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엇갈림
* * *
"... 에휴 이게 맞는 건지"
아직은 이른 시간 때. 더 이상 얘들이랑 함께할 기분이 아니어서 나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먼저 자리를 뜨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과의 자리는 그렇게 파토가 났지만 그렇다고 후회하거나 그런 기분을 들지 않았다.
'다음에 만날 거면 남자 새끼들이니까 술집 말고 어디 카페 같은 곳에서 만나자고 해야지'
술집에서 일하는 내가 술집을 꺼려하게 되다니. 어떻게 보면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지만 나로선 달리 어쩔 방도가 없었다.
딸랑
"어서 오세요"
집에 들어가기 전 담배나 충당할 계획으로 근처 편의점에 들어갔다.
담배를 사고 편의점을 둘러보던 중 편의점 안에 있는 뭔가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기계에서 데워지고 있는 호빵이었다.
"... 저기 이것도 하나... 아니 두 개 주세요"
"아 네. 잠시만요"
나는 멍하니 호빵 기계를 가리켰다.
남아 있는 호빵이 두 개뿐인지라 그냥 두 개를 모두 구입하고 편의점을 나왔다.
"피자 호빵은 처음 사보는데..."
봉지에 담긴 호빵을 보고 중얼거렸다.
하나는 팥이 들어 있는 기본 호빵이고 나머지 하나는 주황색의 빛깔을 띠는 피자 호빵이었다.
내가 호빵은 기본 호빵 밖에 먹어보지를 못해서 맛은 알 수 없었는데 아무렴 뭐 어쩌겠어 호빵이 호빵이겠지.
'이상한 게 들어간 것도 아니고 이름부터가 피자호빵인데 아마 호빵 안에 치즈랑 야채등이 들어 있지 않을까?'
아무튼, 그렇게 고민을 하며 걷는 사이 어느새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철컥
"나왔어"
"..."
집안이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온 나는 호빵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 은하를 찾았다.
'뭐야? 방에 있나?'
집안 어디에도 보이지 않은 은하에 마지막으로 은하의 방 앞으로 갔다.
똑똑
"..."
은하의 방문을 노크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 자나?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이른 데"
현재 시각은 오후 9시. 늦잠을 자고 하루종일 집에서 뒹굴뒹굴거린 돼지가 잠을 자기엔 너무 빠른 시간 때였다.
철컥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은하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석상마냥 몸이 굳어 버렸다.
"하아... 하아...!"
"..."
"아흐으..!! 시바알..."
"..."
컴퓨터에는 이상한 무언가가 이상한 무언가를 하는 영상이 틀어져 있었고 책상 위에는 거칠게 뜯겨진 듯한 휴지가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에 헤드폰을 끼고 컴퓨터 앞에 앉은 은하가, 아랫도리가 휑한 모습으로 은하가... 자기 위로를 하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린 체로 눈가가 야시꾸리하게 풀려있는 은하를 바라봤다.
너무나도 당황스러운 상황에 머릿속이 하얗지는 느낌이 들면서 아무런 생각할 수 없었다.
"... 응? 뭔가 이상한 느낌이...?"
"..."
뭔가 오싹한 느낌을 받았는지 은하가 뒤를 돌아봤다.
"어"
그리고 은하 역시 나를 보고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
"..."
"..."
"..."
조용한 침묵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바라봤다.
그것은 내가 그동안 느꼈던 침묵 중 가장 조용한 침묵이었다.
"... 미안"
쾅
그렇게 어느 정도 정신이 되돌아오고 나는 황급히 방에 나갔다.
"... 아"
재빨리 내방으로 돌아온 나는 얼굴에 화끈거림을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제 은하의 얼굴을 어떻게 보지...'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바지를 벗은 체 열심히 무언가를 만지는 은하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가 않았다.
결국 그날 이후로 나와 은하는 한동안 정말 필요한 말 외에는 아에 대화 자체를 하지 않았고 후에 술한잔과 함께 응어리를 풀긴 풀었지만 서로 간 그때의 상황을 발설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더불어 일주일 동안 욕 안하기 내기 또한 무산이 되어 버렸다.
참고로 그날 사 온 호빵은 은하가 방에서 맛있게 먹었다고 했다.
***
"12월 31일날 시간 되냐고?"
"응. 별다른 일이 없으면 같이 제야의 종이나 같이 보러 가는 게 어떨가 해서..."
어느 이름 모를 맛집. 그곳에서 수아와 점심을 먹던 도중 수아가 제야의 종을 보러 가자며 내게 말했다.
'제야의 종이라...'
"... 추운데 뭐 하러 거까지 가. 그냥 집에서 티비로 보지"
"그래도 의미 있는 날이잖아.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날이기도하고"
수아의 말에 나는 말없이 접시 위에 있는 콩을 뒤적거렸다.
별다른 계획이 없어서 31일날은 그냥 집에서 쉴 생각이었는데 제야의 종이라니.
'이걸 같이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 그래 뭐. 알았어"
"정말? 같이 가는 거야?"
"딱히 할 일도 없고 같이 보러 가자"
내 말에 수아는 눈을 크게 뜨더니 밥 먹는 내내 싱글벙글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어쨌든 그렇게 수아와 약속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야 너 31일날 뭐 하냐?"
"... 왜 또"
"아니 뭐 할 거 없으면 같이 종 치는 거나 보러 가자고"
이게 웬걸 은하 또한 제야의 종을 보러 가자고 내게 제안을 했다.
'이상하다. 무슨 짠 것도 아니고 뭔 만나는 사람마다 종을 보러 가자고 하는 거지?'
혹시 이곳에서 제야의 종이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에 잠깐 은하를 내버려두고 휴대폰으로 검색해봤지만 딱히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결국 그렇다는 건 그냥 같이 놀러 가자는 얘기인데...
"할 것도 없잖아. 같이 가자앙~"
"..."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은하에 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미안한데 그날 선약이 있어가지고"
"아... 그래?"
"엉. 미안하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뭐"
은하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조금만 일찍 말했어도 저 시무룩한 표정을 수아가 짓고 있었을 텐데. 아쉽지만 나로선 뭐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랑 같이 갈 수도 없으니까 말이다.
"됐고 담배나 피러가자"
"... 나 연초 끊었는데?"
"... 뭐?"
담배를 끊었다고? 만성 개 꼴초 새끼인 네가?
스윽
내가 못 믿겠다는 눈으로 은하를 바라보자 은하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대신 이젠 이걸 피지롱~"
"... 뭐야 그건?"
"봐봐... 후으읍"
무슨 작은 박스처럼 생긴 그것을 은하는 입에 물었고 곧이어 은하에 입에서 다량의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내 쪽으로 오는 연기에 나도 모르게 연기를 들이 마셨고 연기에선 달콤한 냄새가 풍겨졌다.
"이거 전자담배야. 앞으로 연초 대신 이거 피려고"
"야이 미친년아! 그렇다고 집에서 담배를 피냐?!"
"아니 이건 방에서 펴도 되는 담배라니까? 그 거지 같은 니코틴 냄새가 하나도 안나잖아"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이건 아니지. 방꼬라지가 시발 누가 보면 불이라도 난 줄 알겠네.
뭉개뭉개 피어오르는 연기에 나는 황급히 베란다 문을 열었다.
"어으... 아무튼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정 집에서 피려면 니 방에서만 피던지 하라고"
"쩝... 알겠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은하가 양팔을 들어 올렸지만 나는 모르는체를 했다.
'아무리 그래도 집에서 피는 건 아니지. 연초도 저렇게까지 연기가 나오지를 않는데'
한편으론 그래도 연초를 끊었다는 은하가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담배중에선 연초가 가장 질이 나쁘니까 말이다.
'나도 연초좀 끊어야 되는데...'
그러면서 물끄러미 은하를 바라봤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은하가 들고 있는 전자담배를 바라봤다.
"... 야 근데 그거 어떻게 피는 거냐?"
"으응? 펴보게?"
"아니 그냥... 궁금해가지고. 연초랑은 뭐가 다를가 해서"
그 말에 은하는 순순히 내게 전자담배를 건네줬다.
"야야 그거 바로 입에다 대고 하게?"
"... 뭐야 이렇게 하는 거 아니야?"
"아니 그래도 내가 사용했던 건데 좀 닦고 하지..."
뭔 상관이야. 입구를 사탕처럼 빠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나오는 연기만 흡입하는 건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딱히 상관은 없는데 뭐 주인이 그러라고 하면 해야겠지'
잠시 은하와 전자담배를 번갈아 바라보다 옷 소매로 전자담배의 입구를 닦았다.
그리고 은하에게 간단하게 사용법을 수여받고 드디어 입속에 전자담배를 넣었는데.
'?!?!?!'
"콜록!! 콜록콜록!!!"
"아이고. 연초처럼 피면 안 된다고 이 바보야"
"아니 이게 무슨... 콜록!!"
달콤한 과일향이 강하게 느껴짐과 동시에 입속에서 기침이 끊이지 않고 연신 내뱉어졌다.
"에잇 시발! 존나게 별로네. 차라리 연초를 피고야 말지"
"그게 처음에만 그렇지 나중에 익숙해지면 괜찮아진다니까?"
"아 몰라. 난 그냥 연초필꺼야"
전자담배를 은하에게 건네면서 목을 만지작거렸다.
전자담배 특유의 증기가 목 안을 살살 긁어서 답답함이 느껴졌다.
"콜록...! 됐고 옷이나 입어. 담배피러 갈 거니까"
"아니 나는 굳이 밖에서 안펴도 되는데..."
"그래서 이 추운 날씨에 나 혼자 외롭게 벌벌 떨면서 담배피라고?"
감각이 예민해져서 그런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내뱉은 나였지만 나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아 했다.
말같지 않는 내 논리의 기가 막힌 은하는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고 나 역시 짜증이 담긴 눈으로 은하를 노려봤다.
"... 알았어. 같이 가 줄게 가"
"에이 씨... 어디서 이상한 장난감이나 들고 와가지고"
그렇게 우리는 오피스텔 밖에 있는 정자에서 맛있게 담배를 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