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상처(2)
* * *
"... 어쨌든 그 새끼들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텁
"...?"
나는 침착하게 이를 갈고 있는 은하의 어깨를 잡았다.
"... 괜한 짓 벌이지 말고 그냥 조용히 넘어가자"
"... 뭐?"
"이제야 찌라시들이 잠잠해지고 있는데 여기서 너가 나선다면 다시 일이 커질 거야"
'굳이 휴학하지 않아도 되는 각이 잡혔는데 알아서 처리하긴 뭘 알아서 처리해?'
내 말에 은하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 봤다.
하긴 은하의 처지에선 이해가 안될 만도 하겠지. 하지만 이건 다음에 벌어질 일이 너무 뻔히 보이잖아.
'휴학을 할 바엔 차라리 학교를 일찍 졸업하는 게 낫지'
"... 진짜 그게 네 뜻이야?"
"엉"
"... 후우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너도 좀 니 몸 좀 간수하고 살아라 시꺄. 이게 뭐냐 진짜..."
결국, 내 부탁을 받아드린 은하였다.
그렇게 사건은 마무리가 되는 듯 해보였고 내일 수업이 끝나자마자 같이 병원에가기로 약속한 후에야 나는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
...
분명히 그랬을 텐데.
"정말 미안 해!!"
"그, 그때는 우리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아! 용서해 줘!!"
어제 술을 마시고 싸웠던 두 여자가 지금 내게 고개를 숙인 체 사과하고 있었다.
"..."
나는 멍하니 고개를 숙인 두 여자를 바라봤다.
***
'설마 은하가 따로 한 소리를 한 건가?'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쟤들이 내게 사과를 할 이유가 이것밖에 없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노란색 머리를 찾기 시작했다.
'... 이상하다...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하지만 은하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쯧쯧. 술도 능력껏 마셔야지 그렇게 무식하게 마셔되니까 일이 벌어지지"
대신에 전혀 생각지 못한 제 3의 인물이 갑자기 판에 등장하였다.
"... 보라선배님?"
"안녕~ 상처는 괜찮고? 그래도 제대로 약은 바른 것 같아 다행이네"
보라선배가 두 여자의 어깨를 누르면서 내게 미소를 지었다.
여자들은 보라선배가 등장하자마자 숨을 팍 죽이며 시선을 깔았고 보라선배는 그런 여자들을 한심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사과는 했니?"
"네, 넷!!"
"그래서 저 후배가 니들 사과받아주디?"
"... 그건..."
선배의 말에 여자들이 조심스럽게 나를 쳐다 봤다.
"... 받기는 했는데..."
"그래? 그럼 잘됐네. 너가 이해 좀 해 줘. 원래 여자란 존재는, 특히 한참 젊을 때의 여자는 워낙 거칠어가지고 말이지"
보라선배가 여자들을 보고 눈짓하자 여자들은 다급하게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정말 뜬금없는 상황에 나는 어이가 없어 멍하니 보라선배를 바라봤고 보라선배 또한 특유의 능글거리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 지금, 이게 뭐 하시는 일인지..."
"응? 뭐 하는 일이긴. 사과 받아 줬잖아. 아마 내가 아니었으면 이대로 묻혀 버렸을 텐데"
선배의 말에 나는 멍하니 선배를 쳐다 봤다.
'아니 그니까 그 묻혀지는 걸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일에 끼어드냐고요 씨발!'
이걸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지 아니면... 혹시 내가 모르는 선배와의 접점이 따로 있나?
그렇다면 또 모르는 일이다. 선배의 처지에선 예전에 알던 후배를 도와 줬을 뿐이니까 말이다.
"... 저기 혹시 저희 전에 만난 적이 있나요...?"
"아니? 어제가 첫 만남이었는데?"
"..."
"아. 들어 보니까 은하랑 사귄다는 얘라면서? 그것 때문에 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다고 들었는데"
보라선배가 활짝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 진짜 뭐지 이 사람?'
알건 다 알고 나랑 친하지도 않으면서 이런 짓을 벌였다는 거야? 이게 대체 뭔 오지랖이야 씨발.
"그런데 있잖아"
"... 네?"
"너 진짜 은하랑 사귀는 사이니?"
"..."
이건 또 뭔 개소리야. 여기서 서은하가 갑자기 왜 나오는 건데?
"... 그건 왜...?"
"궁금하잖아?! 은하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데"
"... 은하랑 아는 사이세요?"
"어? 뭐 아는 사이기는 한데..."
"... 한데?"
"... 뭐 일단 그렇게만 알아둬"
내 말에 보라선배가 말을 얼버무렸다.
거기에서 나는 선배가 내게 뭔가를 숨긴다는 것을 어렴풋 눈치챌 수 있었다.
"... 사귀는 사이 아니에요"
"그래? 뭐 아니면 말고... 그냥 궁금해서 물어 봤어"
"..."
이건 또 뭐라고 해야 하는지. 사람에 따라 어쩌면 되게 무례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또 그냥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본 것 같기도하고.
'... 왜 이렇게 서은하 같지?'
멍청함은 덜해지고 성격이 조금 더 유해진 서은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보라선배에게서 은근하게 은하의 냄새가 풍겨져 왔다.
위이잉
그때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미친 듯이 진동했다.
나는 그제야 은하와 병원에 가기로 한 약속을 떠올렸고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는 보라선배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저기 저 약속이 있는데 이만 가 봐도 될까요...?"
"응? 아! 그래 미안 해. 내가 너무 잡아둔 것 같네"
선배가 미안하다는 눈치로 내게 가보라며 손짓했고 나는 서둘러 강의실을 뛰쳐나갔다.
위이잉
"... 어"
[너 어디야? 설마 병원 안 가려고 지금 째는 건 아니겠...]
"... 거의 다 왔으니까 기다리기나 해 시꺄"
뚝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원래 약속 시각은 칼 같이 지키는 사람인데... 이게 다 그 이상한 선배 때문이다.
마침내 주차장에 도착한 나는 숨을 고르면서 주위를 둘러보다 은하의 차를 발견하고 서둘러 그쪽으로 달려갔다.
달칵
"미안... 조금 늦었지...?"
"... 에휴 빨리 들어오기나 해. 찬 바람 들어온다"
되게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는 은하였지만 나는 아무말없이 차에 올라탔다.
부르릉
"일단은 병원에 들려서 치료받고 같이 점심이라도 먹을 거야"
"... 야 근데 진짜 이 정도로 병원은 안 가도 될 것 같은..."
찌릿
"... 뭐 그런 생각이 있었다는 거지.. 지금 생각해 보니까 역시 병원에 가는 편히 좋을 것 같네"
독수리마냥 매섭게 나를 노려보는 은하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은하의 말을 수궁했다.
'... 씨발. 왠지 우리 둘이 캐릭터가 바뀐 것 같은데'
내가 점점 바보화가 되어가는 건지 반대로 은하가 바보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건지 원.
뭐 어쨌든 그게 중요한건 아니고 나는 은하에게 보라선배와 아는 사이인지를 물었다.
"신보라...? 걔가 왜"
"사실 아까 보라선배님하고 마주치느라 늦게 온 건데..."
나는 아까 보라선배와 있었던 일을 은하에게 말했다.
은하는 아무말없이 내 얘기를 들었고 보라선배가 자신과 은하에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눈쌀을 찌푸린 체 손을 내저었다.
"... 진짜 개지랄이야"
"너 뭐 보라선배님이랑 따로 아는 사이야?"
"..."
내 말에 은하가 뭔가를 망설이는듯 하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언니야"
"... 언니?"
"응. 배다른 언니. 엄마는 같은데 아빠는 다른 언니"
뚝
순간 내 뇌회로가 정지가 됐다.
'... 뭐라고? 배다른 언니라고?'
세상에 그게 정말이면 내가 지금 물어본 것은...
"... 뭘 또 혼자 심각한 표정을 짓고있냐?"
"... 아니 나는 그럴 의도로 말하려는게 아닌..."
"됐어 시꺄. 그냥 대충 넘어가. 뭐 또 이상한 상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처피 나랑 언니도 그렇게 사이가 나쁜건 아니야"
"... 그래?"
은하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나였다.
'설마 은하에게 언니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그것도 학교에서 예쁘기로 유명한 보라선배라니. 어쩐지 유독 보라선배에게 은하의 얼굴이 보였는데... 역시 내 눈이 틀린게 아니였네.
"... 그래도 별로 가깝게 지내지는마. 피곤한 성격이니까"
"... 너도 선배님 못지 않게 옆에 있으면 존나 피곤하거든?"
"뭐래? 나처럼 눈치 빠르고 성격 좋은 사람이 어디있다고"
"..."
"... 너 또 속으로 욕했지"
"... 무슨 소리야? 내가 널 왜 욕해"
은하가 수상쩍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애써 그 시선을 무시했다.
하여간 꼭 이렇게 쓸데없는 상황에서만 눈치가 빠른 년이다.
'... 뭐 그래도 보라선배보단 은하가 좀 더 나은 것 같네'
내 착각일 지도 모르지만 그 선배는 그냥 자신의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 하는 성격 같으니 뭐. 차라리 이런 면에선 은하가 훨배는 나은 것 같다.
"... 어휴. 내가 그렇게 좋냐? 아주 그냥 눈에서 꿀이 떨어지네"
"..."
"뭐 나니까 그럴 수 있는거겠지만 말이야~"
"... 에휴 씨발"
걍 둘다 성격은 병신인 것 같다.
어쨌든 그렇게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점심까지 먹은 후에야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달칵
"아으... 뭔 날씨가 추웠다 시원했다 그러냐"
"... 애새끼 마냥 아까부터 계속 툴툴거리네"
"아니 추운걸 춥다고 말하는게 툴툴거리는거냐?"
"그걸 씨발 하루종일 처말하는데 그게 툴툴거리는거지 병신아"
벌벌 떠는 은하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보일러의 온도를 높였다.
말은 이렇게 해도 명색이 집주인인데 집이 춥다면 따뜻하게 만들어야겠지 뭐.
"조금만 기다려. 보일러 온도를 올렸으니까 말이야"
"... 으으 우리 그냥 나가기 전에도 보일러 좀 미리 돌려놓으면 안되냐?"
"아니 아무도 없는 집안에 보일러를 왜 돌려 미친년아"
"그래야 들어오면 바로 따뜻해질거 아니야..."
은하가 몸을 벌벌떨면서 말했다.
이건 뭐 철이 없는건지 아니면 자기가 돈이 많다는 걸 어필하는건지.
보일러가 틀어지고 집안이 완전히 따뜻해져서야 패딩을 벗은 은하였다.
"... 이제야 좀 살겠네..."
"한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자가 무슨 패딩이냐며 지랄해댔던 새끼는 어디에 갔고 왠 춥찔이가 한명 왔는지..."
"원래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도 같다 라는 말 몰라?"
"...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마냥 처맞어볼레?"
"... 너는 어떻게 거친 말 밖에 하지를 않냐? 말을 유하게 좀 해봐"
"내가 왜 말을 유하게 해야 되는데"
나한테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리고 애초에 씨발 너랑 같이 살면 말이 거칠어 질 수 밖에 없어 이 미친년아.
소파 위에 몸을 축 늘어뜨린 은하가 눈을 지그시 뜬 체 나를 바라봤다.
"그럼 우리 내기해볼레? 일주일 동안 비속어나 욕설을 사용하지 않고 말을 유하게 말하면 내가 소원하나 들어줄게"
"... 난 뭐 너한테 바라는 게 딱히 없는데?"
"... 풉! 쫄리면 걍 쫄린다고 말해 새꺄. 하긴 니 성격상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뭐"
은하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이새끼가 갑자기 되도 않되는 도발을 하네? 이런 병신 같은 도발에 너라면 넘어가겠냐?'
"... 그 뭐야 요즘 인터넷에 이런 유행어들이 돌더라"
"...?"
"... 허접♥"
"..."
"꼴에 쓸데없는 자존심만 챙기려는 허접♥"
은하가 앙증맞은 표정으로 내게 별 이상한 말을 지껄였다.
'저 씨발련이!'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개새끼야!"
그리고 그 도발은 생각보다 효과가 엄청났다.
* * *