은하였는데 벌써 배가 꺼졌나보다.
잠시 은하를 한심하게 바라보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배 많이 고프냐?"
"엉. 화장실 한번 갔다 오니까 다시 배가고파지네"
이건 또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지.
'... 혼자서 먹는 줄 알고 저녁은 간단하게 해결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내일 먹으려고 재워둔 고기를 지금 구워야겠다.
나 혼자 먹는 거면 모를까 은하도 같이 먹는 거니 맛있는걸 해 줘야겠지.
"고기 볶아줄 테니까 이따 부르면 나와. 또 게임한다고 시간 끌기만해 봐? 걍 혼자서 다 처먹을 테니까"
"우와... 이 돼지 새끼"
"..."
아오 진짜 그 병신 같은 내기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은건데.
'... 시발련. 일주일 뒤에 보자'
입술이 파르르 떨렸지만 꾸욱 참아냈고 내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은하는 입맛을 다시며 방으로 들어갔다.
냉장고에 고히 모셔둔 고기를 꺼내 달궈진 후라이팬 위로 살포시 올려놨다.
치이익
고기 굽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침울했던 내 기분도 연기와 함께 훨훨 퍼지는 듯했다.
21세기 고기반찬 없이는 밥을 먹을 수 없다는 떼쟁이 덕분에 고기 하나만큼은 풍족하게 먹을 수 있었다.
"서은하!! 다 됐으니까 나와!!"
알맞게 구워진 고기를 접시에 옮기고 나는 은하를 불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